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안창범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제주대학교 교수 안 창 범

 차   례

                  Ⅰ. 문제의 제기

                  Ⅱ. 환단고기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Ⅲ. 위서론자들의 오류

                  Ⅳ. 맺는말

 Ⅰ. 문제의 제기

 
『환단고기』는 환웅 개천 5808년(서기 1911년) 광무 15년 5월 광개절에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환단고기』라 했다고 그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자 암흑세계가 지나가고 광명이 비추이듯, 우리 민족의 태고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실로 환단고기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너무나 찬란하고, 우리 민족은 뛰어난 문화와 사상을 지닌 민족이었다. 중국과 인도의 문화만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중국과 인도로 수출하였던 문화민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국가를 창설하고, 종교를 탄생시켰던 문화민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이웃 민족들로부터 동경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시기질투의 원인이 되었다. 우리 민족의 국서고가 소실되고 태고사가 신화로 몰리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일연 승이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신화같이 서술되고 있는데, 『환단고기』에는 너무나 찬란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 『환단고기』에는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환국이 있었다는 기록과 이를 이화한 7세 환인이 등장하고,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경전과 삼륜, 오계, 팔조, 구서 등의 계율과 덕목이 나오며, 환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했다는 이야기, 태고시대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알고 있는 오행사상, 18세 환웅과 배달국에 대한 기록, 단군왕검과 47세 단군에 대한 역사, 그밖에 상하무등, 남녀평권, 분권관경제니 하는 민본주의적인 표현, 청나라 때 생긴 지명이라는 영고탑 등 도저히 현대적인 상식과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범례와 발문을 보면, 환단고기 원문인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네 책의 찬자와 편자 그리고 소장자를 소상히 밝히고, 또한 서기 1911년 민족적 치욕인 한일합방 직후,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 단군굴 암자에 숨어서 환단고기를 계연수 선생은 줄친 종이에 잘 쓰고, 홍범도씨와 오동진씨가 돈을 내놓음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새기고, 1949년 이유립 선생의 위촉을 받아 오형기씨가 정서한 사실까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곧 환단고기는 원래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학자들은 그때의 상황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생각하여 환단고기 범례의 선사를 정서로, 기궐을 인쇄로 오역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단기고사·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이른바 재야사서가 위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바로 풀릴 경우, 환단고기와 단기고사 그리고 규원사화 등 사서가 위서라는 함정에서 해방되고, 아울러 우리 민족은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세계적 문화민족이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위에 제시한 문제들에 대해 해설과 전거와 고고학적 실증을 제시함으로써 환단고기의 기록이 어느 누구의 조작이거나 위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밝히고, 환단고기 위서론이 실증사학자들의 한문오역에 있음을 밝혀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 진서임을 입증코자 한다. 그러나 본 연구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임을 밝혀둔다.  

 

Ⅱ. 환단고기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1. 환국은 실재했었다.

1) 문제점 : 환단고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9천 2백여년 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거대한 환국이 있었고, 이를 3301년 간 무위이화한 7세 환인이 있었다. 그래서 환단고기는 믿을 수 없다는데 대한 해설과 전거와 고고학적 근거이다.

 

2) 해설 : 환국은 환인에 의해 무위이화하는 신교국가로서 신정일치의 국가였다. 신정일치란 신교(신선도의 고전적 표현)의 원리가 정치의 원리이며, 신교의 영역이 정치영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환국의 영토가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라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시아 일대와 유럽에까지 샤머니즘 현상이 있고, 지석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주변의 유적조사 발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결과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된 전적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 전적류를 불교 측에서는 불교의 전적이라 하지만,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되었으므로 불교의 전적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곧, 신교의 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류의 발견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환국이 실재했었고, 환국은 태고시대 종교사회였음을 실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환국이 12국으로 되었다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신선도의 12지지에 의한 분류의 표현으로서 지금과 같이 주권, 국민, 영토가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이다.

 

신선도(신교)와 불교를 연구해 보면, 이들 종교는 근본적으로 같은 중교였고, 신선도를 천산과 불교의 수미산은 같은 산인데, 천산은 중앙 아시아에 현재도 존재한다. 칠세환인은 불교의 전칠불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신선도를 모르는 사람은 환단고기를 조작할 수도 없는 것이며, 환단고기를 조작할 정도라면, 신선사상의 대단한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부귀영화와 명예를 초월한다. 따라서 조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전거 : 그러면 환국 12국에 대한 전거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환국 12연방 가운데 수밀이국(Sumer)과 우루국(Ur)이 서양사에 나오고, 일부의 이름이 중국의 사서인 진서 비리국등십국전에 나온다.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하며 영지의 호수는 이만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이만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 오만여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가야 한다. 이를 헤아리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

 

숙신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백두산 북쪽에 웅거하던 나라로서 한편 고조선의 별칭이라 일컫기도 하며,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를 지칭한다. 진서는 당 태종이 방현령, 이연수를 비롯한 20여명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동진과 서진의 사서로서 25사의 목록에도 올라 있는 중국정사이다. 이러한 책에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12제국의 이름이 실려있고, 강역까지 5만여리라는 일치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환국의 실존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12연방의 환국이 있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누구의 위작이나 조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제1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4) 고고학적 근거 : 실재적 증거의 문제이다. 최근의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 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산) 및 아바칸산맥(abakan산맥)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말라이아뉘아 구석기 유물로 알려진 이 자료는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도 있어서 종래의 서양학자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의 개념을 뒤엎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바칸 산맥은 중앙 아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환인왕조가 7세 3301년 간 통치할 때의 중심지로 할려져 있다. 따라서 환인의 환국시대가 비록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원시시대라 할 수 없고, 환국의 존재를 함부러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곧 환국의 실재에 대한 환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제2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이 실려있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부정함은 이론을 무시한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 있다.

 

2. 환웅천황의 개천설교 역사적 사실이다.

 

1) 문제점 :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배달국의 초대 환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부터 6000년 전은 흔히 원시시대라 한다. 계연수 선생이 목판에 글자를 새겨 환단고기를 보관할 때는 한일합방 직후로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때였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하였다 함은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본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자세히 논증한다.

