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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의 三五分紀 : 불급지기(不及之氣)



① 木 ;위하(委和)


木氣가 불급(不及)한 것을 위화(委和)라고 하는데

단 주의하여야 할 것은 불급이란 말과 부족(不足)이란 말은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

 

불급이란 말은 힘은 있지만 아직 그 시기가

상조(尙早)하여서 역량(力量)을 발휘할 수 없거나 혹은 어떠한 외적인 장해(障害) 때문에

힘을 발할 수가 없는 것을 통칭하는 것이요,

부족이란 개념은 근본적으로 힘이 충족(充足)되어 있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불급지기(不及之氣)란 것은 기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급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목기불급(木氣不及)을 위화(委和)라고 하는 것은

 '위(委)' 자의 뜻이 위굴(委屆)을 의미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어떠한 세력의

위압(危壓)을 당함으로 인하여서 木이 生하려고 하여도 生하여 낼 수가 없는 것을 위화(委和)라고 한다.

 

'화(和)’ 자의 개념은 '化'자와 동일개념의 이면(二面)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천도(天道)의 생성작용은 木을 生하려 할 때에 土氣가 선행하면서

子水의 응고작용을 적당하게 和하여 주면 이것은 부화작용(敷和作 用)이다.


그러나 반대로 土氣가 화(和)의 작용을 잘못하면

기불급(氣不及)한 木이 되므로 이것을 위화(委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木氣가 만일 위화가 되면

그 生하는 바의 만툴은 生力이 위굴(委屆)함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木氣 불급은 木氣 자체의 허물이 아니고

오히려 土氣의 화화 작용(和化作用)이 불급한 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기억하여야 할 것은 木과 土에만 화(和,化)자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木은 土에다가 뿌리를 박았고 土(未)는 자기 자체가 化하는 것이기 때문에

化(和)자를 쓴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논하게 될 土化 作用에서 밝혀질 것이다.



② 火 ; 복명(伏明)


복(伏)자의 뜻은 잠복이라는 의미이니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잠복되어서 明을 승명(升明)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明의 의미는 火의 平氣 를 참간(參看)하면서 연구하라).

 

좀더 자세히 말하면 火의 분열(分裂)을 어느 정도까지 억제(抑制)하면서

승양(升陽)하면 이것은 율려작용(律呂作用)이 잘 조절되어서 숭명(升明)이 될 것이지만

만일 火가 불급하게 되면 이양(裏陽)이 불급하게 되어서 明을 상승(上升)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즉 이와 같은 象을 복명(伏明)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인의 눈[眼]이 어두워지는 것은 바로 복명(伏明)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연로(年老)하면 陽氣의 승발력(升發力)이 부족하게 되기 때문에

음성양쇠(陰盛陽衰)하여 노안(老眼)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陽이 깊은 곳까지 잠복하였기 때문에

소위 視力(陽)이 동자(瞳子)라는 ‘렌즈’ 에까지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도(天道)의 운행과정에서 만일 火에 불급이 생기면

 升明이 되지 못하기 때분에 明이 잠복하여서 복명(伏明)이 되므로 우주에는

이른바 화불급(火不及)의 화(禍)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농사는 흉년이 들 것이고 질병은 寒冷性 질병이 유행하게 되는 것이다.



③ 土 ; 비감(卑監)


土氣가 적당하면 비화지기(備化之氣)가 되므로

음양(陰陽)의 괴리(乖離)를 잘 조절할 것이지만 만일에 土氣가 불급하면

음양의 승부를 잘 조절하지 못하므로 모순과 대립의 투쟁 때문에 우주는 변란(變亂)에 빠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비화(備和)작용은 시의(時宜)를 잃을 것이고

모든 생물은 氣가 하함(下陷)하게 됨으로써 생명인 陽氣가 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土不及의 소치이다.

 

그러므로 土不及의 象을 비감(卑監)이라고 한 것이다.


'비(卑)’ 자의 뜻은 ‘고(高)’ 자의 반대인즉 土氣가 불급하기 때문에

불룩하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수축되었다는 말이다. ‘감(監)’자는 '람(覽)’ 자와

통(通)하는 字인즉 본다는 뜻과 임(臨)한다는 뜻이 있다.

