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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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최치원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 서로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 의거하여,

국호(國號)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대진국 발해를 개국한 태백산(太白山)은

바로 상고시대에 환웅(桓雄)께서 하강하신 산이며, 신라 말기의 대학자이자 도인이었던

고운(孤雲) 최치원( 857?? ) 선생께서 《천부경(天符經)》을 발견한 산이기도 하다.

《천부경》은 상고시대에 환웅께서 설하시고, 신지(神誌) 혁덕이 받아 적었다고 전해지며, 녹도문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간략하면서도 정밀하여서, 사람이 소천지(小天地)라는 이치를 일목요연하고도 명백하게 밝혀놓고 있다.

태백산(太白山)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한 학설은 지금의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다른 학설은 현재 중국의 서북지방에 있는 태백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현재 중국의 서북지방은 고조선시대에는 치우천황이 활동했던 동이족의 무대였다.

그러므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단군전비(檀君篆碑)를 직접 본 것이 바로 이곳이며,

그가 당나라에 체류했던 기간일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과 그 부친 대중상(大仲象)은

668년 고구려(高句麗)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遺民)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고구려의 영토 회복에 나섰다.

신인(神人)이 대조영의 꿈에 나타나 금부(金符, 金尺)를 주면서 “天命이 네게 있으니

우리 진역(震域)을 다스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建元)을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대조영 자신 지극 정성으로 하늘에 제(祭)를 지냈다고 한다.

대조영(大祚榮)과 그 부친 대중상(大仲象)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太白山) 동북쪽 땅을 확보하고 굳게 지키니, 고구려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 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북 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전략상의 이점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이점도 대단히 커서

여러 가지 특산물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에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솔빈(率賓)의 말과

위성(位城)의 철(鐵)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대조영은 철의 생산지였던 위성부터 먼저 점령하였다.

나·당 연합 전쟁으로 고구려 땅을 나눠 갖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유화 정책을 써서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구려가 지난 날 통치했던 영토의 동쪽에 세력을 일으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파견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대조영은 정면대결을 피하고, 좀 더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천문령(天門嶺)에서 잠복하였다.

고구려 군대는 본래 기습공격에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조영은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인 천문령(天門嶺)으로 당나라 군대를 유인한 다음,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나라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서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고,

대조영은 고구려 땅 전체를 차지하려던 당나라의 야욕을 완벽하게 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고, 사방 5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해 나갔다.

천문령(天門嶺)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승리한 뒤

대조영은 698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705년 당나라와 화친한 뒤, 713년에 발해(渤海)로 국명을 개칭하였다.

대진국 발해(698~926)는 당나라와 거란을 제어하리만큼 강력하였으며,

단기(檀奇)의 계통을 이어 태백산(太白山)에 보본단(報本壇)을 설치하고 해마다 천제(天祭)를 지냈다.

대조영(재위 699~719)은 또한 고구려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민족의 ‘고서(古書)’들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국조(國祖)이자 신조(神祖)인 단제(檀帝)로부터 고구려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천손(天孫) 대대로 계승된 계통을 혁혁하게 세웠다.

대조영(大祚榮) 자신은 단군왕검 때부터 전해온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찬양문을 짓고,

친동생 대야발(大野勃)은 서문을 짓고, 개국공신 임아상(任雅相)은 주해를 지었다.

그리하여 대조영이 지은 《삼일신고 어찬 진본》을 태백산(太白山) 보본단에 모셨다는

기록이 《대진국본기(발해본기)》〈제3대 문황조〉에 전하고 있다.

대진국의 고왕(高王)인 대조영이 단군왕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삼일신고》에 찬양문을 지었다는 것은,

고대 조선의 역사적 사상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음을 스스로 천명(天命)한 것이었다.

대조영은 또한 동생 대야발(大野勃)을 시켜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복원·편찬 시켰다.

이에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은 장장 13년에 걸쳐서

자료조사와 집필 작업 끝에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복원·편찬할 수 있었다.

대야발(大野勃)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藏書)와 옛 비(卑)와 흩어져 있던 사서(史書)들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여러 역사적 평론을 참고하여, 13년에 걸쳐 비로소 《단기고사(檀奇古史)》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원본은 임금에게 올려 목판에 글자를 파서 국서고(國書庫)에 두고,

또 그것을 베껴서 백성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대야발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서문(序文)에서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백제와 고구려의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불태운 것을 몹시 원망한다.’고 밝혔다.