 

2) 환웅천황은 부처님으로서 실존인물이었다 : 환웅의 환을 파자하면, 환은 목·이·일의 회의문자이다. 목은 동방, 이는 하늘과 땅, 일은 태양, 일광, 광명, 빛을 의미한다. 웅우은 "어른, 우두머리, 수컷, 아범(아버지·남편의 비칭)"의 뜻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환웅은 밝으신 어른, 밝아범, 박가범(박가범)을 의미한다. 불교사전에 박가범은 바가바(파가파)로서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다.

 

이는 환웅천황이 부처이며 아미타불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절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석가불을 부르지 않고, 남무아미타불을 불렀던 것이며, 지금도 석가불보다 남무아미타불을 많이 호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은 남쪽에 없다"는 뜻의 남무아미타불이라 호칭하는 것도 이유 있는 것이며, 그 속에 어떤 암시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아미타불의 의상은 전신을 가리고 있는데, 그것은 인도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 천황은 천도를 대각한 거발환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웅천황이 신화적인 가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란 것이다. 그 증거가 있다. 첫째,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환웅천황은 배달국의 초대천황으로서 94년 간 황립에 있었고, 120세까지 살았다. 이는 역사적 실재 인간으로 생존했던 기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역사적 실재 인물인 것이다. 다만 생년월일시와 졸년월일시만이 안 밝혀지고 있을 뿐이다. 둘째, 종교창설은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환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셋째, 종교를 창설함으로써 환웅천황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아울러 국가적으로는 국토를 수호하는 호국신 내지 산신이 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건너가서 산악신앙의 대상이 되고, 그 유상이 북구주 복강현 전천군 첨전정 영언산 신궁에 안치돼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성수 교수 지음 『단군문화기행』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3) 환웅천황의 개천설교에 대한 기념행사가 오늘날 개천절 행사이다 : 우선 개천의 의미이다. 개자는 "열리다. 지혜의 문이 확 열리다. 크게 깨치다. 크게 통하다. 꽃이 피다"의 뜻이며, 천자는 하늘·땅·사람의 회의문자로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를 의미한다. 곧 개천이란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치다"는 뜻이다.

 

설교의 의미이다. 설은 "짓다. 만들다. 세우다. 설치하다. (은혜룰) 베풀다"의 뜻이다. 교는 "가르치다. 본보이다. 교육의 지침. 종교"의 뜻이다. 곧 설교는 "종교를 창설하다. 종교를 세우다"의 뜻이다. 설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정리하면, 개천설교란 환웅천황께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를 크게 깨치어 종교를 세웠다는 뜻이다. 단군세기에 단군왕검이 개천 1565년 10월 3일에 조선국을 세웠다 하였고, 금년이 단기 4334년이므로 환웅천황이 개천설교한 때는 지금부터 (1565+4334-1=)5898년 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곧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는 환웅천황의 개천설교를 기념하는 행사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환단고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인 것이다.

 

4) 삼신은 종교창설 근본원리이다 : 환웅천황께서 삼신으로 종교를 세웠다고 한다. 삼신이란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한다. 『일』은 천지인을 어떠한 위치에서 파악하느냐 하는 천지인의 쓰임(작용) 이다. 이에 따라 일을 기의 위치에 두고 천지인을 파악하면, 천일·지일·인일은 천기·지기·인기를 의미한다. 천기(공기와 햇볕)·지기(물과 곡식)·인기(부모조상의 유전)는 인체계에서 기·심·신 내지 명·성·정과 불가분적인 관계를 지닌다. 기·심·신 내지 명·성·정을 닦고 수련하는 것이 도·불·유의 삼교이다.

 

그래서 단서구결에 "천·지·인을 삼재라 하고, 도·불·유를 삼교라 하니, 삼재에서 삼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천일은 태양계, 지일은 지구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사시의 운행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세우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하였고 동문선에도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세우니 태평이 가득하다"하여 주역과 동문선이 태고시대에 우리 사회에 성인이 있었고, 그 성인이 4계가 돌아가는 천도에 의해서 종교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곧 도·불·유 삼교는 자연적인 천도를 배경으로 성립됨으로서 거기에 수용이니 조작이니 재구성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환단고기에 종교를 고의적으로 조작해 기록했다면, 그 종교를 삼신사상이나 4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의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종교를 삼신사상과 4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환단고기를 위서라함은 동양철학의 원리인 천도를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5) 환웅천황의 종교창설에 대한 전거와 실증이 있다.

 

 

첫째로 환웅천황이 종교를 창설했다는 전거가 있다.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천도교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우리 도는 대운은 천황씨의 근본원리를 회복시킨 무극지운이며, 천황씨는 선천개벽의 시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의암 손병희도 "우리 대선생(최제우 선생)께서 비로소 무극대도와 천덕의 근본원리와 접령항화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초의 천황씨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하였다. 즉,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손병희 선생은 선천시대에 개벽의 시조인 천황이 있었고, 그 천황에 의해 성립된 고유종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곧 동학은 환웅천황의 실존과 종교창설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환단고기의 기록이 조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불·유 삼교일체 사상이 원래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라는 전거가 있다. 최치원난랑비서에 의하면,우리 나라에는 태고시대부터 도·불·유 삼교일체의 현묘지도인 신선도가 있었다. 최치원난랑비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최치원난랑비서 왈 국유현묘지도 왈 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칙효어가 출칙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다음은 위의 원문에 대한 필자의 국역이다.


최치원난랑비서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종교를 일으킨 원천으로써 신선도의 사서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복적으로 (도·불·유)3교의 사상을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가까이 하면 저절로 감화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벼슬)의 교지와 같고,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함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벼슬)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정반왕의 태자)의 교화와 같다.

 

곧, 우리 나라의 정사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의 최치원난랑비서가 우리 나라에 원래 도·불·유 삼교일체의 성립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인 것이다.

6)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이 있다.

 

1)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조사하였는데, 구릉상에서 제사유적과 신전, 소조신상과 청동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기원전 3500년으로 나왔다. 중국 요령성은 옛날 청구라 불리웠던 곳이며, 청구는 배달국이 있던 곳이다. 따라서 요령성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배달국의 존재와 고유종교의 실체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1970년 압록강 중상류 길림성 집안시 장천지구 제1호 고분 전실에서 고대의 예불도가 발견되었는데, 불상의 모습과 의복이 인도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 이것 역시 우리 나라에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실증인 것이다.

