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은 한민족인데 왜 이리 역사인식이 다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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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통일뉴스 기사입니다
개천절 방북단 일원으로 참여한 김상일 교수님의 기고글입니다

간략히 요약하면 북한 학계는 규원사화,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놀라운 것은 역사박물관 벽면에 47대 단군역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화운운하며 학계 전체가 똘똘뭉쳐 규원사화, 한단고기 위서론에 입에 거품을 물면서
열을 올리는 우리학계와 대조된다 하겠습니다

누가 옳은지는 자료를 보고 네티즌 여러분들이 스스로 판단할 문제입니다
중국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다는 현실도 측은할 따름입니다

대표적 위서론자인 조O성, 송O정 등은 이 자료를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박사님 들의 머릿속이 궁금합니다(^.^)

이하 참고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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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통일뉴스 2003, 10, 10
- 사이트 주소 : http://www.tongilnews.com

(개천절 방북기) 과연 檀君이 單君임을 확인한 행사

- 김상일 한신대 교수

학술토론회, 북측 `대동강 문화`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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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금년은 단군릉 발굴 10주년 그리고 제 2차 개천절 남북공동행사가 열리는 해이다.

그래서 남북 학자들은 10월 2일 평양 인문문화궁전에서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오전에는 제 2차 남북학자 발표회가 있었고, 오후에는 단군릉 발굴 10주년 기념 자유토론회가 있었다.

특히 오후의 자유토론회 시간은
남북 학자들이 자유로운 주제로 서로 묻고 대답하는 최초로 갖는 자유토론행사였다.


남북이 단군과 고조선 연구에 관한 제한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하는 그야말로 자유토론회였다.
여기서는 오전과 오후의 시간으로 나누어 진행된 발표와 토론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기로 한다.

1. `대동강 문화` 실체 확인

북측 학자들이 발표한 오전 6편의 논문은
모두 일관되게 `대동강 문화`의 실체를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대동강 문화란 평양 중심의 대동강 유역에 세계 4대 문화와 버금가는
아니 그것 보다 더 오래된 문명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북한은 검은모루 유적을 통해 민족 이동설을 부인하고 자생설을 주장해 왔던 터이다.

『조선전사』상고사편은
검은모루 유적지에 이어 덕천 력포 사람, 그리고 승리산 인간으로 이어지는
고대 문명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한 바 있다.

조선전사는 남측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과는 달리
인간이 역동적으로 살아오는 생활상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원시무리기,` `초기 모계사회,` `모계사회, 부계사회`와 같이 기술한다.

그러나 남측에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온 바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와 같이
인간이 사용한 도구 중심으로 연대기를 분류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분히 남측의 사관에는 실증사학적 연구 방법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발표에서 북측학자들은 평양 주변의 고인돌, 조롱박 단지, 그리고 비파형 동검을 예를 들면서
대동강 유역 문화의 실체를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측 학자들은 대동강이 아닌 요동 반도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형구 교수(선문대)는 대동강과 요동이 고대에는 동일 문화권이었다고 했다.

이 교수의 말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요동반도와 대동강 유역을 분리시켜 놓고 요동이 아니고 대동강이라고 하는 주장이나
그 반대로 대동강이 아니고 요동반도라고 하는 주장이
모두 현재의 정치적 지형 구도를 두고 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요동과 대동강이 모두 단일 문화권으로서 동쪽 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족 중심의 서쪽 문화권과는

다른 문화권으로서 이 동쪽 문화권의 주역이 단군 고조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발표를 통하여 남북의 학자들이 현재의 자기 정치적 입장을 떠난 역사 연구가 얼마나 어렵고
결국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지금 현재 여기서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를 자기들의 소수민족 역사로 편입하여 가르치고 있고,
심지어는 한글 마저 한문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마당에 역사는 찾기 쟁탈전의 마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남측 학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실증 사학에 사로잡혀 한 치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간 우리 역사를 중국이나 일본에 다 빼앗기고 말 것이다.

더욱이 통일을 앞두고 우리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일본에 대하여 역사 논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측의 일각에서는 상고사 문제를 거론하여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 마저 있다.



