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대국적인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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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 개정전에는 교육법 제 1조였음>

 

교육법 제2조에서는 교육이념에 대한 목적 규정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규정하고 있다.

[전문개정 2007.12.21]

 

환웅은 제세핵랑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이름하여 신시(神市)라 하였다.
이를 일러 ‘환웅천왕’이라 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이 때부터 한국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헌법에 바탕을 둔 교육법의 기본정신이 되기도 하였다.

곧 교육법 제1조에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共榮)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천명함으로써 한국의 교육이념을 대표하였다.

 

홍익인간은 환인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정치·교육의 최고 이념으로, 한국 민족정신의 핵심을 요약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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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절강성의 전단강을 배를 타고 지나며 고려의 풍광이 아름답다며

회상에 잠겨 고려의 땅을 지난다고 하는 기록을 본다.

 

이 곳은 남송의 임안 곧 동방견문록에서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일컫는 호반의 도시 지금의 항쪼우(항주)가 있는 곳이다.

참고로 서긍은 북송 휘종의 신하로 절강성은 북송의 영토가 결코 아니었다.

이곳은 소동파가 절도사로 있어 서호의 둑을 막아 지금의 아름다운 서호를 만든 용정차로도 유명한 곳이다.

중국최고의 차는 단연 용정차로 강희제가 수양제가 판 대운하를 이곳까지 연결해 용정차를 대 먹은 곳이다.

월나라 서시가 놀던 곳이자 오월동주의 고사가 서린 곳이고 이태백이 술을 따르던 서시호다.

그런데 이 곳이 바로 서경에 삼묘족이 살던 곳이라 한 바로 묘요계의 동이9족의 근거지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월나라가 초나라와 같이 동이족이고 서시가 구천, 범려와 함께 동이핏줄이다)

이는 썩은 부유들이 존주사대주의에 입각

주 왕실은 높일 줄 알고 정작 자신들의 단군 조선은 정작 잃었기때문이다.

경덕진이라면 고려청자의 효시인 월도요가 있는 곳으로 지나혈통의 후예 석학  임혜상은

백월족이 동이족의 중심민족중의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백월과 형오계가 동이민족이니 양자강은 상고시절부터 사서삼경에 등장하는 삼묘족과

동이 9족 및 왜(대륙내 왜는 동이족의 한 멤버로 훈죽-선비-읍루-요,말갈,만주족)의 계통을 이은

우리 핏줄 요의 한 가신그룹이기도 했고

 

(북왜) 양자강유역에서 동이9족에 의탁해 살다 대만으로 들어가 독립했다가

일본열도의 왜와 합쳐 남왜를 이루기도 했다)가 차지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간단히 말하면 유방, 항우가 동이족 국가인 초나라 망명유민, 우리 핏줄이고 중국 4대미인 중 하나인 서시

그리고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가 모두 우리 혈통이란 얘기다.

이건 끌어부치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지나의 석학들이 명명백백하게 하는 소리다.

그것도 수없이. 중국(대만)의 최고 석학은 고고학의 서량지요, 문화인류학의 임혜상이다.

 

한국의 골빈 실증사학자들은 그들이 중국학계의 주류에 서지 않는다 반박한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가 동이 한겨레라 보는 그들인지라 그들이 주류에 설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은 양심적인 학자다.

이들의 사관은 중국 한족의 뿌리가 동이로부터 서이로, 다시 서이로부터 서하로, 서하에서 화하로,

 마지막으로 화하족에서 오늘날의 한족으로 피갈음의 역사를 거쳐왔는데 중국본토의 중심을 지킨 것이

바로 양자강 유역의 묘요계, 백월계(월나라), 형오계(오), 초나라, 서나라 등

동이9족의 역사와 태호복희 신농씨의 후예들의 9려국이라 한 바 있다.

임혜상은 진시황때 만리장성의 노역을 배경으로 하여

동이족을 모두 해산시켜 일반 백성으로 삼아 개산위민이라 했다.