3) 그밖에 종교적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들면, 단군릉에서 발견된 금관조각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금관, 사찰 내의 탑과 범종, 대웅전과 하옥형의 사찰건물, 칠성각과 산신각, 그밖에도   내에 있는 불교관련 모든 사물이 신선도의 실재를 증명한다.

 

이상 같이 환웅천황이 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적이든 실증적이든 거의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되고 인사에서 끝을 맺는 태백진교가 있었으며, 환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하여,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과오이며 오류라 할 수 있다.

 

3. 천부경과 삼신사상은 불가분적인 관계이다.

1) 문제점 : 종교가 있엇으면, 당연히 경전과 계율과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단고기에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등의 경전과 오훈·오사·오계·삼륜·팔조·구서 등의 계율과 경천계인 소도계천의식이 나온다. 그러나 서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경전과 계율이 어느 국수주의자의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에 대한 전거와 근거이다.

 

2) 전거 :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하여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세상에 전하기로는 세상에 전하기로는 목은 이색과 휴애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 시속에는 한 자의 글이라도 정신 주희에 맞지 않으면 뭇 사람들의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모여들고 유학자들의 칼날이 바야흐로 사나우니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려한들 어찌 용이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오은 중의 한 사람인 농은 조원길 선생의 유집(농은집)에서 발견된 천부경 원문을 현재 출판 중인 졸저 『환웅천황과 한국고유사상의 탄생』서두에 실었다.


3) 논리적 근거 :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불교의 삼장과 같이 경·논·율의 관계로서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세 경전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정되면 세 경전이 모두 부정되고, 어느 하나가 인정되면 세 경전이 모두 인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천부경의 초두를 보면"인시무시 일석삼극무진본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이라"하여 천부경의 기본사사은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일체이다.

 

우리의 민족에도 삼신상제니 삼신제석이니 하는 삼신신앙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에서도 천일·지일·인일(태일)의 삼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이 천부경과 삼신사상이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고, 삼신사상은 천도로서 우리의 민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따라서 천부경을 위서라 함은 있을 수 없는 문제이며,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은 물론 그 밖의 각종 계율과 종교의식이 실려 있다 하여 환단고기를 위서라 부정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과오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대종교가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기본경전으로 하고, 삼륜·오계·팔조·구서 등을 기본계율로 한다. 이를 알면서도 이들 경전과 계율을 부정함은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학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개인의 명예만을 위한 것인지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4. 6000년 전후의 청동기기 있다.

1) 문제점 : 실증사학계는 국가의 성립을 청동기 사용 이후로 본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청동기 사용은 B.C. 10세기 이상을 올라가지 않는다고 가르쳐왔고 그렇게 배워왔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한다.

 

2) 청동기 출토 : 그러나 최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고조선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청동기들과 금동제품들이 많이 나왔다. 예컨대, 기원전 2500년경에 해당하는 상원군 룡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이, 4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청동기단추가 나왔으며,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 무덤에서는 그동귀걸이가 발굴되었다. 고조선의 비파형 단검과 좁은 놋단검의 시원 연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거승로 보이는 평양 덕천시 남양유적의 집자리들을 거기에서 나온 질그릇을 시료로 하여 핵분열 흔적법(FT, Fission Track)으로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5800년 전후라는 절대년대치가 나왔다. 이들 연대 값은 단군조선 이전 시기에도 평양을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당시 주민들이 청동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을 실증한다. 따라서 청동기 사용을 근거로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태고사와 신선도는 부정될 수 없고, 그러한 기록을 실었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실증사학자들은 북한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다.

 

3) 해설 : 첫째의 이유는 북한의 주장을 수용할 경우, 우리 민족의 청동기사용이 선진국가인 서구(서구는 B.C. 3000년경) 보다 500년 내지 1500년이 빠르므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청동기 사용은 우리 민족만이 바른 것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의 청동기 사용은 B.C. 4000-3500년경이고, 이집트 지방에서는 B.C. 4000년경이며, 만주 요령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B.C. 3500년경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지금부터 5898년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도한 성립종교를 탄생시켰고,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양은 고조선의 중심지이며 마한의 고도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평양에서 출토된 청동기 절대 연대가 서구보다 훨씬 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발굴보고를 무조건 부정함은 북한에 대한 거부반응에서 비롯된 것이며, 민족적 열등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4) 핵분열 흔적 절대연대 측정원리 : 둘째의 이유는 북한 당국이 적용한 유적유물 절대연대 측정방법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의심이다. 북한당국이 적용한 절대연대 측정방법인 핵분렬흔적(FT, Fission Track) 연대측정원리는 시료 속에 포함된 우라니움의 핵분렬 붕괴량과 현재량을 검출하여 측정함으로써 유물의 연대를 알아내는 것이다.

 

우선 이 방법의 측정범위는 넓어 수 백년에서 수 십 억년까지다. 측정한 연대 값의 믿음성이 높으며 오차가 비교적 적다고 한다. 그래서 FT법은 지질 및 고고학 분야에서 널리 적용되어 제4기 지질학적 연대는 물론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물유적들의 연대측정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썼다고 해서 북한의 경우에만 문제 삼는다면,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는 태고사의 은유적 표현이다.

환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가 모두 역사로 기술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신화같이 기술되고 있다. 그에 대한 해설이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태백산정에 내려와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여 신시를 베풀고, 후에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고,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에 반해 환단고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초 국가로서 7세 환인이 3301년 간 무위이화하던 중앙 아시아 천산 중심의 환국이 있었고, 환국의 말 서자부에 있던 환웅이 태백산정에 이르러 홍익인간 재세이화함으로써 신시를 베풀었고, 그 후 188세 거불단환웅이 웅족의 여인과 혼인하여 단군왕검을 낳고, 단군왕검이 조선국을 세웠으며, 조선국은 47세를 전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실려있다.