대야발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복원·저술하는 13년 동안 돌궐국(突厥國, 지금의 터키)에

2차례나 들어가 옛 단군(檀君)시대에 세운 비문(碑文)인 단군고비(檀君古碑)를 현지 답사하였다.

고조선 단군의 옛 비석인 단군고비(檀君古碑)가 왜 돌궐국(突厥國, 지금의 터키)에 있을까?

돌궐은 몽고족의 일파이며,

몽고는 원래 단군조선 초기인 서기전 2137년 단군조선 4대 오사구 단군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汗)으로 봉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돌궐도 단군조선의 후예인 것이다.

사라진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역사책을 복원하기 위하여 대조영과 대야발이 1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은, 고구려 정신을 올곧게 정통으로 계승하여 후대에 이어주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 698~926년)는 220여 년간 15왕조에 걸쳐,

고구려 고토(古土)를 지키고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자 혼신(魂神)의 힘을 다한 나라였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은 진국(震國)의 부족 하나가 금(金)나라가 되고,

금(金)나라가 청(淸)나라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사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서

진시황(秦始皇)이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방사(方士) 한종(韓終)과 서불(徐?) 등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쌍을 신선(神仙)이 살고 있는 해동(海東) 발해(渤海)의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냈다고 하였다.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말하며,

바로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실제 진시황이 보낸 방사(方士) 한종(韓終)이 삼한(三韓)에 와 머무른 자취가 있으며,

서불(徐?) 역시 우리나라 남해에 온 증거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1974년 2월 16일 경남기념물 6호로 지정되어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제1회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진시황(秦始皇) 뿐만이 아니라, 한무제(漢武帝)와 제(齊)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또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등도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여러 방사(方士)들을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발해(渤海)의 해동(東海)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낸 사람들이다.

이렇듯 신선사상(神仙思想) 기원(起源)의 원류는 바로 한국(韓國)에서 비롯되었다. 

발해는 만주의 동복에서부터 연해주의 일부, 한반도의 동북부를 포함하여 해동성국을 이룩하여

200년 동안 존속했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다.

 

그러나 역사기록을 후세에 전하지 못하여, <新唐書渤海傳>, <遼史地理志>

(주, 발해를 멸망시킨 契丹族의 정사) 등에 그들 나라의 역사로 기록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발해국의 유민을 받아들였던 고려가 <발해국사>를 자국의 역사로 기록하여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나가 발해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는 일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발해는 우리 영토다"하는 인식이 보편화 된 때는 조선왕조의 정조 때였다.

이 시기에 유득공이 <발해고> 전1권을 정조 8년 윤3월에 탈고였다.

<발해고>는 <君考> , <臣考>, <地理考>, <職官考>, <儀章考>, <物産考>, <國書考>, <屬國考>의 9고로 나누어

<발해왕조사>로 편찬되었다.


유득공 이외에도 한치윤이 <海東繹史>(권11), 한진이 <海東繹史續>(권9),

정약용이 <我邦彊域考>에 <渤海考>, <발해강역고>를 수록하였고, 홍석주가 <발해세가>를,

서상우가 <발해강역고>를 저술하는 등 발해사 연구가 꽃을 피웠다.

한치윤과 한진은 발해왕조의 세계와 강역의 역사를 수집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발해사 연구를 기록한 것이었다.

유득공이 발해사를 처음으로 역사로서 체계를 세워 기록했다는 점에서 선각자로서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발해국에서 남긴 발해사가 없어서, 당서와 요사 등 각국의 역사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기록을 발췌하여

발해사를 엮어야 했으므로 다소 기록상의 실수를 범한 면도 없지 않았다.

발해국사에서 강역과 지명에 대하여 <당서발해전>과 <요사지리지>의 부정확한 사서를 근거로 했기 때문에,

<신당서>의 기록과 <요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가 많아 연구의 미진함을 보인다.

일본은 발해와 국서를 교환하는 등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발해고>는 발해국이 일본에 보낸 국서 6통을 일본 사료에서 찾아 싣고 있다.

일본의 백조고길白鳥庫吉은 발해사 연구에서,

고구려유민이 말갈족을 이용하여 국가광복에 성공하였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시조 대조영을 비롯하여

상류지배계층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밝혔다.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강역에서 정확을 기하지 못하고 놓친 부분을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보완하였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발해왕조사를 신라왕조사와 고려왕조사의 사이에 자리잡아 주는 등

발해사가 우리역사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체계를 세워 주었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과 대진국

드라마 대조영大祚榮을 보면서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발해渤海라는 나라 이름과 발해라는 지명이다.