이는 진시황때 비로소 주객이 바뀌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말로 대륙내의 주도민족 구려,

동이 9족의 백성들이 서하족내지 화하족해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주원장이 명을 건설하자 여진족인 자신의 혈통을 숨겼다.

조선의 이성계가 여진족인데(일급참모 퉁두란도 여진족였다) 자신의 혈통을 부정하기 위해 고려사를 왜곡하고

대대적인 사료수탈을 했다.

 

일왕 아키히토가 일본왕실이 백제 혈통이라고 고백했지만

왜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사기 일본서기를 왜곡해 1300년 역사를 2600년으로 늘여놓았다.

공자가 동이족 문서를 화하족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춘추사관을 만든 이래 사마천이 그 뒤를 이어

역사의 본 물줄기를 바꾸어 놓더니만 전국시대 진소왕의 증손자이자 조나라 한단의 대상인 여불의의 혈통인

태자 정(진시황)이 임금이 되자 자신의 동이족 혈통을 숨기기 위해 온갖 명분을 내걸고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오늘날의 지나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진시황부터 씨눈을 내기 시작해 한고조 유방에 이르러 비로소 한족이 된 것이다.

그럼 그 이전의 역사는 뭔가. 바로 공자가 중추를 꺾은 화하족의 역사인데 이건 결코 한족의 역사가 아니다.

중국민족사를 보면 굽이굽이 마디가 있다.

화하족 이전에는 하이브리드(잡종)화적인 측면에서 전혀 다른- 즉 변태의 정도,

잡종화의 정도가 다른 서하족의 역사다. 이 서하족의 역사가 바로 우임금의 역사다.

그 이전의 역사는 서이족이라 해서 바로 동이족의 조상인 소전씨의 혈통 신농씨의 배다른 형제 황제헌원의 역사다.

그러다 보니 중국역사자체가 통시적으로는 동이족으로부터 수많은 변태에 변태를 거듭하는

하이브리드 잡종화 과정을 거쳤기때문에 한족의 구성요소중 우리 동이족이 제2의 구성요소가 된 것이며

(임혜상 저 중국민족사 참조)

 

공시적으로는 혼혈족의 특성상 동이족도 자기들 민족의 하나라 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3성의 조선족 자치주만 보아도 조선족은 자기들 한 족의 한 멤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고구려를 이은 고려는 발해사 하나를 쓰지 못했고 발해역사를 전혀 갖질 못했으며

고려의 뿌리 궁예가 신라인이고 정인지 고려사를 보면 막상 왕건은 작제건의 신화를 내세워 당 숙종의 혈통으로

나온다. 그런데 막상 발해를 접수한 요는 동단국이라 국명을 바꾸고 발해사를 써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강토를 차지한 고구려의 후예라 주장한다.(요사)

뿐만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요는 험윤,이적,예,맥,흉노,숙신,읍루,말갈 등의

북방 동이족 계보를 이어받은 정통 흉노, 숙신(조선)의 후예라 하여

신앙도 동황태일(단군을 동황태일로 신앙함은 굴원의 초사에 보이니 초나라의 단군숭배를 알 수 있거니와

만주족이 단군 홍성제묘를 모시듯이 요가 정통적 신앙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도 보인다)을 신앙했으니 종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고려와의 정통성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나족이 고구려의 정통맥을

요가 이은 것으로 보고 다시 요는 한족역사의 일부로 본다한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득공이 저서 발해고 서문에서 한탄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이것은 왜그런가?

반도사와 대륙사의 구분으로 인한 획일적인 피아구분이 가져온 역사의 한계때문이다.

