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론의 발생과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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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무엇으로써 구성되었을까,

또는 어떻게 움직이며 무엇이 이것을 움직이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철학적 과학적인 영역를 거쳐서 有史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일대숙제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서양철학계에 있어서는

희랍의 자연철학이 쇠퇴한 이후 이 문제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즉 우리는 우주원리를 어떻게 연구하여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우주 운동의 법칙과 그 본체가 열어 주는 바의 象에서 찾아야 한다.

 

서양철학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다만 유동하는 물질적인 형상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그림자에서

사물의 진상(眞相)을 찾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2의 르네상스를 부르짖게 되었으며

따라서 고대 희랍으로 가느냐,동양으로 가느냐,하는 기로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이와 같은 거대한 숙제에 대해서 황파(黃婆)의 입장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상수원리(象數原理)는 오천년전으로 추산되는

복희(伏羲)때 벌써 물 속에서 河圖(龍馬 등에 그림을 지고 나온 것)가 나옴으로써 기원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복희는 여기 대해서 전심치사(專心致思)한 결과로써

드디어 그 그림 속에서 거기에 변화막측한 우주의 동정하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에 의하여 힌트를 얻었는가?

하도는 ‘象’(凡人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볼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사람은

볼 수도 있는 모습이 ‘象’ 이니 이것은 무형이 유형으로 전환하는 중간과정에서 나타난다)과 ‘數’ 로써

상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象’ 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또한 그 인식방법이 관념에 속한다 할지라도 자연수 자체는 분열과 종합하는

일정한 법칙에 의하는 것이므로 수열(數列)이나 수식(數式)의 변화에는 거짓말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象은 사유와 인식에 의해서 관찰되지만

그 ‘象’ 자체가 연출하는 바 ‘數’ 의 분합(分合)현상은 이것을 반증하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상수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수(數)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바

그것이 비록 동양에 있어서처럼 상수(象數)의 일원적(一元的)인 원리로서는 발전하지 못하였지만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0~500)가

 '만물은 無限한 것과 有限한 것이 종합(綜合)하여 생성(生成)하는 것이니

이것은 數의 기우(奇偶)가 결합(結合)하여 변화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 라고 말한 것이나,


또 플라톤(PIaton BC 428~347?)이

  ‘기하학(幾何學)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학교에 오지 말라’ 고 한 것 등으로

미루어서 생각하여 보아도 서양에 있어서의 철학과 數의 관계를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복희씨의 상수(象數) 발견이 이미 50세기 전에 벌써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이 세상에 대두하게 되자 이것이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를 거쳐서 역학대계(易學大系)를 이루었고


다른 쪽으로는 복희(伏羲). 기자(箕子). 노자(老子).

공손룡자(公孫龍子). 추연(趨衍)등을 거쳐서 음양오행의 변화원리를 형성하여 놓았던 것이다.


저간(這間)에 있어서 노사의 자연관이 수출(首出)한 후

열자(列子). 장자(莊子) 등이 우화형식(寓話形式)을 취하면서 자연원리를 해명함으로써

실로 위대한 공적을 남겨놓았던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과 같이 학파에 구별이 있었고

그 부연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었을 망정 그러나 그 원리의 귀착점을 살펴보면

일원동류(一源同流)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법칙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우주동정의 원리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 있어서의

철학의 방향은 단적(端的)이 아니며 통일 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양철학은 서양철학에 있어서처럼 그의 원질(原質)을

어떤 낱개의 물질이나 성질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통일된 形과 象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즉 통일된 매개(每個)의 우주에서 찾아내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은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하도(河圖)에 상징(象徵)된 바에 의하여 象數의 법칙을 찾아내고

따라서 자연을 지배하는 우주정신도 이 법칙에 입각한 것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하한 생명체에 있어서나 그의 대소를 막론하고 각각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은 모두 매개(每個)의 소우주인 이상

그 소우주라는 것은 精과 神의 반복하는 운동인 것이며 物과 質이 산합(散合)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질이 서로 매개(媒介)하면서

끊임 없는 변화작용을 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로 생성된 것이 존재이며 따라서

생성을 분합케 한 그 원진(原眞)이 바로 그 존재자(存在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 + 물질 = 존재’ 라는 공식은

철학연구에 있어서 절대진리(絶對眞理)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이 공식을 무시하고서는 우주의 본질을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각설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 + 물질 = 존재’ 라는 공식에 가장 충실한 것이 우리의 입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이 동정(動靜)하는 모습도 역시 ‘정신 + 물질 = 존재’ 의 운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吾人은 여기에서

정신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를 추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따라서 정신존재에서는 精과 神을 구별하여야 할 것이며

물질존재에서는 物과 質을 변별(辦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것들을 철저히 가려내지 못한다고 하면

그 법칙은 우주의 본질을 탐색하려는 법칙으로서 너무나 무능력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요구 때문에 이에 부응할 수 있는

자연법칙의 발견이야말로 철학도에게 내려진 지상명령(至上命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은 기본법칙을 설정합에 있어서

陽+陰=太極’ , ‘木+火+土+金+水=陰陽’ 이라는 공식으로 귀납(歸納)되는 것이며


또는 ‘太極=陰+陽’ , "陰陽=木+火+土+金+水’ 로서 다시 연역(演繹)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만물의 척도이며 따라서 그의 분합운동(分合運動)과

그 본질을 측정할 수 있는 법칙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의 과정적 변화에서

그 원리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그 계기에 의하여 수립된 법칙이

바로 陰陽五行의 운동법칙이며 동시에 만물과 우주의 본원도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법칙은 우주간의 모든 변화현상을 탐구할 수 있는 大本이기 때문에

철학 · 의학 · 과학· 법률 · 정치 · 사회학 등 모든 원리의 탐구도 여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의 기본원리인 五行의 象과 數도 그 기본을 찾아 보면

이것은 음양이라는 승부운동(勝負運動 ‘+’ 와 ‘-’ 의 運動)의 부연(敷衍)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극이 운동양태를 나타내기 시작할 때에

거기에 ‘+’ 와 ‘-’ 라는 서로 상반되는 기운이 나타나게 되었는바

이것은 그의 性과 質에서 象을 취하여 가지고 음양이란 개념을 붙인 것이다.


그런즉 五行이란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음양이 다시 발전(發展) 성수(成遂)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변화하는 상태는 사실상 음양운동인 바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오행운동이고 추상적(요약하여서)으로 보면 음양운동인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것을 음양오행론이라고 하기도 하나

사실은 음양론은 오행론의 기간(基幹)이고 오행론은 음양론의 지엽(技葉)인 것이다.


그런즉 상수원리의 연구란 것은

이와 같은 陰陽과 五行의 본질을 연구함으로써 모든 事物과 變化의 진상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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