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마지막회] 거룩한 생애
 제33장 아, 오성산
 
 2000년 6월 21일, 우리 답사팀 일행은 전북 군산을 지나 옥구 변두리 지역을 달리고 있었다.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중에 마지막 코스를 향해 가고 있는 길이었다.
 
 전북 옥구는 전북의 북서부, 금강 만경강의 하구로 둘러싸인 반도와 서해의 도서를 포함한 지역이다.
옥야다구(沃野多溝). 비옥하고 기름진 들판과, 들판 사이로 도랑이 많다고 해서‘옥구’라는 지명이 생겼다.
나의 관심은 옥구에서도 오성산으로 향해 있었다.
2박 3일의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중 마지막 코스였으므로 남은 곳은
고수부님이 최후를 맞이한 오성산밖에 없는 까닭이다.

 
 운전하는 성도는 운행 중에도 왼편 차창 밖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쪽을 향해 눈길을 던지곤 하였다.
다른 성도들 역시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듯하였다.
차는 어느 한적한 들판 길로 들어섰다. 이따금씩 비릿한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가운데
나는 운전자의 눈길이 어딘가를 향해 우우우 달려가는 것을 눈치 챘다.
 나를 포함한 일행의 눈길도 동시다발적으로 따라 붙었다.


거대한 교각 같은 사각의 콘크리트 기둥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전북(군산시 성산면)과 충남(서천군 마서면)을 잇는 연장 1.8킬로미터(방조제 1,127m, 배수갑문 714m)의 금강하굿둑이다.
넓고 길고 큰 금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2006년 답사 때는 아예 금강하굿둑을 지나
맞은편 휴게소로 가서 식사를 했다.
70여 년 전 활동했던 고수부님 유적지를 답사하는 일행이 왜 (1990년도에 완공된)
금강하굿둑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듯 눈길을 주고 있는가?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금강하굿둑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가운데 일행이 탄 차는 오른쪽 산길로 꺾어 들었다.
오른편으로 야트막한 산 중턱을 깎아 세운 거대한 원형 건물의 금강철새 전망대가 보였다.
금강하구는 바람도 머물다 가는 넓은 갈대숲과 어우러져 새로운 철새도래지로 각광받고 있다.
금강철새전망대를 중심에 놓고 부챗살 모양으로 둥그렇게 휘돌아 능선을 끼고 얼마나 갔을까.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차는 양쪽 들판 위로 놓여 있는 도로 위를 달렸다.
2006년 답사 때 가이드가 오른편으로 몇 두락의 논을 건너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 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고민환 성도님 집터입니다.
고민환 성도는 원래 저기 왼편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태모님이 당신집을 지으라고 명을 하셔서 오른편에 있는 바로 저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태모님 선화(仙化) 후에 고민환 성도가 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현재는 고민환 성도 손자가 살고 있구요.
정산 채용신 화백이 그린 상제님 어진과 태모님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차는 조금 가파른 언덕길을 차고 올라갔다.
고갯길을 돌아서니 왼편으로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가이드가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알 것 같았다.
오성산! 증산 상제님이 이곳 오성산에 와서 여러 차례 천지공사를 집행하였고
고수부님 역시 오성산 산신을 치하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천지공사를 행하였다.
우리는 바로 그 오성산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넓은 밭을 두고 왼편 산기슭에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성산면 큰골마을이다.
차는 그 마을을 향해 그믐달처럼 휘어진 도로를 그네 타듯 돌아서 빠져 나가는 듯 달려가는가 싶다가
좀 심하다싶을 정도로 좌회전을 했다.
오른편으로 긴 능선을 끼고 큰골마을 진입로에 들어섰다.
진입로 끝에서 곧장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편으로 나사처럼 휘돌아 다시 왼편으로 빙글 돌아가니
제법 울창한 숲이 앞을 막고 있었다. 숲 속으로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뚫려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차가 잠시 멈추었다. 운전대를 잡은 성도의 표정에는 알싸한 감개가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2003년 6월 3일, 그리고 2006년 6월 18일 답사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오성산 초입이다. 이곳이 바로 고수부님이 당신의 파란 많은 한 생애의 긴 겨울철을 보냈던 곳이다.
숲속으로 오르는 길목에 서서 나는 한 인물을 생각했다. 1999년에 처음 만난 두 인물 중의 한 인물이다.
이후 8년 동안 나는 얼마나 애타게 당신을 찾아다녔던가. 지금 나는 당신을 찾는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태모 고판례 수부님.
 