가령 정통성 빈곤의 이 성계 조선이 막상 형제국을 야만시하고 지나족 명을 천자국으로 모셨으니

그 인과응보는 정통성확보의 반대급부로 들여온 유교에 의해 문약해진 조선으로 하여금

오히려 옛 고구려 강토를 차지한 동족 요에게 당한 선례를 뒤이어 임진왜란으로 얻어맞고 청에게 정묘,

병자호란으로 쌍코피 터지도록 만든 것이다.

우선 단군을 볼 것 같으면, 단군은 천자로서 동순망질 사근동후한다 하여

일년에 4번 조근하여 배알을 받았음을 서전 요, 순전에 보이고 있다.

 

그런데 서량지, 임혜상의 역사를 보면 소수 실증주의의 눈먼 노예 식민사학자 나부랭이들이

중국의 고문서 한번 보지 않고 우리의 도가사서인 환단고기를 위서라 하고 있으나 사마천의 사기라든가

죽서기년 산해경, 회남자 등 각종 문서들과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이 서로 부합되고 있음을 본다.

단군조선은 그만두고라도 양자강 유역의 서나라만 해도

36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천자국으로 강역이 당시의 주나라보다 수십 배 큰 강대국이었으며

주나라가 수도까지 점령당한 적이 있음을 춘추는 고증하고 있다.

또 서경을 보면 황기천리라 하여 주나라 천자의 강역이 천리에 불과하고

요전을 보면 모옥이라 해서 궁전이란 것이 고작 띠풀로 얹은 초가지붕이다.

그 뿐인가 천자라는 요가 정사를 보는 궁실의 계단이 겨우 3개이니 오죽 초라한가.

 

요 또한 순을 내세운 단군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내쫓겨 감금되었고 단주는 도망갔는데 선양을 했다고

거짓 왜곡한 것이 바로 지금의 서전이다.

그나마 이 책은 공자가 쓴 책도 아니고 금문상서라 해서 후일 복생이라는 자가 쓴 위서이다.

(그나마 복생의 금문상서는 원전이 유실되어 전하지 않으니 이또한 위서다)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이 아니라 단군의 명을 받은 순에 의해 감금되고 투옥된 내용은 죽서기년과

환단고기에 나온다.

중국역사의 핵은 동이족인 우리 한겨레의 역사다. 공자가 중추를 부러뜨리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허리가 잘려나간 이후 수많은 사서들이 서로 베끼고 인용해 레미콘사관으로 변한 것이

중국의 역사고 또 이를 베껴 존주사대주의로 필사한 것이 바로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다.

해방이후 어뱅이같은 식민지 사관의 노예인 실증사학자들이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사가 이미 이러한 레미콘사관의 와중에 휩쓸린 줄 모르고 희미한 족적만 가지고

단군이 실재네, 허구네 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보다 훨씬 명확하고 출처가 확실한 수많은 자료들이

바로 단군조선의 실재를 기록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실재를 기록한 사료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글귀로 널려 있으니 두 눈가진 정상인이면 직접 확인해 보라.

우리민족은 김춘추에 의해 대륙을 포기하고 반도에 들어앉아 불교국가가 되었고 공자에 의해

우리의 단군조선을 내팽개치고 존주사대를 하는 썩은 유교국이 되었다.

김춘추에 이어 북벌파를 거꾸러뜨린 친명사대주의자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 충녕 세종이

고려사를 왜곡한 이래 이방원과 세종은 수많은 민족사서를 수탈 소각했다.

세종은 3대 가륵단군이 창제한 가림토문을 해제만 쓰고 그 공을 가로채 왜곡했다.

해방이후 서재필, 이승만에 의해 양키를 좇아 기독교를 확산해 기독교의 준 종주국이 되었으니 이로부터

우리의 단군역사는 더욱 숨이 졸리게 되었다. 단군을 우상이라 하고 신화라 하는 것은

역사에 무지한 반민족적 패역무도한 자들의 짓이다.

단재는 오죽하면 우리민족은 매양 석가가 들어오면 한국의 석가가 안되고

석가의 한국이 되고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의 공자가 안되고 공자의 한국이 된다고 했을까.