 

곧 환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화같기도 하다. 이래서 환단고기의 기록은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위작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우선 환단고기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을 비교하면, 환단고기에는 천산, 환인, 서자부, 웅족(웅족), 호족(호가)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천, 환인, 서자, 웅호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위와 같은 표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환인의 환을 파자하면, 환은 목과 이와 일의 회의문자이다. 목은 동방을 의미하고, 이는 하늘과 땅, 일은 태양·일광·광명을 의미한다. 곧, 환인은 "동방의 밝은 어진이"라는 뜻으로서 인간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어진 성인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환인을 해석하면 "환은 만유의 환인"이라는 뜻으로 환인은 하늘님이며 제석을 의미한다. 천산은 중앙 아시아에 있는 산명이며, 천은 천상을 의미한다. 서자부는 환국의 한 부서명칭인데 서자는 첩의 자식을 지칭한다. 웅족과 호족은 인간이며, 웅호는 동물이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가 신화로 오해받게 되는 동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원상 회복하면, 삼국유사의 하늘(천)은 천산, 환인은 환인, 서자는 서자부, 웅호는 웅족과 호족의 약칭 내지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인용한 서명을 밝히지 않고 막연히 기록한 옛 기록(고기)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사실을 은닉했을까? 삼국유사의 편자 일연 승(A.D.1206-1289)의 생존시대는 절대적 군사력을 가진 몽고가 고려정권을 지배하던 시대이다. 그러한 시대에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이르는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이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몽고·만주·중국의 영토가 모두 우리 영토였다고 하는 주장과 같다. 그것은 몽고에 대한 정면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정사는 어떠한 형태로든 남겨야 한다. 그래서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 곧 환인·환웅·단군을 조·부·손으로 압축 은닉해서 표현한 것이 삼국유사의 고조선기라 할 수 있다. 곧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기록을 할 수 있다. 곧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기록을 사실대로 해석하면, 그것은 신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기록이 민족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위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12. 문자가 있었다는 전거와 실증이 있다.

1) 문제점 :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환웅천황) 신시에 녹서, 자부에 우서, 치우에 화서, 복의의 용서, 단군에 신전(가림토, 가림다)이 있었고, 한자 역시 신시의 유법이라 하고, 이러한 자서들은 백산·흑수·청구 등 구려의 지역에 널리 쓰였다고 하였다. 특히 가림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제작 동기와 그 자형까지 밝혀주고 있다.

 

경자 2년(B.C.2181) 시속(시속)이 같지 아니하고 방언이 달랐다. 상형표의의 진서(한자)가 있었으나 십가의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못하는 일이 많고, 백리의 국가에서는 글자를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를 가림토라 하며, 그 글은


"ㆍ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X ∋

ㅇ ㄱ ∪ ㅁ ㄴ △ ㅈ ㅊ ∧ ∧ ㆆ ∧ M

                                ㅁ  ∪

ㅣ⊃  ㄹ ㅐ ㅒ ㅡ ㅡ ㆍ ∧ ㄱ ㅜ ㅠ ㆍ

             △ ㄱ ㅈ ∧ ㆍ  ㅡ ㅡ ㅍ" 

        이다.

이상과 같이 태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사회에는 녹서, 우서, 화서, 용서, 신전(가림토), 한자가 있었다. 특히 가림토의 제작동기를 보면, 한자가 있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용서는 이를 범어로 번역하면 Devanagari로서 범자를 의미하는데, 범자는 누구나 거의 인도족의 인도문자로 알고 있으며, 한자는 중국에서 전래된 지나문자로 알고 있다. 그리고 한글은 근세조선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래서 환단고기를 더욱 위서라 부정하게 된다.

 

2) 전거와 실증 : 종교가 있으면 반드시 경전이 있게 마련이며, 경전이 있으면, 반드시 문자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부터 약 6000년 전, 환웅천황이 설파한 종교가 있었다. 그러면 환웅천황 이전 또는 그 시대부터 문자가 있어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전거를 제시한다.

 

첫째. 고대 한글 곧 가림토에 대한 전거이다.

세종어제훈민정음서문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신제하였다고 하였다. 신제란 구제의 반대말로서 구제에 근거하여 새로 제작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종 23년 갑자에 반포한 세종실록 103권에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조선 시대에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하였으며,

 

또 계해 25년 12월 조에도 "10월 초 친히 말글 28자를 만드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고 하였다. 한글창제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신숙주의 후손인 18세기의 신경준이 쓴 『훈민정음운해』에도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쓰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이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나라의 말을 적어내기에는 모자라나 일부 제한된 범위에서 쉽게 쓸 수 있게 되어있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문헌이 아닌 일본의 옛 문헌인 행지의 『훈석언문해』에도 훈민정음에 대하여 "옛날체와 지금체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옛날체는 세 나라(삼한 곧 고조선) 시대 초에 만들어 전하는 것이고, 지금체는 이조 세종 때에 옛날 글자를 고쳐 만든 것이다.

 

지금 그 나라에는 옛날 글자는 없어지고 다만 지금 것만 쓰이는데 옛 글자는 지금 일본에서 전해 온 `비인서`<한국인의 글자라는 뜻으로서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이르고 있다>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전거 외에도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의 훈민정음서문, 최만리의 상소, 신채호의 국문의 기원 등에서 단군조선 시대에 옛 한글이 있었고, 현재 우리사회에서 쓰고 있는 한글은 세종대왕의 창제가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의 옛 한글을 잘 다듬어 정리한 문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1994년 12월 "고한글 비석 일서 발견"이라는 제하의 신대문자 기사가 문화일보에 실렸다. 신대문자는 일본의 신기 3종인 거울 뒷면에도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고, 수 많은 신사의 위패 안에 지금도 신성하게 보전되어있다. 일본 대마도 아즈하라(엄원)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가림토의 모어로 보이는 최고형의 문자가 최근 만주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속사터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기록과 실재적 증거에 의하면, 현재의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 시대의 가림토문자를 다시 잘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흔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근세조선 시대는 절대군주 시대이다. 그러므로 창제란 표현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공을 신하들이 절대군주인 세종대왕에게 돌리기 위한 충성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곧 창제란 표현은 진실이 아닌 아부에서 비롯된 표현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자는 원래 우리 민족에 의해서 창제되기 시작했다.