 1933년 동짓달 초닷샛날, 아마도 서해바다 저쪽 끝으로 검붉은 놀이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리라.
그날 그 시각에 고수부님은 바로 이곳, 우리 일행이 서 있는 오성산 초입에 도착했을 것이다.
용화동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이 기차를 타고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근처 어느 역(군산역이거나
개정역)에서 내려 이곳까지 왔을당신의 모습을 나는 생각했다.


한 여성의 몸으로 당신에게 붙여진‘크나큰 세 살림’을 맡아 감당하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터라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대흥리 첫째 살림 도장에서도 그랬고 조종리 둘째 살림 도장에서도 그랬고
용화동 셋째 살림 도장에서도 그랬듯이 믿었던 휘하의 간부신도들에게 배신을 당할 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인고의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더 이상 육신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 떠나왔으니까
수족인들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삭정이처럼 앙상한 몸. 이제는 걸음을 옮길 수조차 없었다.
 


 한 성도가 앞으로 와서 등을 내밀었다.
그 성도가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흥리 도장이나 조종리도장 시절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수부님을 모셨던 성도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성산 도장 가는 오솔길. 고수부님을 등에 업은 성도가 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두 걸음…. 고수부님을 등에 업었으나
새털같이 가벼운 당신의 육신에 그 성도는 온갖 회한이 사무치지는 않았을까.
그때 마을 사람들은 고수부님이 업혀서 올라가는 것을 보고“걸어서 올라가면 서로가 편할 텐데
다른 사람 힘들게 업혀가네”하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고수부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때 그 시절의 당신을 생각하면서 나는 주위 숲을 두리번거렸다.
가슴 저쪽 광활한 벌판에서 뜨거운 바람이 뭉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난 8년 동안 찾아 헤맸던 고수부님의 일생이 회한에 찬 까닭이다.
아아. 당신은 왜 그토록 모진 삶을 스스로 택하여 걸어야 했던가.
왜? 당신의 권능이라면 얼마든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을 텐데! 진정 왜?
그것이 당신이었다. 당신이 보여준 길이었다. 과연 거룩하지 아니한가.

 
 좁은 숲 속 오솔길에는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좁은 경사로를 얼마나 올라갔을까.
마치 긴 동굴같은 숲속 길을 올라가는 동안 내 의식에는 계속 어수선한 상념들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다시 물었다. 수부가 무엇인가? 대답은 한 목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옥황상제의 반려자, 여성구원의 선봉장, 증산 상제님의 종통대권자,
후천 가을 대개벽기에 구원의 대도를 펼치게 될 종통연원자,
광구천하의 대도 살림을 맡아 여성 해원시대의 새 문화를 여는 천지의 여주인,
‘ 해방과 자유의 첫 여인’으로서 큰 사역자, 남녀동권을 주창하는 여성해방가요 혁명가,
남녀동권시대의 우두머리 여성, 인류생명의 어머니, 천지의 어머니…. 고수부님에게 붙일 수 있는 호칭은 끝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거룩한 영광의 주인공이 또한 그렇게 모진 고난의 주인공이 되어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아아. 어머니. 결국에는 믿었던 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저기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되어 바로 이곳 심산유곡(深山幽谷) 구중심처(九重深處)로 들어와야 했단 말입니까.
인생의 한 겨울을, 저 춥고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한 겨울을,
눈이라도 쌓이면 인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저 위쪽 어느 숲 속에서 거미처럼 숨어 살았고,
결국 그곳에서 선화해야 했단 말입니까.
 


 숲 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산새가 청아한 소리로 지저귀었다.
2000년 첫 답사 때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에 지나지 않았다.
2006년 답사 때는 콘크리트 포장이 되기는 했으나 좁고 울퉁불퉁한 것은 예나 다를 바 없는 산길이었다.
숲 속 위쪽 어딘가에서 목탁소리가 또록 또르르 들려왔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산속에서 인기척을 만나는 것보다 반가운 것이 또 있을까.