예수가 들어와도 한국의 예수가 아니되고 예수의 한국이 되고 마니 가히 무정신의 역사가 무정신 국가를 만들고

무정신의 국가가 무정신의 민족을 만드니 가히 두렵고 두렵지 아니한가.

소위 정치를 한다는 알만한 자까지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해방이후 목졸리고 뒤틀린 거짓 역사를 배워서

제 민족의 뿌리를 부인 할 줄 알았지 정작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서의 원 뿌리되는 책 한번 볼 줄 몰랐다.

그리하여 민족의 역사를 가다듬을 새 시대의 역사관을 제시할 책을 여기에 연재하게 되었으니

시대정신에 눈 먼자 보고 느끼라.


한국의 실증사학자는 매양 제 것은 업수이 여기고 시비를 걸 줄 알았지

지나의 사서삼경이 위서고 사마천의 사서가 위서인 줄 알면서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일본서기가 수많은 개찬과정을 거친 위서이고 고사기가 일개 무녀인 히에다노아례가 구술한 것임을 알아도

토 한번 달지 않는 썩은 것들이다. 실증사학의 족보 자체가 식민지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독일에서

고안 한 것을 일본이 수탈사관으로 도입하기 위해 이등박문이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송호수 교수의 "한민족사의 왜곡에 대한 글"과

박현(고려대 사학과졸,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의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시비 - 위서 아니다"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송호수(宋鎬洙) 교수

최근 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 (衛滿) 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단군 이전에 환웅천황 (桓雄天皇) 의 역사 시대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환인천제 (桓因天帝) 시대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 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성기'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신라 시대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이 1200~1400 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삼성기'의 기록을 그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 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 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 외국 학자들의 논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일본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살았고 신석기 시대 초에 이미 독자적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동이족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중공의 유명한 고고학자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광명일보'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산동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문자가 나오고

그 곳을 통치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까 지금으로부터 5785 년 전 것" 이라고 합니다.

 

5785 년 전이라고 하면 단군 건국보다 약 1500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가 동이족이라는 사실이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소호씨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소호금천씨가 전부 동이족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조선일보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 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 년이나 더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놓고 볼 때, '삼성기'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습니까?


소호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단군 이전에 벌써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 천년 전의 거대한 궁터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식자우환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 천년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 천년 이전에는 국가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 천년 이상 소급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단군 조선의 근거지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니다. 아사달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지난 78 년 8.14 자 북한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 천 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 천 년 전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 학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고조선' 이란 책을 보면 "조선족은 4 천년 전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단군 조선 시대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삼한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 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사상의 원형 홍익인간(弘益人間) - 우리가 일찍이 남북 5 만리 동서 2 만리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환웅천황 시대가 1565 년 동안 단군 조선 시대가 2096 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예사로이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환웅천황 시대까지는 그만두고라도,

단군조선 시대만 해도 2096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서,

아니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한 개의 왕조가 2 천년간 지속된 그러한 역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하 은 주는 동이족이니까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로 300 년 이상 지속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 년도 채 못 가 전부 망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해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위대한 철학, 그 철학은 바로 홍익인간 (弘益人間) 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법 제 1조에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 1조가 뭐냐 고 하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 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홍익인간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환인이 환웅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홍익인간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 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 (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니다.

이렇듯 홍익인간이란 용어의 출처는 환인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실은 환인으로부터 홍익인간이 나와서

환웅 이후 단군이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법 제 1조가 홍익인간입니다.

 

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헌법 전문을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는데 맨 끝이 좋지 않아요. 1980 년이 뭡니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 년밖에 안되었다는 얘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 년이라고 쓰며 기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 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 나라는 왜, 국통이 없습니까? 1980 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 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 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 (造化經), 교화경 (敎化經), 치화경 (治化經),

이 삼화개천경 (三化思想開天經) 이 바로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조화경을 '천부경'(天符經), 교화경을 '삼일신고' (三一神誥) 라 하며

치화경을 '참전계경' (參佺戒經) 이라고 하는데 이 3대 경서가 그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1 만년 역사의 뿌리가 곧 이 3 대 경전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소위 유교 사상 도교 사상이 파생되어 나갔습니다.