발해는 조선이 건국한 지역인 발해의 현덕부顯德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현덕은 덕을 드러낸다는 말인데 현덕부와 이웃한 창덕부彰德府와 함께 조선의 고토였다고 생각된다.

 

창덕부는 덕을 밝힌다는 뜻이다. 조선은 덕을 국시國是로 삼아 이를 덕교德敎로 불렀고 덕교로 만방을 교화하였다. 신라 말의 고은 최치원 선생의 글에 조선이 멸망할 때 대국이 9나라요, 소국이 12국이라고 했으니,

이들 나라에 덕교를 펼쳤다고 볼 수 있다. 발해국의 국도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가 있었던 곳이 여기이다.

그러나 사가들은 이상하게도 발해에 건국한 나라가 발해국이었다가 대진국大震國이되었다고 밝히지 못하고

고구려의 고토에 건국했다고만 말하고 있다. 물론 드라마 대조영에서도 고구려의 고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연변대학의 박학봉교수는 <발해사연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3에는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高麗之故地)에 세워졌다...

땅은 2천여 리에 뻗치고 주현관역州縣館驛이 없었으며, 이르는 곳마다 마을(村里)이 있었는데,

모두 말갈부락靺鞨部落이었다.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토인(土人, 토착인)이 촌장을 하였다."

대진국이 건국한 곳이 고구려의 옛 땅이라고 기록한 사람은 왜인사가倭人史家였다.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왜인들인데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대진국이 건국한 곳이

고구려의 고토였다고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봉학 교수는 말갈에 대하여, "퉁구스(通古斯)족 계통에 속하며,

장백산 이북과 송화강, 흑룡강 유역 일대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역사상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명칭이었다.

진나라 이전에 숙신肅愼, 양한, 삼국 때 읍루邑婁라고 불렀다. 양진남북조兩晋南北朝시기에, 물길勿吉,

수`당시대에 말갈이라고 불렀다. 속말갈粟靺鞨은 고구려에 종속되었다...고구려가 멸망한 후, 대조영大祚榮은

속말갈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발해국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퉁구스의 한자가 통고사通古斯이므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사古斯를 고지아사달古地阿斯達로 볼 수 있으므로 퉁구스가 고조선족古朝鮮族 계열의 인종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족 계열의 인종이 장백산 이북과 송화강, 흑룡강 유역일대에 살았다고 본다.

 

이들이 조선이 진에게 멸망(진시황 8년)한 이후에 숙신·양한·읍루·물길·말갈 등으로 불려왔다.

숙신은 조선의 변음으로 볼 수 있고, 물길은 말이 가는 길, 말갈은 말을 갈아탄다는 뜻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들이 말을 잘 다루는 마가馬加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읍루邑累는 그들의 나라형태가 읍邑이고

그들이 단군왕검의 아들인 부루夫累 단군을 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뜻이다.

발해는 원래 우리 말 발(足)과 해(태양)이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동이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해의 발'이라는 뜻이다. 아침 일찍 해마지를 한데에서 연유한 말로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속말갈지역에 정착한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들은

단국檀國의 홍제洪帝 때에 부족을 이끌고 온 기풍己豊(제곡고신의 침입을 물리친 후로

홍제가 蘇姓을 사성하여 기성己姓이 소성蘇姓으로 불리게 된 사람. 진주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된다,

 

<朝鮮紀>, <扶蘇譜書>)이다. 그러므로 속말갈지역은 단군조선의 전신인 단국(단군왕검은 홍제의 태자로 있었다)

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국의 발해라는 문자에는 이러한 역사가 숨어 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 권 219 <발해전>에는 중요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다.

발해 사람의 생산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물품의 생산지-즉 발해 땅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백두산(태백산)의 토끼, 남해(단군왕검이 순시를 갔던 곳, 발해만 남단)의 곤포,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천, 옥주의 풀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추리, 낙유의 배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발해국은 일본, 거란, 당과 무역을 하였다. 조선업과 항해술이 발달하였고,

무역항은 신주神州(오늘의 길림성 훈강시 임강진)과 산동성의 봉래였다. 이 항로를 압록강조공도라고 하였다.

이때 65명이나 되는 발해국의 사절단이 일본을 왕래하였다.

