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행(五行)의 개념(槪念)



오행이란 개념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태극이라고 불리우는 통일체가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의 네 단계를 거쳐서

태극으로 발전됐고 그럼으로써 다시 陰과 陽이라는 두 가지 기운이 갈라지게 되었는데


그 음양은 또다시 각각 분합작용을 일으킴으로써

다섯 개의 새로운 성질이 발생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五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 위에 있는 삼라만상이 비록 수억을 산(算)한다고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이것들의 性과 質을 일일이 따진다고 하면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위에서 말한 바의


五行의 성질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하여 五行이라는 자연법칙을 설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五行법칙의 특징은 희랍의 자연철학과 같이

물질단위만을 가지고 삼라만상의 유동하는 변화를 측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나 생명을 가진 살아 있는 물질의 동정하는 모습을 측정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법칙으로써

사물을 측정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칙이 고성(古聖)틀의 눈[眼]에 떠올랐을 때에

그들은 이것을 곧 五行의 운동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연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모든 공간에 귀숙(歸宿)하고 있는 것으로서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오행기(五行氣)가 아닌 것은 없다.


그러므로 五行의 기운이란 것은 응고하게 되면

형체를 이루어서 만물이 되고 만일 이것이 분해하게 되면 또다시 순수한 五行氣로 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생성하기도 하며 소멸하기도 하는 것이 물질인데

그 물질은 정신을 포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 속에는 약동하는 정신과 생명이 포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반드시 자기의 활력소(精神)를 타고나게 된다.

 

우주간에 있는 만물은 이와 같은 조건에서 생성하였다.

따라서 그 자체가 변화무쌍한 것은 五行의 기화변질(氣化變質)하는 작용 때문인 것이다.

 

五行이란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양면성을 띤 것이므로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五行법칙이 만상의 연구에 있어서 지고지상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여기에서

오행각개(五行各個)의 개념을 연구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선 五行이라는 자연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五行의 개념에 ‘五’ 자를 붙인 것은

우주의 만불은 다섯 가지의 법칙권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行’ 자를 놓은 것은 氣運이 취산(聚散)하면서 순환하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行’자를 분석하여 보면 '?'자는 자축거리며 걸을 척字요. ‘?' 자는 앙감질 촉字다.


그런즉 行字는 이 두 자의 象을 취(取)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五行의 행로는 평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行이란 것은 일진일퇴(一進一退)를 의미하는 것이니,

즉 往 + 來 = 行’ 이라는 공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일왕일래(一往一來)하는 모습이

五行의 운동규범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명명(命名)한 것이다.


따라서 五行運動은 분합운동(分合連動)이기 때문에

陽 운덩의 과정인 木火에서는 분산(分散)하고 陰운동 과정인 金水에서는 종합((綜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취산의 의미가 -行字 속 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념을 설정함에 있어서

行字가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금전(金錢)이 취산(聚散)하는 곳을 ‘銀行’ 이라고 한 것이나

화물(貨物)이 취산하는 곳에는  '洋行’ 이라는 개념을 붙인 것 같은 것은 실로 '行'자 자체가

지닌 바의 개념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오행의 기본개념(基本槪念)



우주의 운동원질(運動原質)을 木火土金水의 다섯 가지로 명명(命名) 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五行의 개념을 연구하여야 한다.

 

목화토금수라는 것은 ‘나무’ 나 ‘불’ 과 같은 자연형질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목화토금수의 실체에는 形과 質의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五行의 法則인 목화토금수는

단순히 물질만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象만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이하와 형이상을 종합한 形과 象을 모두 대표하며 또는 상징하는 부호인 것이다.


五行이란 이와 같이 형질을 모두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점(主點)은 象에 다가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象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象이 아니고 이면(裏面)에서 율동

(律東)하는 생명력인 象, 즉 運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철학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五行의 개념이 形과 象이나 유와 무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다면

이것은 그 개념의 불완전함을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면 이와 같은 불비(不備)한 개념으로써

율동하는 자연의 진상을 측정하기는 너무나 부자유할 것이다.

 

개념설정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설정법칙(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는 법칙)을

무시할 때에 희랍의 자연관과 같은 실수도 생겨날 것이고 또는 오늘의 기계관과 같은

‘근시안적’ 방법도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수학(象數學)은 철학의 기본이며

또한 사색의 안내자인 오행의 기본개념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이 形과 氣를 자유로이 대표하며

상징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자연 그대로의 형상인 기본법칙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인간이 임의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대자연의 계시이며 또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변화하는 대자연의 本質을 관찰하여 보면

이것은 形도 氣도 아닌 것으로서 다만 분열과 종합을 영원히 반복하고 있는

우주 변화의 일대환상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運動하는 모습에는 영원한 항구(恒久)란 있을 수가 없고

다만 감응(感應)과 항구가 반복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직관하고 움직이는 自然 그대로,

다시 말하면 그러한 自然을 측정하며 또한 탐색하기에 가장 알맞게 定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 직관(直觀)이란 말은 정확히 관찰한다는 말이지 결코 보고 느낀 대로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에는 항상 자기 주관이 앞서기 때문에 바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인즉

이것은 직관이 아니다.근래에 직관을 ‘보고 느낀대로’ 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념의 오인(誤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