구체적으로 반증을 제시할까요? '맹자'에 나오는 유교의 5륜은 아무리 유교에서 썼다고 해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출처는 동이족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 (司徒:문교장관) 를 명하고

인간에게 윤리를 가르치라고 해서 글이 만든 게 바로 5륜입니다. 글은 동이족이입니다.

 

그리고 순임금도 '맹자' 에 보면 "저풍 (諸馮) 에서 태어나 부하 (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명조에서 죽었는데

그는 동이족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륜을 선포한 글(契) 이나 오륜을 선포케 명령한 임금 순 역시 동이족입니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삼강오륜의 출처는 동이 문화입니다.

공자는 어떤가요. 공자는 동이족의 혈통으로 은나라 왕족인 송미자 (宋微子)의 후손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하였고

'고사변' 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공자 자신도 '논어' 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 (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해서

서술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혔고

중국의 고전 '초사' 를 보면 "황제 (黃帝)는 백민 (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황제의 5세손인 요임금이 동이족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동이계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에서 파생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 (老子)가 황제의 사상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 (黃老之敎) 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동이족인 황제의 사상, 즉 동이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

노자의 도교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변질되어

고구려 시대 때 역수입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역시 그 뿌리는 우리의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석가 이전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 (前佛時代)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 (指空禪師) 의 천보산 희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석가 자신도 '대방광 불화엄경'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를, "해동 금강산에 법기 (法起) 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고 있는데 그 불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 (從昔己來)" 고 증언하고 있으니,

이는 석가 출현 이전에

우리 나라에 이미 전불시대 즉 가섭불 (迦舌佛)시대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섭불이 앉아 법을 설한 연좌석 (宴坐石) 이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옥룡집' (玉龍集) 과 '자장전' (慈藏傳) 에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 년전에 나온 '황제내경소문' (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동이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 즉

"동방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로 문화가 발생한 곳 (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구상 문화의 최초 원산지는 동이족이 살고 있는 동방지역이라는 거죠.


기독교의 한 단면만 말씀드리자면 법률학자인 동경 대학의 나까다 (中田薰) 교수가

'고전법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 (文化東源論考)' 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경의 출처를 조사해보니까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 년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역사 시초가 지금으로부터 5500 년 전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족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학자 크래머 (Kraemer, 1897-) 와 일본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종합해 보면,

 "수메르족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생한 민족이 절대 아니고 동방에서 이동해 왔다.

그것도 문자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태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문자를 가지고

5500 년 전에 서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 (Enril) 영웅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 년 전에 복희문화를 가지고 동이족이 서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최근 미국에서 연구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 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릅니다. 소머리강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삼일신고' 신훈 (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 (在無上一位) 하사

유대덕대혜대력 (有大德大慧大力) 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 (主無數世界) 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완벽한 기독교의 일신사상 그대로입니다.

 

또 '참전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 만에 이루어 마쳤다.

(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기독교 창세기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음도 같고 행적도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나 수두 제단에 치외법권 지대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동지에 양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구약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동지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풍속들이 여기서 건너가 전해 내려온 거죠.

서양 사상을 종합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둘인데 소급해 올라가면 이 두 가지 사상이, 수메르 문화에서 나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신본과 인본사상은 우리의 신인사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지요.

 

이렇듯 지구상 모든 사상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빛은 동방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세계적으로 보아서 9 천년이 되는 역사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서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족이 5500 년밖에 안됐는데... 이런 역사가 없죠.

 

제 4빙하기 이전의 역사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억년 전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인류하고는 관련지을 수 없습니다.