 

그런즉 비감이란 개념은 土가 비화(備化)가 되려면

적당한 정도까지 팽창상태를 나타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비감지토(卑監之土) 가 됨으로써

팽창(膨脹)하여야 할 것이 도리어 위축(萎縮)되어 버렸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土가 비감이 된 이유를 관찰해 보면 동남방에서

陽作用이 불급하였을 경우에 未土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지 못하므로

소위 土不及의 결과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土의 성격은 솜[綿]처럼 피우는 작용이 있으므로 인하여

모든 사물을 순화(醇化)하며 또는 중화(中化)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土가 하함(下陷)하여서 비감이 되면 土로서의 구실을 못할 뿐만 아니라

항상 하향(下向)하여서 수토수장(水土收藏)의 과정으로만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주는 ‘實’ 을 잃고 ‘虛’ 만 남기 때문에 비감 (卑監)이라고 한 것이다.


 

④ 金 ; 종혁(從革)


위에서는 金의 평기가 심평(審平)이란 것을 말했다.

金은 자체의 사나운 기운 때문에 항상 살벌의 맹위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지만

또한 불급하지 않도록 경계하기도 하여야 한다. 金이란 것은 본래 통일의 시초이기 때문에

木火의 때에 생장하였던 陽을 자기의 품안에 포장하여야 할 의무와 본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金과 火는 심한 대립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土의 중재를 기다려서 자기의 소임을 수행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土가 적당한 중재를 하여 주면 金이 평기인 심평지기(審平之氣)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지만

土가 만일 조화력을 잃게 되면 金은 火를 포장할 수가 없을 것이며 비록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金의 정기(正氣),즉 심평지기(審平之氣)를 만들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象을 종혁(從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혁(革)’ 자의 뜻은 일반적으로 개혁(改革)이란 개념으로 쓰여지는 것이지만

좀더 상세하게 고찰하여 보면 ‘가죽’ 이라는 글자에 있어서도 ‘혁(革)’ 자와 ‘피(皮)’ 자는 서로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皮’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革’ 자의 의미는 생명체에서

이미 이탈(離脫)되어 인공이 가해진 가죽을 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혁(制革)이라는 어휘는 있어도 제피(制皮)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생피(生皮)에다가 인공을 가한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 말의 어원은

공(天工)이 통일하는 象을 취해서 만든 개념인 것이다.

 

좀더 풀어서 말하면 金火의 교역과정에서 아직 火氣가 상다(尙多)함으로 인하여

金의 수렴작용에 차질이 생기는 象을 가리켜서 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적으로

제혁(制革)하는 것도 金氣의 종혁을 응용한 것인즉 이것은 바로 천도혁명(天道革命)의 응용인 것이다.

 

예를 인체에서 들어보면 火氣가 왕(旺)하여서

화왕작금(火旺灼金)하는 사람은 모발(毛髮)이 탈락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金氣가 불급하고 火氣가 과다한 현상에서 오는 종혁작용인 것이다.

그런즉 인체의 종혁 작용과 천체(天體)의 종혁작용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므로 천체에 있어서는 이러한 象을 관찰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가을[金]에는 동물이 털을 갈고 수목은 낙엽이 지게 되는 것은 천체 자체에서

종혁작용을 하기 때문에 형상계(形象界)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근취저신 원취저물(近取諸身 遠取諸物)’ 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⑤ 水 ;학류(?流)


水氣는 본래 流動(變化)의 원천이며 생명의 모체이며 정신의 부고(府庫)인 것이다.

그렇다면 水의 자동성(自動性)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주에 있는 만상은 動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물’ 의 운동이다. 태란초목(胎卵草木)은 물덩어리에서 출발했고

만화방창(萬華方暢)한 변화도 현수삼천인(懸水三千?)의 물방울의 율동(律動)인 것이다.


그런데 만물이란 것은 물에서 나왔다가 물로 다시 돌아가고야 마는

전후반복의 여로인데 이것을 易에서는 坎작용이라고 하며 오행학에서는 '水' 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水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水氣 자체가 지닌 바의 응고성과 자율성과 조화성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응고성의 통일은 精과 核을 귀장(歸藏)하고 자율성은 핵과 정 속에 있는 陽을 動하게 하여서

변화하고 조화성은 動함에 있어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모순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원인을 가진 것이 ‘水’이기 때문에 ‘水’에는 항구성과 변화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詳細는 제7장 ‘정신론’ 에서).