 

한자는 자형·자음·자의의 3요소로 구성돼있다. 자음을 표기하는 발음부호인 반절음이라 한다. 반절음은 한자의 자음을 한자로 표기한 일자일음의 발음부호로써 한자를 창제한 민족의 발음을 기준으로 이뤄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절음과 일치되거나 가깝게 발음하는 민족이 한자의 창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은 북경을 `북경`, 상해를 `상해`라 발음한다. 그러나 지나족은 북경을 `베이징`, 상해를 `샹하이;라 발음하여 일자이음인 경우가 있다. 반절음 역시 거의 우리 민족의 발음과 같고, 지나족의 발음과는 틀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임승국은 한자 53,525자의 발음부호인 반절음이 모두 우리 말 기준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이계가 황하문명의 주인공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고 하였다.

 

한자는 상형문자로서 한자를 만든 민족의 민속을 나타내기 마련인데, 한자의 상형이 우리 민족의 민속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의 신화인 태양과 금까마귀를 상징한 날일(일)자, 집 속에 돼지를 기르는 민속을 반영한 집가(가)자 등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한자)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한글 혹은 동방문자(동방문자)"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 한자의 창제설에 창힐설이 주류를 이루고, 기원설에 갑골문자 기원설이 있다. 그런데 창힐이 동이족이고, 갑골문도 동방기원설이 주류를 이룬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한자는 우리 민족에서 처음 창제되기 시작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셋째, 복희의 용서는Devanagari(데워나가리) 곧 범자를 의미한다.

용서는 용 무늬 모양의 문자를 이르는데, 대승경의 산스크리트 문자 곧 Devanagari가 용 무늬이고 발음체계가 우리말과 같으며, Devanagari라는 뜻이 용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범어의 어의·어법이 우리말과 같다.

 

1) 어의가 우리말과 동일하다. 예컨대, 붇다(Buddha) 곧 불타는 세상을 "밝게 하는 사람, 밝은 사람"의 뜻으로서 우리 말의 "붉다 또는 밝다"와 같다. 니르반나(nirvana) 곧 열반(열반)은 안락(안락), 견성성불(견성성불), 곧 `깨치다. 깨치었느냐`를 의미하는데, 우리 말의 "닐봤나? 널봤나? 너를 보았느냐"의 뜻과 같다. 석가세존의 열반지인 구시나라(구시나라)는 구시국(구시국)을 의미한다. 이를 보면, `나라(나라)`는 곧 국가를 의미한다. 우리말에서도 국가를 `나라`라고 한다. 보살은 "보다와 살리다"이다. `차마(차마)`는 `참다(인)`의 뜻인데 우리 말의 `참다`와 같다.

 

2) 어법이 우리 말과 동일하다. 범서(범어)는 문장구조에 있어서 감탄문을 제외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어가 선두에 오고 동사가 끝에 오며, 수식어는 피수식어를 선행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우리 말의 어순과 일치한다. 범서는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성·수·격이 그 어미 변화로 주어·목적이 등을 나타내며, 또한 인칭·수·시상·법·태를 주로 동사의 어미변화로 나타낸다.

 

우리의 언어도 범어와 같이 명사·대명사·형용사의 어미변화 즉 조사의 변화에 의해 주어·목적어 등을 나타내며(예컨대, 명사 또는 대명사에 "는·은·가·이"를 붙이면 주어가 되고 "을·를"을 붙이면 목적어가 된다), 또한 동사의 어미변화로 인칭·수·시상·법·태를 나타낸다(예컨대, 하라·하였다·하겠다·하자).

 

넷째, 현재에도 녹도문이 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 금산 암벽에 사슴뿔 모양의 옛 문자(녹서)가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영변지를 보면 천부경 81자를 한자로 기록하고 그 뒤에 흔히 신지문자라는 사슴뿔 모양의 문자가 소개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모순인 것이다.

7.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라 원래 신선도의 사상이다.

 

환단고기에 오행, 오행육정, 오행치수법 등 목화토금수의 오행사상이 자주 거론되는데,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천일·지일·인일의 『일』의 순환론의 입장에서 천지인을 파악하면, 천일은 태양계, 지일은 지구계, 인일은 인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번 회전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가 생기고, 사계를 성격과 기능에 따라 간략히 표현하면, 봄은 목, 여름은 화, 가을은 금, 겨울은 수에 해당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는 지구가 돌아가서 생김으로 지구인 토가 중앙에 위치하여 목·화·토·금·수의 오행이 된다.

 

또한 오행의 성격과 기능을 인체의 성격과 기능에 비유하자면, 오행은 오장과 오지의 성격과 기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태백진교(신선도)는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하고 인사에서 끝난다고 한 것이며,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해 보면, 중국의 유교와 도교 역시 태백진교(신선도)의 한 지류임을 알게 될 것이다.

 

8. 민본주의적인 표현은 삼신일체의 정치적 표현이다.

1) 문제점 : 환단고기 환국본기를 보면 상하에 차등이 없으며(상하무등), 남녀의 권한이 평등하고(남녀평권), 정사는 월권하는 일이 없다는 등 민본주의적인 표현들이 있다. 그래서 환단고기의 내용이 위작이 아니냐 하는데 대한 해설과 실증이다.

 

2) 해설 : 신선도의 발생원리는 천일·지일·인일의 일체이다. 여기에서 『일』의 쓰임을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천지인일체를 파악하면, 천지인일체는 상중하일체·인권존중·인간평등·남녀평등·신분평등·만민일체·생명평등 등 민본주의 사상이 되고, 천일의 작용인 조화, 지일의 작용인 교화, 인일의 작용인 치화를 정치적 법률적인 용어로 바꾸면, 조화는 입법, 교화는 사법, 치화는 행정의 의미로 풀이된다. 곧 삼신일체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합의제가 된다.

 

단기고사를 보면, 전조선 제13세 단제 흘달 16년조와 후조선 제7세 단제 등을 2년조에 국가권력을 입법·사법·행정으로 3분하여 실시하였다 하고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13세 흘달 16년(B.C.1767)에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으며,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고 한 것은 모두 삼신일체 사상의 정치적 표현인 것이다.