 

제 4빙하기가 이 지구를 휩쓸고 간 뒤에 살아 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최초에 천하(天河)의 동서에 있다가 칠월 칠석날 만나 가지고

오색 인종을 낳았다" 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 갑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갑자가 60 년이니까 즉 21960 년 전에 제 4빙하기가 물러가고 제일 생명력이 강한 한 남성과 여인,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판도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방 지역은 천지지 소시생야라"

우리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 왔다 (폄石亦從東方 來)" 라고 했듯이

한의학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漢"에서 "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어야 했어요. 한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중국이 漢나라 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면 어떻게 漢나라 라는 국호가 생깁니까?

 

그러니까 한나라가 있기 전에, 이미 이 글자 한문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동이족이지 않습니까?

동이족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이지 왜 중국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 모든 사상의 원천은 홍익인간 사상입니다.

그 홍익인간 사상의 내용은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이 이 원리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게오르규 (Gheorghiu 1916~) 가 "홍익인간이란 단군의 통치 이념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 이라고

지난 1986 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 지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신부 옷을 입고 성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 계가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한국 민족이 낳은 홍익 인간 사상은 미래 21 세기의 태평양 시대를

주도할 세계의 지도 사상이다" 고 역설했습니다. 그 이상 얼마나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등하불명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독일철학 어쩌니 하고 아까운 시간만 다 허비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이다" 고 하는데

우리 자신은 그걸 모르고 외국 사상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방황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상들은 실로 홍익인간 사상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결코 홍익인간 사상하고 대립된 사상이 아니다.

가령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유교나 불교 기독교라는 것은 홍익 인간 사상과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홍익 인간 사상의 내재적인 사상이다" 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상황이 대단히 여의지 않고 또 다른 나라와 달리 적어도 2 천년 동안 외래 세력에 밀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록에 담겨져 있는

우리 민족 사상사적인 내용이 너무나 엄청나게 오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중국적인 사대주의 사관 (事大主義史觀) 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변조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구 문화의 홍수에 밀려서 바른 사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분통스러운 것은 이 문제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기약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비관적일 수밖에 없느냐 하면,

현재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일제 하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서 배운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각 중고등학교에서 그러한 사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계신 분들이,

과연 우리 국민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죠. -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시비 - 위서 아니다" 
박현(고려대 사학과졸, 동대학원 한국사 전공)  한국고대지성사 산책, 백산서당 1995. 5.25

(페이지 66~ 73쪽)

1)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임의로 조작된 책이나 내용이 사실과 어긋나는 책은 독서의 본래 목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가운데서 집필 시기나 필자 및 형식 등이 조작된 것을 위서(僞書)라고 한다.

 

그리고 형식과 상관없이 내용이 불순하거나 기록된 내용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곡서(曲書)라고 부른다.

형식에서 거짓을 보이는 위서는 내용 면에서도 곡서인 경우가 많고, 곡서 또한 위서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물론 이 두 측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서일 경우 일단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위서를 판별하는 일은 학문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다.

일찍이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1873 ~ 1928)는 "중국역사 연구법(中國 歷史 硏究法)"을 지어

위서를 판별하는 표준적인 사례를 밝혔으며, 버나드 칼그렌(Bernard Karlgren)도

 "중국고적 변위법(中國古籍 辨僞法, The Authenticity of Ancient Chinese Texts)에서 위서 판별의 방법을 밝혔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대부분 그 이전의 중국 문헌학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다루어오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론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서에 대한 판별은 해당 책자에 따라 방법론이 조금씩이나마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의 상고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몇 종류의 책이 이러한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다.

"환단고기"가 그 대표격이다.