그런데
북측의 역사 박물관을 방문하면 안내원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통일되어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중국과 인접해 있는 북측에서
도리어 당당하게 잃어버린 만주 땅을 다시 찾자고 하는 데
남측에서 중국 심기 운운하며 말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으니
역시 주체적 삶을 살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많은 영토를 잃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통일도 그 과정에서 많은 우리 영토를 잃지 않을지 염려가 된다.

일본이 독도를 넘겨다보고 있고,
중국도 마찬가지로 북방경계의 어느 곳을 앗아가려고 할 것이다.
이 때에 남북의 학자들이 민족적 자각 의식을 가지고 역사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해 둘 점은 북측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손승환 교수가 남측에서 지금 퍼져 가고 있는 민족해체론에 대하여 일침을 가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세계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민족 담론 자체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반통일 그리고 민족해체론을 주장하는 남측 학자들에 대한 우려를 보냈다.

서양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는
2차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나 학파의 유대인 학자들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는 히틀러의 나치 민족주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돌아와 서구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내고 있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도 학술진흥재단에서 엄청난 연구비를 타 민족해체론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강대국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분단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유, 민주주의라는 담론은 공염불에 불과하고
민족 담론 밖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가?

2. `환단고기` 역사적 가치 인정

이번 학술 토론에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것은 그 동안 남측 학계에서 위서로 취급받아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환단고기』를 북측 학자들이 강하게 그 사료적 가치성을 인정하고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작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손영종 교수가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성을 인정한 바 있다.

물론 남측에서는 대다수 학자들이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손 교수의 발표가 있은 후 남측에서 올라간 학자들 간에 손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이견이 생기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고려대학교의 최강식 교수가 역사비평(2002. 12)에서 손 교수가 규원사회만을 인정했고
환단고기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 데 대하여 필자는 손 교수가 일단은 규원사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앞으로 환단고기도 같은 방법으로 연구하면 사료적 가치가 인정된다 하였다고 보았다.

사실 이번 방북의 큰 목적 가운데 하나는 최 교수와 필자 사이의 이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2001년도에 금강산에서 있었던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에서 필자는
사회과학원 원장 허종호 교수를 만나 환단고기 문제를 심도 있게 토론을 한 바 있다.

그때에 허 교수는
남측 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왜 위서라고 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했다.


북측에서는 이들 위서라고 하는 사료들에 대하여
문헌 비평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중이며 지금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그 결과가 2002년도 제 1차 학술발표회에서 손 교수가 가지고 나온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최근호 남측 단군학회지에 실려 있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하여 북한 학자들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어서
안동대 임재해 교수의 현장 기록을 중심으로 적어 두려 한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통일뉴스에 의하여 전 토론 내용이 녹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우선 임 교수의 기록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려 한다.

환단고기에 대한 북측 학자들의 의견을 물은 질문에 대하여 북측 손승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김상일 질문)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사회적 가치를 북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손승환 선생의 답변내용:안동대 임재해 교수 현장 기록)

"위서라 생각하는 환단고기와 삼성기등을 몽땅 위서로 보는가,
아니다. 일부는 그렇다. 특히 규원사화는 상당부분 인정할 만한 사료이다.
신빙성 있는 자료가 적다고 하더라도 백제의 건국연대도 고고학적 성과를 참조해서 볼 때에 일치한다.
고고학적 방법,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검증되는 것은 철저하게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다."

손 교수의 이 말은 손영종 교수의 말과 일치하는 것으로
환단고기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북측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후 발표 후 남측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또 다시 이 문제가 논란이 되었으며
한결 같은 주장은 손 교수가 환다고기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도 역사란 인간의 현재적 사고와 감정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지?
아무튼 이 문제는 독자들이 위 임재해 교수의 녹취록을 통해 판단할 문제이다.

그 날 저녁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필자는 연회 석상에서 정영훈교수, 이형구교수

그리고 필자가 허종호 교수를 만나 다시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2003년 10월 3일 양각도 호텔 식당에서 (정영훈, 김상일, 이형구, 허종호 4인)

(김상일)
한단고기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듣고 싶다.

(허종호)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
그 안에도 전승에 기초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

역사 자료가 하나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이것 저것 다 버릴 수는 없다.
한단고기 속에 신비적인 것이 있지만 그런 것을 골라내면 사료적인 것도 있다.
신비적인 것이 있다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 마저 다 버릴 수는 없다.