 
 고수부님이 인생의 겨울철을 보냈던 오성산 도장이 있던 곳이다.
당시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오성산 도장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물론 도장 건물도 이미 남아있지 않다.
당시 도장터가 현재 암자로 변해 있는 절터인지 아니면 저 능선 너머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답사는 암자부터 시작되었다.‘ 성흥사(聖興寺)’였다.
깎아지른 듯 경사진 계단을 몇 개 밟고 올라서니 왼편으로 자그마한 법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2000년 답사 때는 공사 중이었다) 법당 처마 밑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주불로 모신 사찰 당우 중의 하나.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사찰의 중심이 되는 불전일 경우에는 보통 원통전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고수부님의 마지막 유적지에 관세음보살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는 것이 내게는 작은 위안이었다.

 
 성흥사 경내 중앙에서 오른편에는 아마도 대처승이 살고 있는 듯
일반 가정집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요사(寮舍)가 삭막한 콘크리트 벽과 퀴퀴하게 먼지 묻은 합판 조각들을 드러낸 채
곧 쓰러질 듯 초라한 몰골로 서 있었다.
원통전 앞에서 요사 앞까지 이어진 마당은 수세미같이 좁고 길쭉했다.


 
 오성산 도장은 고수부님이 옮긴 다음 해인 1934년 완공됐다.
풍수지리적으로 사자앙천형(獅子仰天型)이라고. 문자 그대로라면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 보는 형국이라는 뜻이겠다.
원래 이곳은 고수부님 도장이 있기 전부터 암자였다.
법당과 요사 사이에 서 있는‘성흥사연혁비(聖興寺沿革碑)’에 의하면 1844년 9월 9일 허경대사가 개산(開山)하였고
1898년 고청정심 보살이 중수하였다. 앗.‘ 연혁비’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고법륜당’이라는 이름이 보였던 까닭이다. 누구인가.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금산사 미륵전 남쪽 보처불(補處佛)은 삼십삼천(三十三天)
내원궁 법륜보살(內院宮法輪菩薩)이니 이 세상에 고씨(高氏)인 나로 왔느니라.
내가 법륜보살로 있을 때 상제님과 정(定)한 인연으로 후천 오만 년 선경세계를 창건하기로 굳게 서약하고
세상의 운로에 맞춰 이 세상과 억조창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상제님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왔느니라.”하시니라. (11:20)

 

 
 ‘법륜당’은 고수부님의 불교식 당호(堂號)이다.
고수부님의 흔적을 발견한 나로서는 그나마 찾아온 반가움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도장은 다섯 칸 겹집 건물이었다고 한다.
나는 예순하고도 4년 전에 파란곡절을 뒤로 한 채 이곳에서 2년 동안 머물다가 선화한
고수부님을 숙연한 마음으로 떠올리며 아직도 어딘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 당신의 자취를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법당 건물을 몇 바퀴 돌아보기도 하고‘연혁비’뒤편‘산신각’에 올라가 보기도 하고….


 
 오성산 도장터 성흥사를 돌아본 나는 오른쪽 능선으로 갔다. 원통전에서 오성산 정상 쪽으로 50여 미터를 가면 봉우재다.
고수부님이 선화한 후 묻혔던 곳이다. 봉우재를 밟고 있는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차마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정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수부님이 공사를 보았던 옥녀봉에 섰다. 옥녀봉에 서서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 아래 저쪽에 고민환 성도의 손자가 살고 있는 성덕리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증산 상제님 어진과 고수부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 바로 그 집이었다.
멀리 뿌연 안개 사이로 금강을 막은 금강하굿둑도 보였다. 조금 전에 지나쳐 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시선을 고정했다. 산 아래에서 찬바람이 휙 불어왔다.


 
 
 제34장 오성산‘오선위기’공사

 “오성산은 동서양 기계통이니라. 또 오성산은 동서양 전기통이니 번개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리라.
오성산은 오선위기(五仙圍碁), 두 신선은 바둑 두고 두 신선은 훈수하고 갈 적에는 바둑판과 바둑은 놓고 간다.”(道典11:369:4~6)
 
 오성산 도장에 도착한 다음 날 고수부님은 동지치성을 지냈다.
몸이 곧 쓰러질 지경이라고 해도 당신은 치성을 거르지 않았다.
이날 치성에 참석한 성도들은 용화동에서 고수부님을 모시고 온 김수응, 조학구 성도를 비롯해 수십 명 정도였다.