"환단고기"는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지은 것을 모아서 계연수(桂延壽)라는 사람이 다시 편찬한 뒤

1911년에 처음 간행했던 기록인데 그 구성은 대개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단군시대 이전을 다루는 "삼성기(三聖記)이고,

둘째는 단군시대의 연대기인 "단군세기(檀君世記)"이며,

셋째는 단군계의 한 갈래인 북부여의 연대기인 "북부여기(北夫餘記)"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단군시대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평론적 연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태백일사(太白逸史)"이다.

이들 책이 위서 시비에 말려든 것은

우리 상고사가 공백지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담고 있는 내용은

중국의 "사기"나 "상서"에서 보이는 내용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연대기와 함께

중국 한족에 대한 조선족의 우월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민취급하듯)

그 결과 동양사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 책들은 곧 위서 시비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상당한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위서라는 판결 쪽이 현재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문헌을 두루 그리고 깊이 연구하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런 입장이 정설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필자는 같은 젊은이로서 가끔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상고사를 설명하는 처지인지라

그 진위 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아니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이 작업을 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이고 복잡한 방법을 들추어 시비를 밝히는 것은 이 책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다만 그것을 위서로 규정하는 학자들의 표준적인 견해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참과 거짓을 판별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역사 연구회 고대사 분과에서 지은 "한국 고대사 산책"의 다섯번째 주제는 "환단고기 믿을 수 있나"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서적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표준적인 견해들이 두루 나타나고 있다.

첫째,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남생(南生 : 연개소문의 아들)의 묘지명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환단고기"에 나오는데

그것은 "환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지어진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1923년 이전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만약 남생의 묘지명이 1980년도에 발견되었다면 환단고기는 1980년 이후에나 지어진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1949년에 조작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틀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같은 사례가 있다.

대진국(대진국 : 발해는 자기 스스로를 발해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항상 대진국이라고 불렀다)의 문제

(文帝: 중국측 사서에서는 문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옳다)인 대흠무(大欽武)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貞孝)공주의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야 알려졌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이미 대흠무의 연호가 대흥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태백일사"는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독자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다.

실제로 1920년에 간행된 책 가운데도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찬 발간한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천부경을 인용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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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정신철학 통편"
1920년 북경 정신철학사에서 전병훈이 펴낸 책으로 원래 제목은 "정신심리도덕정치철학통편"이었다.

이책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입수한 경위가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동굴 석벽에서 천부경을 보고 1917년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약초를 캐내기 위해 영변의 백산(白山)으로 들어갔다가 천부경을 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묘향산과 백산이 같은 곳임은 "영변군지"가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차이는 문자의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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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훈이라는 분이 저술한 "정신철학 통편(精神哲學 通編, 1920년 간행)인데 명문당에서 근래(1983년)에 영인본으로 간행한 적도 있다.물론 이것은 1949년 조작설을 전면 부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둘째,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이

그와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전세계"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와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위서 시비의 좋은 빌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단 하나 밖에 없다는 선입견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동일한 지명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낙양(洛陽)이라는 지명만 하더라도 하나가 아니다.

황하의 중류에 있는 중국의 고도 가운데도 낙양이 있으며,

경상도 상주도 그 옛 이름이 낙양이었음을 구태여 예로 들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아울러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요사(遼史)"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비판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환단고기"의 경우 몇몇 부분은 명백히 편찬자인 계연수가 추가로 서술한 곳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부분은 독립운동가이며 단재 신채호 등과도 친밀했던 계연수의 입장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단재 신채호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부분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용어를 자신의 시대에 맞추어 개작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 기록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등의 문헌이

전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희귀한 책들을 찾아 모으라고 명령을 내린 조선 세조 때나 성종 때, 명령에 따라 수집한

희귀본 20여종 가운데 "조대기"라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그 당시에는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성종 이후 이름을 감추고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리학에 의한 학문 세계의 순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이나 세조가 불교를 숭배한다고 목숨까지 내걸고 반대하던 성리학의 천박한 추종자들이

성리학 이외의 기록과 그 기록의 내용을 배타적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흔히 "도가의 역사서"라고 불리는 이 같은 기록들은 대부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라지거나

개인 소장가의 장농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이론적 라이벌이었던 윤휴(尹휴, 1617 ~ 1680)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정치파동의 계기가 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자와 소중화사상을 배격하고

단군 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이들 기록이야 어찌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대사 산책"의 해당 주제 필자는 특별히 숨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찌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지하활동을 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숨어서 활동을 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이 비판자의 주장속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지나칠 수 없다.