물론
우리가 북측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가기 위해서 이런 장황한 기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사관에 찌들어 되도록 우리 역사를 줄이고 있는 것은 말살하려는
남측 학계의 관습화되어 있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10월 2일 오후 토론회가 끝난 다음 역사 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는 그때에 박물관 벽에 환단고기에 나오는 단군 47대 왕들의 목록을
그대로 명시해 적어 놓은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북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밖에 남측 학자들은 단군릉 조사에 탄소동화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자상자공명법을 사용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북한 학자들은
전자상자공명법이 단군릉 조사 방법에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결  론)


내년 학술대회는 남측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개천절 행사는 단군릉이 있는 북측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번 개천절 행사는 남에서 300명이 참가했다.
북측에서도 다른 어느 행사보다도 민족 공조를 해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 개천절 행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개신교, 천주교 그리고 민족종교 대표들이 대거 참가한 이번 행사는
단군이 과연 單君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보다 발전된

학술토론회는 남북 학자들이 공동으로 같은 주제로 연구할 수 있은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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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고준환 교수님 글은 보너스(^.^)로 다시 올려드립니다

학계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개천절의 의미를 모를 것이라 본다
왜냐면 곰자손 운운하며 신화요 미신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개천절의 의미를 알고 있다 아래는 고준환 교수님이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이다

본문중 특이할 점은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태백일사, 삼성기

그리고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 등을 국사서적에 정식으로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다.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3. 40쪽 등 참조)“.
라는 대목이다

남한의 장한 도제식역사조폭식민사학자들이여 “혀를 깨물고 자결하라”
민족혼을 갉아먹는 "O충이"와 무엇이 다른가 ?

이하 참고바랍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

(고준환) 개천절에 되새겨 보는 '실증적' 단군조선사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경기대 법대 교수이자 국사찾기협의회 부회장인 고준환 교수가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과 단군조선사'를 기고해 왔다.
고 교수는 언론인 출신으로 우리 상고사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바 있다

(편집자 주)


(본문)

지금부터 4336년전 10월 3일은
왕검단군께서 첫 민족국가 조선(고조선 또는 단군조선)을 개국하신 날이다.
우리는 10월 3일을 4대 국경일의 하나인 개천절로 자랑스럽게 경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47대 단군 2095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사(實史)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신화로만 생각하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실사로 생각하겠지만,
사대식민사학자를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화로 생각하는 것이 실정인 것 같다.
지금은 남북해외의 한민족 8천만이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민족대통일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려면,

주인의식을 갖고, 그 뿌리인 민족자주 역사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바,
사대식민사관이나 유물계급사관등으로 왜곡돼서 잘못 알려진「2천년 반도의 패배사」를 극복하고,
단군조선사를 포함한「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를 되찾아 자리매김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단군조선사 2천여년이 신화로 몰려 부정되는 엄청나게 잘못된 사태가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따른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조작왜곡 농간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일제식민사학의 첫 기록은 일본의 사학자 동경제대의 시라도리(白鳥庫吉)교수가
AD 1894년 단군고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이라 했고

이어서 나가통세(那珂通世)가 AD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도(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대사를 지칭)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조작했고,

그에 이어
1902년 금서룡(今西龍 = 이마니시류 이병도 박사의 스승)의 「단군고」등이 뒷받침하여 단군을 철저히 부정했다.

AD 1910년 한·일 합방이후 일제가 전국에서 민족고유사서 20만권을 모아 불사르고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고, 한국사를 일본역사 2600여년 보다 짧은 2천년이하로 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사 2천여년을 빼버리고 본격적으로 단군신화론을 왜곡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8·15광복 후에 이승만 정권은 민족정기를 찾는데 노력을 경주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를 탄압하고 해체하는 등 반민족적 행태를 나타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 역사 말살·왜곡에 참여한
이병도 박사(서울대 사학과 주임교수), 신석호 박사(고려대 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초대 위원장)등이
해방 후에도 식민사학에 대한 반성 없이 강단사학을 사실상 장악하여
일제식민사학이 유지되고 전파되게 한데 큰 원인이 있다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2천여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증과학적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유적과 사료인 문헌자료를 살펴보는 것인바,
먼저 단군조선의 유물유적을 살펴보자.