열자(列子)가 이 세계의 변화를 현수삼천인(懸水三千?)의 물 속으로

출입부침(出入浮沈) 하는 잠수부의 모습으로 본 것도 실로 이와 같은 물의 변화를 노래한 것이다.

 

그런즉 만물은 이와 같은 물의 형질에 의해서 生하는 것이므로

만물의 본원을 ‘물’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水源이 마르게 되면 강(江)이 마르는 것과 같이

만물의 생성에서 水氣가 학갈(학 渴)되면 물의 율동하는 변화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기불급(水氣不及)을 학류(?流)라고 하는 것이다.

‘학(?)’ 자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보면 물이 마른다는 뜻이지만 조금 더 깊이 따져 보면 ‘호(?)’ 자의 뜻이 있다.


호(?)자의 뜻은 폐색(閉塞)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즉 ‘학(?)’ 이라는 개념은 물이 말라서 水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水源이 폐색되었기 때문에 일반적 관찰로써는 물이 마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水’ 가 폐색된 것 뿐이다.

 

‘류(流)’ 자의 개념은 물이 자동성에 의해서 흐르는 것을 취한 것이다. ‘류(流)’ 자는 古字의 '?不

’ 자이다. ‘?不  ’ 자는 ㅆ水ㅆ不의 象을 취한 것인 바 우선 '不’ 자의 象을 보면 木氣가 행하려고 하지만

一水를 관통(貫通)하지 못하여서 발하지 못하는 象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不’ 자는 ‘木’ 자가 위쪽으로 관통하지 못한 象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를 '水'의 변에 쓴 것은 水氣가 발하려고 하지만 발해 내지 못하는 象을 취하기 위하여서

?不  ’ 로써 象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동력원은 이와 같이 발하려고 하여도 발할 수 없게

제압(制壓)당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  ’ 자와 같은 象을 취하여서 물의 自動할 수 있는 象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즉 이제 여기에서 두 글자의 개념을 종합하여 보면 학류(?流)라는 것은 물의 유동할 수 있는

근원이 일시적으로 폐색당해서 흐르지 못하는 象인 것이요,결코 水源이 부족해서 흐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水不及을 학류(?流)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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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의 삼오분기

오행의 삼오분기는 왜 생기는가?

3. 승명(升明)과 비화(備化)


火의 평기를 승명이라고 하고 土의 평기를 비화라 합니다.
승명과 비화가 중요한 까닭은 우주의 운동이란 것은
불을 어떻게 잘 다스리느냐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불이 꺼지면 작동이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며 우주에 있어서는 소멸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승명과 비화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火의 평기는 '신비의 문'
(서론에서 설명했듯이 신비의 문이란 인류가 찾고자 하는 생명탄생의 비밀,


우주발생의 기원,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생성되며
왜 죽음을 왜 맞이하는가 하는 등의 모든 의문을 총칭하는 한동석 선생의 술어입니다.)

을 열어나가는 明을 발전시켜서
상승하게 하는데 알맞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火는 본래 없어서는 안 될 것인 동시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태과하면 明을 상발(上發)하다가
본체의 창조기본인 양(陽)을 잃을 염려가 있고,

만일 불급하면 우주를 陽없는 공각(空殼)으로 만들 폐단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사적으로 살펴보면 불은 明입니다. 신문명을 여는 것이므로 쉽지가 않은 것이죠.
(그러므로 土는 火에서 나옵니다.)

또한 '나는 깨지고 싶다!'고 한다면 물흐르듯 가야합니다.
'믿기를 활다리듯 하라' 이게 승명입니다.
그러므로 승명작용을 하는 火만이
우주의 본원인 未土를 창조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火가 되는 것입니다.


4. 化와 和의 개념

化는 바탕, 보이지 않는 근원, 우주의 조화기운의 본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이면의 본성을 말합니다. 반면 和는 현상작용면에서
그 사람의 말씨, 몸 움직임,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지칭합니다.

즉 和는 사물에 대한 지칭이며 化는 형이상적인 象에 대한 작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土의 평기인 비화(備化)의 化는
모든 음양작용의 과불급을 조절하는 절대 중화지기(中化之氣)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土를 가리켜 中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표시이며
엄격히 말하면 化할 수 있는 土를 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土에는 진술축미의 4土가 있으며
이 중 10土인 未土는 중도적 작용을 하며, 5土인 진술축土는 중용적 작용을 하게 됩니다.
깊은 내용이므로 당장은 모르셔도 좋습니다.

불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