 

민족사서에 대한 탄압과 핍박은 빨갱이 색출보다 훨씬 심했다.

사실상 현재 제기된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주장은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 시비를 붙자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적 자료와 고문헌을 엄밀히 검토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송찬식(전 국민대)씨는 대종교의 교리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위서 시비를 걸었고,

박광용(성심여대)씨는 기독교 사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시비를 걸었으며,

이기백(한림대)씨는 청동기 시대 국가이론을 근거로 시비를 걸었다.

 

아직도 위서를 주장하는 견해에는 이런 개념 싸움에 그치는 유치함이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문헌을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면,

이런 류의 시비는 그만두고, 역사적 자료를 중심으로 깊이 있고 분명한 근거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박광용씨의 경우

기마종족 연맹의 과거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내용이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옹호와 연결된다고 하는 주장["역사비평" 10] 까지 내걸고 있으니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경우, 모든 기마종족을 같은 동포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며,

실제 그 시대의 현실이 그와 같았으므로 외형상 대동아 공영권과 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등의 내용은 평등한 민족(종족)연맹을 강조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종족의 패권주의적 식민체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의 지식이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연결되는 순간이다.

 

그런 논쟁이라면 어떤 비판에도 이 기록의 진실됨이 손상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과 함께 나름대로 엄밀한 분석을 거쳐 필자는 이 기록을 사용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현실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것을 사실 규명의 주요한 자료로 채택하는 바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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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 이념의 유래와 역易의 창지사 복희 성인

 

대저 홍익인간 이념은
환인천제께서 환웅에게 전수하신 것이다.

 

일신께서 참 마음을 내려주셔서,
사람의 본성은 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상제님의 진리(神敎)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인간을 대광명에 통하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통치 정신은 신시 배달이 단군조선에 전수한 심법이다.


환역(桓易)은 관원인 우사에게서 나왔다.
당시에 복희께서 우사가 되어 육축(六畜)을 기르셨다.

 

이때에 신룡神龍이 태양을 따라 하루에 열두 번 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환역을 지으셨다.

 

환桓은 희羲와 같은 뜻이요.
역易은 옛적에 쓰인 용龍자의 원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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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는 배달 시대의 행정관이다.

육축: 집에서 기르는 대표적인 여섯가지 동물인
소,말,돼지,개,닭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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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의 통치 정신

 

환인께서 처음 여신 재세이화.홍익인간은 본래 환국의 7세 지위리환인께서
배달을 여신 초대 환웅천황에게 전수하신 가르침이다.

 

일연의<삼국유사> <고조선 조>에도
환인께서 환웅에게 전수하신 역사개창의 이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이 이념을 단군왕검께서 처음 여신 가르침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는데,
하루 속히 바로잡아야 할 국통國統에 관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삼신상제님의 진리(신교)로써 백성을 교화하고<재세이화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홍익인간弘益人間>는
위대한 한민족의 인간 구원 정신은
수천 년간 민족의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져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마침내 19세기 말에 우주의 주재자로서
이 땅에 강세하신 강증산姜甑山 상제님에 의해
인류 구원의 법방인 천지공사天地公事로써 명괘하게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즉 홍익인간 정신은 궁극적으로 해원, 상생의 도道로 실현되고,
곧 닥칠 후천개벽기에 3년간에 걸쳐서 인류를 건져 세계 문명을 통일하는 것으로
한민족 9천년사의 국통에 큰 결실을 맺게 된다.
<개벽실제상황>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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