역사로 민족정신을 깨운 단재 丹齋 신채호申采浩


Name: 태을천77, Date: 2008.01.28. 22:22 (Hit: 53)

역사로 민족정신을 깨운 단재 丹齋 신채호申采浩
 

  
 설 명절을 막 지낸 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지 71주기 되는 날이었다. 이날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단재 사당에서는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회 충북지부’ 등의 주관으로 추모행사가 열렸다. 
 
 천재적 사학자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가슴에 품었던 단재 신채호. 그의 날카로운 필치는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고고한 지성과 뜨거운 민족애는 조선민중의 혼을 깨웠다.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를 돌아다니며 민족사의 족적을 더듬어 역사를 바로잡아 동포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던 신채호 선생. 삼천리 한반도를 태극기로 뒤덮었던 3월을 맞아 단재 선생의 삶을 조망해본다.
 
 
 

  
 굽힘 없는 강직한 성품에, 일본에 고개 숙이는 것이 싫어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세수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단기 4213년(1880년) 양력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자치통감을 통달하고, 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그 박식함과 천재성으로 이름을 떨쳤다. 
 
 26세에 박사가 된 선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뛰어난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그 문명을 날렸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단재 선생에 대해 당대 우리나라 사가(史家)들 중에서 제1인자이며, 문장 호걸로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한다고 했다. 
 
 단재 선생의 첫 번째 일념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그것을 위해 찾은 대안이 민족사를 바르게 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1910년에 맨몸으로 조국을 떠난 선생은 남북 만주로, 북중국, 시베리아를 주유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다. 선생은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음을 확인하며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조선사를 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없어져버렸다고 비판하며 “집안현(고구려 유적지)을 한번 본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민족의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선생은 중국망명 시절, 너무도 빈곤하여 우리 역사의 유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어 발굴조사를 하지 못함을 비통해 하였다. 또 책 살 돈이 없어 하루 종일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주인의 핀잔을 맞으면서도 요긴한 구절은 베껴 썼다. 또한 독서력이 뛰어나 책장을 헤아리는 것 같이 훌훌 넘기면서도 책 내용을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생은 <조선문화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에 소개했는데, 수십만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고 ‘조선 역사의 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선생은 기존의 한국사, 즉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이어진 역사인식 체계를 비판하고 대단군조선-삼조선-부여-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되는 역사체계를 다시 세웠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대륙이 우리 민족의 영토였음을 밝혔다. 선생의 이러한 역사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수많은 논설과 역사서, 선언문으로 독립심을 부추겼던 선생은 1928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로 나서 비밀결사조직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한다. 그런데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어음을 만들어 사용하려다 발각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쓰러져 순국한다. 수감 중에도 틈틈이 역사책을 읽고 역사책을 구상했던 선생이기에 민족사를 온전히 복원하지 못한 깊은 한과 안타까움을 안은 채 눈을 감았으리라. 
 
 그런데 선생이 그토록 어렵게 밝혀낸 한민족의 역사건만, 오늘날 친일사학의 잔재와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여 근래에 또다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우리역사를 침탈당하고 있다. 
 
 또한 누구보다 조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누구보다 뜨겁게 조선을 사랑했던, 진정한 조선인이었던 단재 선생은 아직도 법적으로 대한민국인이 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일제 당시,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며 신고를 거부했던 단재 선생을 비롯하여 200∼300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직도 무국적 상태로 남아 있다. 
 
 또한 단재 선생의 묘소는 파묘되어 지금도 초라하게 이장된 상태이다. 다행히 청원군과 유족 측의 최종합의가 마무리되는 대로 올 상반기에는 묘정비를 새롭게 한다고 한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민족정신을 깨우고 역사 속에서 민족의 희망과 비전을 찾았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가의 손에 민족의 미래까지도 달려있음을 통찰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단재 선생의 못다 이룬 꿈,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 애국선열들이 지켜온 이 나라 이 땅에 이제는 우리가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