△ 왕검단군이 단기 51년 부루태자 등을 시켜 강화도에 쌓은 정족산성과 마니산 참성단

△ 평양 강동군 대밝산의 구을단군릉

△ 흘달단군 50년(BC 1733년)에 벌어진 5성취루(五星聚婁)현상의 과학적 입증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가 천문과학으로 입증)

△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묘비(환단고기 기록 입증)

△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시 노은면 불상(장수왕 연호가 건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 입증)

△ 단군조선의 성터
---(평양 낙랑성터, 하얼빈 대전자성터, 지가영자성터, 내몽고 적봉성터 등 60여곳)

△ 단군조선시대 암각화(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 함안 도항리 암각화 등)

△ 단군조선시대 고인돌
---(세계고인돌의 반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그 중에도 많은 곳은 강화도, 평양 문흥리 등 10개 지역,
경기 파주군 옥석리, 전북 고창, 전남 화순, 대구 대봉동 지역 등)


△ 단군조선의 청동기문화출토
---(초기 청동기 유적∼요동지역, 평북 신암리 세죽리 유적, 평양시 금탄리유적,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등 7개 유적, 함북과 길림성 50개이상 지역에서 출토)
(발달된 비파형청동검∼단기 13세기 요동지방부터 한반도를 거쳐 단기 20세기경에는
일본구주지방까지 전파됨.)

△ 미송리형토기
(단군조선의 대표적 토기, 평북 의주군 미송리동굴서 질그릇과 유골2구등 발굴),
채색토기, 흑색토기, 나무곽무덤, 귀뜰무덤, 벽돌무덤 등 다양한 출토물들 많음.


다음엔 단군조선사에 관한 문헌자료를 살펴보자.


단군조선에 관련된 사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응제시주, 해동역사,
산해경, 위서(魏書), 사기(史記)등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주사학자와 강단식민사학자 사이에 사료적 가치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에 대하여 내용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서로 몰고가는 편에선

강단사학자는 이기백, 조인성, 송호정, 박광용, 송찬식 교수등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선 것은 조인성 교수로 민족자주사학자들은 본다.

진정한 국사를 찾는 남·북사학계의 결론은 규원사화는 사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

위서가 아닌 참된 사서임에 틀림없고, 환단고기는 부분적으로 가필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에 있어

이를 더 연구해야하나,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조인성 교수는

AD 1988년 논문 "규원사화와 환단고기(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 71쪽)등
여러 논문에서 일부용어가 현대어라든지,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규원사화 단군기를 기술하는데,
저본인 진역유기나 원저본인 조대기(朝代記)를 안보았을 것이라는 것 등을 내세워
위서로 몰고 갔으나,

민족자주사학자인 이상시 변호사가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여 제압하고, 규원사화 단군기는 단군조선의 실사라고 결론 지었다.
(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 192면 참조)

조인성 교수의 이론을 제압하는
이상시 변호사의 글과 대동소이한 글이 북한에서도 나왔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 국사학계를 사실상 대표하는 후보원사 원로교수인 손영종박사는
AD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개천절 남·북민족공동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공동 학술토론회"(필자참석)에서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대한 이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며,
참된 사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은바, 이를 발췌해 본다.

《규원사화》는 저자인 북애자에 의하면 고려말의 청평산인 이명이 쓴《진역유기》(3권)을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저자가 안팎의 사서들에서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뽑아서 추가하고
일정한 자기식의 설명을 가하기도 한 것이며

《진역유기》는 발해사람들이 편찬한《조대기》를 참고하여 쓴 것이다.

《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에서 이 책의 저술년대인 1675년 이후에
추가기입하였다고 볼만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① 우선 인명에서

이 책에 보이는 사람이름들은 다 옛스러운 느낌을 주며
다른 비사들에서 보는바와 같은 중국식성씨를 가진 인물은 없다.


② 다음 지명 역시

매우 옛스러운 고장이름으로 된 지명이거나
소밀성, 길림 등과 같이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에도 잘 알려 진 지명들이다.

③ 인용서목도

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출판 또는 필사, 보급되여 있었던 책이다.
또 책이름을 밝힘이 없이 인용 또는 이용한 글도 다 그 이전시기의 책들의 내용이다.