 

3) 실증 : 김상일 엮음,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을 보면, 환국 12연방의 하나인 수밀이국(Sumer국)에 B.C.3000년 경 의회제도와 법원이 있었고, 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민본주의적인 표현들이 있다고 하여 환단고기를 위서라 불신함은 제 민족의 사상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9.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탑이다.

 

1) 문제점 :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영고탑은 중국 청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이라 주장하면서 청나라 이전의 단구조선 시대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이에 따라 환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의 위작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 근거를 보면, 『만주원류고』를 들고 있다. 거기에 대한 해설이다.

 
2) 해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으로서 영고특에서 영고태로, 영고태에서 영고탑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로서 지명이 아니라 했다. 곧, 영고탑이 지명이라는 만주원류고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영고탑을 영안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이라 하였다. 『성호사설』에도 영고탑은 오랄(오랄), 애호(애호)를 합하여 동삼성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호(해자. 도랑 못)가 깊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해자로 둘러싸인 성벽 안에 있고,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그 성벽 안에는 옛날 절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절이 없어진 후에는 그곳에 한 때 왕궁이 있었거나,

 

아니면 막대한 세력을 가진 어느 추장의 저택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도 영고탑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존재하여 거기에서 회의를 하고, 환인·환웅·치우·단군왕검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때로는 탑을 수축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밖에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운교의 원로이시며, 제 18대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불호자 문태규 선생이 저술한, 『궁을도덕』을 보면, 수운교의 신앙대상이며, 우주를 상징한 천단의 유래를 밝히는 대목에서 "일찍이 환웅천황 시대에는 상제님의 위인 천단(신단)에 모셨고, 단군시대에는 만주 영고탑에 모셔 경천하였으며, 근세 고종황제께서는 서울의 도구단에 모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신단을 모시는 건물 모양의 탑인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판단하면, 영고탑은 글자의 뜻 그대로 영안의 옛 탑으로서 단군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때에 생긴 지명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영고탑이 없어지고 오래되면서 지명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광화문은 조선조 태조 때에 지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종각은 서울시 종로 1가에 있는 종을 달아매는 누각인데, 오늘날 광화문과 종각은 한편 지명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는 영고탑이 지명이 되고 있으나, 원래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고탑을 이유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 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 할 수 있다.

 

 10. 국호와 도읍지와 건국년대가 일치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무진 원년에 단군왕검이 구환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고, 구규를 부활하여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도 위서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는데 요와 같은 때였다"고 하였다. 또 『제왕운기』는 단군왕검의 조선건국을 무진이라 밝히고 있다. 즉 국호 조선과 도읍지인 아사달과 건국년대에 대한 기록이 환단고기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동일하다. 이것 또한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입증한다.

 11. 태백일사의 기록은 포박자 기록과 일치한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이르기를 "삼황내문을 자부선생이 황제 헌원에게 주어서 마음을 밝히고 의로 돌아가게 하였다. 선생은 항상 삼청궁에 계시니 그 궁은 청구국 대풍산의 양지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청구국(배달국의 이칭) 자부선생이 도교의 기본경전인 삼황내문을 중국의 황제 헌원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4세기 경 지나의 갈홍 『포박자』 내편에 "옛적에 황제가 있었는데 동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뵈옵고, 삼황내문을 받아 갔다"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지나인이 기록한 포박자의 기록과 우리 민족의 기록인 태백일사의 기록이 서로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기록은 조작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12. 천문현상이 일치한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환단고기』『단기고사』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현상을 천문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한 결과 "2백 50년에 한번 관측되는 오성결집이나 일식·조수간만의 차이 등 기록이 96% 내지 99.3%로 정확하다며, 단군조선이 한낱 신화가 아니라 실재하였이 증명된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에 대해 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이다. 이들 사서를 연구하여 보지도 않고 백안시하여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3. 기타 기록이 일치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 `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에 기록된 "건흥오년세재병진"이라는 명문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조대기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에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라 명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 환단고기의 기록은 사실과 일치하고, 오히려 기존 사서보다 더욱 자세하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를 위서라 함은 연구부족에서 비롯된 오해라 할 수 있다.

 

또한 환단고기에 평양의 명승지인 목단봉이 나오고,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경당)과 관직명인 욕살(욕살)이 나온다. 이로 인해 환단고기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나, 모란봉은 산명으로서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이며, 경당은 교육기관이며, 욕살은 관직명인데, 소도제천의식과 함께 있었던 고대의 제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고려가 고구려의 이름을 계승하고, 근세조선이 고조선의 이름을 이어받은 격이다. 따라서 모란봉과 경당과 욕살 역시 ktlf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14. 환단고기가 지금 출현한 이유와 그 밖의 문제

 『환단고기』는 지금이야 갑자기 세상에 나왔으니 어느 국수주의자의 위작이 아니냐 하고 의심할 수 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사서에 의하면 몽고와 만주대륙과 지나대륙 일대가 거의 태고시대 우리 민족의 강토였다. 그러므로 이들 사서를 인정하면 우리 나라와 몽고 및 지나 사이에 국경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단고기는 숨어있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에야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자체 내에도 불일치되는 내용이 있고, 다른 고서와도 상치되는 내용이 일부 있다. 그래서 환단고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연구해 보지도 않고 부정함은 책임회피인 것이다.

 

 Ⅲ. 위서론자들의 오류

 1. 환단고기 오역

 1) 환단고기의 유래 : 위서론자들이 『환단고기』를 위서로 오인하게 된 과오를 지적하기 전에 범례의 기록을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유래를 요약 소개한다.

 

삼성기전 상편은 신라의 고승 안함노가 찬한 것으로 계연수 선생댁에 소장됐던 것이며, 삼성기전 하편은 원동중이 찬한 것으로 백진사 관묵에게서 얻었다 하고, 단군세기는 고려의 문인 이암이 편찬한 것으로 이 책 역시 백진사 관묵에게 얻었다고 했다. 북부여기 상하는 고려 말기의 학자 범장이 찬한 것으로 삭주 이동 이진사 형식의 집에서 얻었다고 했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 이맥이 엮은 것으로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했다.