727년에 발해국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첫 국서를 일본에 보냈다.

발해국은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나라의 서울인 국도를 두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현덕부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웠을 때의 첫 국도였다. 이로 미루어,

대조영의 꿈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데에 있지 않고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대기>에는 개화 27년 9월 21일, 고구려의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大仲象이

평양성이 당과 신라군에게 함락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성을 회복하려고 출정했다가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대중상이 붕어하자, 태자 조영이 제위에 올라 당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스스로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하였다.

이후 발해국은 나라 이름을 대진국大震國이라고 하고, 대조영을 비롯하여 15명의 왕들이 다스렸다.

이들 왕 중에서 발해국 초기의 왕인 대원의大元義, 대화여大華璵, 대명충大明忠을 제외한 11명의 왕들이

일본과 돈독하게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대조영의 뒤를 이어 무왕武王(~737)은 당과 불화하여 732년에

당의 땅 등주(登州, 山東省 蓬萊)를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공격하였다.

등주는 발해만 남쪽에 있는데 북쪽에 대진국의 현덕부가 있어서 발해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므로

이 싸움이 요동반도의 대련을 건너온 대진국 군대와 등주를 지키는 당군 사이에

해전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발해의 왕
중국연변대학의 박학봉교수는 <발해사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3에는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高麗之故地)에 세워졌다...

땅은 2천여리에 뻗치고 주현관역州縣館驛이 없었으며, 이르는 곳마다 마을(村里)이 있었는데,

모두 말갈부락靺鞨部落이었다.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토인(土人, 토착인)이 촌장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말갈에 대하여는, "퉁구스(通古斯)족 계통에 속하며, 장백산 이북과 송화강, 흑룡강 유역 일대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역사상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명칭이었다.

진나라 이전에 숙신肅愼, 양한, 삼국 때 읍루邑婁라고 불렀다.

양진남북조兩晋南北朝시기에, 물길勿吉, 수`당시대에 말갈이라고 불렀다.

 

속말갈粟靺鞨은 고구려에 종속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대조영大祚榮은 속말갈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발해국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발해는 원래 우리 말 발(足)과 해(태양)이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동이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의 발'이라는 뜻이다. 아침 일찍 해마지를 한데에서 연유한 말로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속말갈지역에 정착한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들은

단국檀國의 홍제洪帝 때에 부족을 이끌고 온 기풍己豊(제곡고신의 침입을 물리친 후로

홍제가 蘇姓을 사성하여 기성己姓이 소성蘇姓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분이 진주소씨의 시조가 되는 분이다,

<朝鮮紀>, <扶蘇譜書>)이다. 그러므로 속말갈지역은 단군조선의 전신인 단국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국의 발해라는 문자에는 이러한 역사가 숨어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 권 219 <발해전>에는 중요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다.

발해사람의 생산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물품의 생산지-즉 발해 땅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다.

백두산(태백산)의 토끼, 남해(단군왕검이 순시를 갔던 곳, 발해만 남단)의 곤포,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천, 옥주의 풀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추리, 낙유의 배 등이 기록되었다.

발해국은 일본, 거란, 당과 무역을 하였습니다. 조선업과 항해술이 발달하였고,

무역항은 신주神州(오늘의 길림성 훈강시 임강진)과 산동성의 봉래였다. 이 항로를 압록강조공도라고 하였다.

이때 65명이나 되는 발해국의 사절단이 일본을 왕래하였다.

727년에 발해국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첫 국서를 일본에 보냈다.

발해는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에 나라의 서울인 국도를 두었다.

현덕부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웠을 때의 첫 국도였다. 이로 미루어,

대조영의 꿈이 고구려를 계승하는 데에 있지 않고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대기>에는 개화 27년 9월 21일,

고구려의 진국장군振國將軍 대중상大仲象이 평양성이 당과 신라군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성을 회복하려고 출정했다가 동모산東牟山에서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칭하고,

기원을 중광히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대중상이 붕어하자,

태자 조영이 제위에 올라 당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스스로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하였다.

이후 발해국은 나라 이름을 대진국大震國이라고 하고, 대조영을 비롯하여 15명의 왕들이 다스렸다.

이들 왕 중에서 발해국 초기의 왕인 대원의大元義, 대화여大華璵, 대명충大明忠을 제외한 11명의 왕들이

일본과 돈독하게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wandanstory&from=postList&categoryNo=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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