④ 사건, 사실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보충적해설도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책들에 나오는 것들과 그것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설한 것으로서
17세기 사람으로서는 능히 그렇게 쓸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⑤ 관직명을 보아도
중앙관직명인 《단군8가》는 매우 옛스러운 명칭으로 되어 있고
수상(首相)이니, 상장(上將)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쓰지 않았으며
지방관직도 여러《후》,《남해상장》(上長)등은 보이지만《태수》니《녹살》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없다.
이 역사 근대이후의 가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⑥ 사상, 이론, 개념들도

17세기 사람들이 능히 쓸 수 있는 내용과 어휘들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태백일사》등에 보이는《천부경》이나《삼일신고》등은 나오지 않고
《서경》같은데도 보이는《대고(大誥)》가 나온다.


⑦ 과학, 기술관계 서술에서도《단기고사》등에 보이는 근대부문과학도서나 비행기, 잠수함 같은
근대기술의 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보이는《문화의 계발》이라는 표현에서
《문화》란 말은 서유럽근대의《Culture, Kultur》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문치, 교화》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려사》성종 10년조에 나오는 여진관계기사의 연대를《광종 10년》이라고 했으니
같은 내용으로 된《해동역사》를 베낀것이고

따라서 1823년 이후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북애자와 한진서가 다 같이 선행한 어떤 기록을 보고 쓴 것이라고 보면
문제로 될 것이 없다.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태백일사, 삼성기
그리고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 등을 국사서적에 정식으로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다.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3. 40쪽 등 참조).


조인성 교수가 계연수 선생이 펴낸 환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대강 요지는

① 국가형성과 관련된 청동기 사용연대에 관하여 BC 10세기 전으로 올라가기 어려운데,
단군조선 건국은 BC 24세기로 올라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역사를

일본역사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 한국 청동기 문화를 BC 5세기∼8세기경으로 잡았으나,
만주·몽골·중국등지에서 나오는 청동기문화는 BC 30세기정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중국사학계의 유력 학설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②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용어가 근대용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寧古塔, 文化, 父權, 原始國家〉등이다. 이들 용어는 옛날에도 사용했을 수도 있고,

필사하고 정서하며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필이나 손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히 가필여부를 밝혀야 한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지금도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6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①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입증한 13세기 흘달단군 50년 천문학적 5성취루 현상

② 발해 3대문왕 대흠무가 "대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이 정효공주묘비에서 입증된 점

③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를 세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 바,
이것이 김병호씨의 저서 "고구려를 위하여"와 KBS역사스페셜(2001. 5. 16)에서 입증한 점

④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단군 51년에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을 쌓은 바,
지금까지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음

⑤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는데,
환단고기에 구을단군이 전국 순행 중 붕어하여 평양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음

⑥ 규원사화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현재 그런 사람이 없음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자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타계 직전 과거에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찾기협의회원들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반 유물유적과 사료로 볼 때, 왕검단군은 지금부터 4336년전 아사달(백두산 천평 비정)에
첫 민족국가 조선(朝鮮→朝光鮮明에서 따옴)을 건국하셨다.

그 이념은
홍익인간, 광화세계(光化世界=光明理化)를 내용으로 하는 신선도로서 천하평화를 지향하였다.

고조선 초기 국경은 북으로 대황(흑룡강 흥안령 산맥)서는 설유(몽고 훈육), 남은 해대(중국 산동성),
동은 창해(한반도 동해)까지였다고 규원사화는 전하고 있으며, 그 후에 영역의 부침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는 왕검단군때 세 번 옮겼으며

(백악산 아사달<길림성 돈화, 소밀성.요녕성환도산성. 장당경<황해도 문화현>)

그 후로
2세 부루단군때(환도산성)
22세 색불루 단군때(요동 험독현 창려)
34세 오루문단군때(낙랑홀=지금 평양) 44세 구물단군때(장당경) 각기 천도하였다.

단군조선은
1단군 3한 3사 8가의 기본체제와 화백(和白 고루살이) 민주제와 범금8조법 등의 법제가 있었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우현왕 고등의 자손으로 스스로 봉기하여 단군이 되어
후단군조선을 열었고, 단군조선사 가운데 기자(奇子)조선과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3조선관경의 하나인 변방 번조선(요녕성 지역)에서 생멸하였다.

독립운동가요, 민족자주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만이 희망이다"라고 하였다.

개천절을 맞아 우리 한민족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의 뿌리가 되는 역사를 되돌아보아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며,
우리나라가 영세중립국이자 세계문화중심국으로서 열린 마음을 갖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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