 

 개천 5808년(서기 1911),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계연수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선지(줄친 종이)에 글을 잘 쓰고, 홍범도와 오동진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나무판자에 새기게 되었다. 그 뒤 1920년 계연수 선생이 운명할 때,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의 경신년(1980)이 되거든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놓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발문을 보면, 개천 5846년(서기 1949) 오형기씨가 이유립씨로부터 위촉을 받고 환단고기를 정서하였다. 그 뒤 개천 5876년(서기 1979) 수 십 부가 영인된 후, 녹도승라는 일본인이 환단고기를 번역하고 영인본과 함께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의 내력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사학자들과 일부 사계학자들이 시비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직접 소개한다.

 2)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의 주장 : 정신문화연구원의 정영훈은 제기하기를 "적어도 이 책(환단고기)이 계연수의 『범례』와 오형기의 『발문』에서 말하는 1911년 편집과 1949년 필사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확인되더라도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는 대단할 것이며,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1911년의 편집과 1949년의 필사설을 확증할만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창작한 위서가 아니냐 하고 의심된다는 것이다. 역설할 경우, 물증이 있으면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의 조인성은 "만약 이유립이 인쇄본을 갖고 있었다면 굳이 그것을 정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환단고기』 공개자로 알려진 이유립도 인쇄본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범례〉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환단고기』는 인쇄되었던 것일까.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곧 정서를 했다는 것으로 볼 때, 인쇄본이 없는 것이 확실하고, 인쇄본이 없으므로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위조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3) 문제되는 내용과 위서론자들의 과오 : 그러면 위서론자들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 문제되는 내용은 『환단고기』 범례 말미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이다.

 

"환단고기실경해학이선생지감수이차여정근선사우인홍범도오동진양우지출금부제기궐"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국역하면,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한 내(계연수)가 줄친 종이에 또박 또박 베끼고(선사),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의 출금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  부탁하여 나무판자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겼다(기궐)"는 뜻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위의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환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오역부분을 지적하면, 환단고기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계연수 선생이 `선사(선사)`했다는 단어를 "고쳐쓰다. 옮겨쓰다. 정서하다. 필사하다"로 오역하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서 `기궐(기궐)`했다는 단어를 "인쇄 또는 편집"으로 오역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계연수 선생이 만약 『환단고기』를 인쇄했다면,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부탁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또한 인쇄했다면, 후에 정서할 필요가 있겠는가?

 

자전에 의하면, 선사(선사)의 선자는 "(실로)깁다. 꿰매다"의 뜻이며, 사자는 "베끼다. 그리다. 본뜨다"의 뜻으로서 「선사」는 "줄을 상하좌우로 곧게 쳐진 바둑판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 하나를 또박또박 베끼다"는 뜻이다. 곧 선사를 "잘 그리다. 잘 베끼다. 정서하다"는 뜻의 선사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궐(기궐)의 기는 끝이 굽은 `조각칼`, 궐은 끝이 굽은 `조각끌`을 의미하는 글자로서 「기궐」은 "조각칼과 조각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또한 인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기궐이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고 굴속에서 작업했던 것으로 보아서 인쇄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는 처음에는 인쇄되었던 것이 아니라, 판각되었던 것이며, 종이에 찍은 간단한 인쇄본이 아니라, 나무판자에 각자한 방대한 양의 판각본 또는 목판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 판각본은 누구에게나 쉬이 보일 수 없는 것이며, 지금도 어디에 환단고기 원본인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와 목판책이 비장되어 있을 수 있으나, 단군상도 이를 철거하라고 파괴하는 이 때에 남북이 통일되고 민족적 자주의식이 강해질 때까지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본다.

 

 4) 환단고기 목판책 작성의 이유 : 그러면 어째서 『환단고기』를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나무판자에 각자했을까? 그때는 1911년 한일합방 직후다. 일경과 일군이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구금할 때다. 환단고기를 선사한 계연수와 출금한 홍범도와 오동진은 애국자이며 독립운동사로서 시중 출입이 불가능한 체포구금 대상 인물이다. 신변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환단고기를 필사하려면 종이를 구입해야 하고, 종이를 구입하려면 신변이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필사하지 않고,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 단굴암 곧 단군굴 속에 숨어서 나무판자에 환단고기를 새겼던 것이다. 참으로 비통하고 충성 어린 작업이었던 것이다.

 

 

 2. 실증사학의 모순

 『환단고기』 부정은 한문오역 외에 실증사학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에 대해 그 모순을 몇 가지 비판한다.

 1) 실증사학을 맹신 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 실증사학은 고고학에 기반을 둔다. 고고학은 20세기초에 이르러 학문으로 성립됨으로써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사이에 지구 전체를 조사하거나 파 볼 수도 없는 것이다. 파본다 하더라도 고대로 올라갈수록 실물이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실증사학만을 신봉할 경우, 적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으며,

 

 

현대사 내지 근세사만을 인정하고, 고대사를 무조건 부정할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실증사학은 영국·불란서·독일·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다. 이상과 같이 좋지 못한 역사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학문이 실증사학이다. 그러므로 실증사학을 우리사회에 무조건 적용함은 크나큰 모순이라 할 수 있다.

 

 2) 실증사학의 배경인 서양문화의 원형(pattern)에 있어서 동양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서양문화는 헬레니즘(그리스 중심) 문화와 헤브라이즘(유태교와 기독교 중심) 문화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두 문화의 공통점은 유목문화이며, 자연정복문화이다. 동양문화에도 불교·유교·도교에 따라 다소 다르나 공통점은 농경문화이며 자연조화문화이다.

 

 

이와 같이 서양문화와 동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또한, 서양문화는 그 발생배경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사회적 경험과 배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보니 봄·여름·가을·겨울의 돌아감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이치(천도)로서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고 한 바와 같이 동양문화는 천도를 발생학적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또한 서양문화의 우주관은 창조론으로서 자연질서를 인간 위에 천신이 있고, 인간 밑에 동식물이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서양문화는 천지인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관계로 본다. 이에 반해, 동양문화의 우주관은 순환론으로서 천지인의 관계를 수평적 일체관계로 본다. 이와 같이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발생학적 배경과 발생원리 그리고 우주관 등 문화의 원형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문화의 원형이 다른 서구학설을 동양문화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둘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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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실증사학은 후진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 불서에 의하면 천지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 이를 풀어 말하면, 지구의 중앙에서 역대 성인이 모두 탄생하였고, 문화가 먼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각자인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함부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지리학회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의 중앙 곧 5대양 6대주의 중앙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의 최초 발상지는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곧 우리 나라가 서양보다 먼저 개화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서구사회는 우리 나라보다 후진사회였다는 것이다. 서구사회가 유년기였다면, 우리사회는 청년기였다는 것이다. 현대 종교를 예로 들면, 서구종교인 기독교의 출현은 지금부터 2천년 전후인데, 동양종교인 불교와 유교의 출현은 2천 5백년 이전이다. 이를 보아도, 실증사학은 분명히 후진사회를 기준으로 성립된 학설이다. 따라서 그러한 학설을 선진사회였던 동양사회에 무조건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셋째의 모순이라 할 수 있다.

 

  Ⅳ. 맺는말

 이상과 깉이 『환단고기』의 내용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되었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 결정적 원인도 한문오역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 모든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마음껏 거리낌없이 자유로이 인용해도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원래 고집이 세고 자기의 학설을 쉬이 바꾸려 않는다. 마찬가지로 환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자기의 학설을 바꾸어 본 연구를 쉬이 받아들이려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외람 되나마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뜻에서 그들이 과오를 범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배경에 대해 몇가지 지적한다. 일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첫째, 자아반성과 사실검증의 결여에 문제가 있다 : 실증사학자들은 모든 일에 실증과 검증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를 비판하기 앞서 자신의 학문적인 소양과 능력 그리고 역사적 안목에 대해서 먼저 스스로 검증하고 반성했어야 한다. 그리고 만년 이내의 동양사와 민족사를 충분히 연구한 연후에 환단고기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하고 확인한 다음, 환단고기의 내용에 모순이 있으면, 그것을 비판했어야 했다.

 

그것이 한국사 연구의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영구보존을 위한 "선사와 기궐"을 오역하고 있으니 연구의 넓이와 깊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환단고기의 내용은 7000만 민족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그 비판은 신중에 신중을 다했어야 했다. 깊은 반성과 자아비판이 있기를 바란다.

 

 둘째, 학문의 동기와 목적의 모호성에 문제가 있다 : 어렸을 때의 공부는 일반적으로 취미나 적성에 따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투철한 사명감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학문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나 개인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국자인 독립운동가들의 글에 대해 위서니 조작이니 거리낌없이 혹평하고,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상해임시정부를 주도한 대종교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을 위서 또한 위작이라 비난하는 것을 보면, 실증사학자들이 학문을 하게 된 동기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극히 애매 모호하고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을 위한 부정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아무리 태고시대의 국가라 하더라도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에 대한 유적과 유물이 출토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해 보지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확인했다면, 부정하는 이유, 곧 그 유적유물에 대한 측정도구, 측정방법, 측정과정 등 어디에 모순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함도 없이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의 환단고기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서구학설을 맹신하는 사학계의 풍토에 문제가 있다 : 서구학설은 서구인에 의해 성립된 서구제일주의 학설로서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실증사학계는 서구학설을 진리같이 맹신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곡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사근취원하는 교육풍토에 문제가 있다 : 먼 것보다도 가까운 것부터 먼저 공부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풍토는 가까운 것인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보다도 먼 것인 다른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시간을 더 할애한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사에 대해 무식하게 되고, 그 무식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왜곡하고,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 나라는 태고시대에 이미 동방예의지국이었고 군자지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이니 하는 말은 태고시대의 우리 사회에 이미 높은 수준의 사상과 문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허무한 조작같이 무시하고 있다. 그것이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공부에 대해 소홀하게 되고, 그러한 소홀함이 무식을 낳고, 무식이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덟째, 자연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무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 자연에 춘하추동이 있고,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어 자연과 인생이 무상하듯, 문화도 거기에 생성소멸이 있어 시간적 공간적으로 돌고 돈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곳에 고도의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는 고도한 문명사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법칙 몰이해가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지적을 간단히 요약하면, 실증사학자들에게 민족적 주체의식 내지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교육의 기초를 연구하는 국사학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실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심각한 반성과 자기비판이 있기를 촉구한다.

 

아울러 자신의 안목과 사고방식이 과연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가를 자연인의 입장에서 되돌아보기를 촉구한다. 파란안경이든 검은안경이든 색안경을 벗고 사물을 볼 것을 촉구한다. 곧 과거의 학설과 종교적 신념과 나는 이렇게 배웠다. 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민족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장이 1m 75cm면 정상적인 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1m 50cm밖에 안 되는 사람은 부러워할 것이며, 키가 2m 되는 사람은 무시할 수 잇을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서기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우리 나라의 사학자들 거의가 『삼국유사』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학자들이 『삼국유사』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본다. 그와 같이 『환단고기』를 보는 시각이나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보는 안목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 부정적인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 위서론자들도 생각과 태도를 바꿔 환단고기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래도 환단고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영원히 신화 속에 묻혀 두자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격으로서 다음과 같은 비민족적 비애국적 주장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첫째, 그것은 되살아나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꺽는 주장이다.

둘째, 그것은 9000년 내지 6000년의 민족사를 단축시키는 주장이다.

셋째, 그것은 진실한 민족사관 정립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넷째, 그것은 민족적 자주의식 확립을 저해하는 주장이다.

다섯째, 그것은 민족총화를 저해하는 주장이다.

여섯째, 그것은 선지자들의 교시인 원시반본을 거부하는 주장이다.

일곱째, 그것은 신진 사학자들의 태고사 연구열의를 꺽는 주장이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분명히 이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러한 민족적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고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특히 단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단군학회가 『환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그러한 글을 학회지 『단군학연구』(제2호)에 싣고, 환인·환웅·단군에 대한 역사를 신화로 취급하고 있으니 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군학회의 결성 취지가 어디에 잇는 것인지 깊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본 연구의 주장에 동의하시는 분은 환단고기 정당성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본 연구를 지상에 게재하거나 소개해도 좋으며, 이를 위해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