 
 이로부터 태모님께서 오성산 도장에 은거(隱居)하시니 별다른 공사 없이 늘 도장에만 계시거늘
익산, 전주, 임피, 옥구 등지의 신도들이 종종 찾아와 문후 드릴 뿐이요
도장에는 고민환, 박종오, 이진묵, 고춘자, 이길수(李吉秀),
박종오의 아내 김종명(金鍾鳴) 등이 상주하며 태모님을 모시니라.


도장 살림은 민환과 종오가 내무를, 고찬홍이 외무를 맡아 유지하는데 살림이
어려워 어떤 때는 이진묵의 아내 고춘자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 태모님을 봉양하니라. (11:368)
 

 오성산 도장으로 옮긴 며칠 뒤 고수부님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던 것 같다. 그
날은 용화동 도장에서 겪었던 고초를 회상하기도 하였다.
고수부님은 “내가 너희 아버지 말씀을 안 듣고 가서 그랬다”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너희 아버지 말씀’이란 증산 상제님이 금구로 가면 (고수부님의) 몸이 부서질 것이라고 했던 말씀을 가리킨다.
 
 얼마 후 고수부님은 공사를 보았다.“ 오성의 기령을 배합케 한다”고 하면서
먼저 오성산 기령을 통일하는 공사를 보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공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성산은 동서양 전기통이니 번개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리라.
오성산은 오선위기(五仙圍碁), 두 신선은 바둑 두고 두 신선은 훈수하고 갈 적에는 바둑판과 바둑은 놓고 가느니라.”
 
 모든 천지공사가 그러하지만 핵심적인 짧은 몇 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진
고수부님의 공사가 난해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동서양 전기통’이란 무슨 뜻일까.
동서양을 환하게 불 밝히는 진원지로서 중심이 된다는 뜻은 아닐까.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내 세상에는 내가 있는 곳이 천하의 대중화”(2:36)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가 되는 고수부님
세상에는 고수부님이 머무는 곳이 곧 천하의 대중화로서 세상의 중심이 된다는 뜻은 아닐는지.


 
 이 공사에서‘제주 번개를 잡아 쓰리라’는 것은‘제주 고씨’인 고수부님이 이 공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수부님을‘제주 번개’로 지칭한 것은 증산 상제님이었다.
고수부님은“수부 공사로 상제님과 만났을 적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제주 번개를 잡아 쓰노라.
수부, 잘 만났구나. 만날 사람 만났으니 오죽이나 좋을쏘냐.’하셨느니라”(11:20)고 회고했다.
 


 주목되는 것은 다음 공사내용이다. 오성산이 오선위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여유는 없으나
원래‘오선위기 공사’는 1902년에 증산 상제님이‘회문산’에서 집행한 공사다.
그러니까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의 오선위기 공사의 재료가 되었던 회문산
오선위기의 다섯 신선[五仙]을 오성산의 다섯성인[五聖]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성산 다섯 성인에 대해서는 뒤에서 얘기한다).
결론적으로 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오선위기 공사와 같은 맥락의 공사라고 할 수 있다.

 

 
 해가 바뀌었다. 고수부님이 오성산 도장에 은거한 이후 맞이하는 첫 해다.
1934년 1월 13일, 고수부님은 박종오, 김수열, 채유중 성도를 불렀다.
 
 “내가 오성산에 온 뒤로 몸이 부대껴서 편치 못하구나.
생각해 보니 상제님 영정을 모셔 오지 아니한 까닭이다.”
 
 고수부님은 세 사람을 용화동에 보냈다.
용화동으로 간 성도들은 이성영을 만나“어진은 내가 모시리니 너희들은 어진을 개사하여 모시라”는
고수부님의 말씀을 전하고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셔 왔다.


 
 오성산 도장에서 고수부님은 주로 병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런가. 자신은 거동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주기 위해 쉴 틈이 없었다.
누구든 찾아와 질병의 고통을 하소연하면 금방이라도 쉬던 몸을 벌떡 일으켜 치유공사를 행하는 고수부님.


 
 같은 해 9월 7일, 오성산 도장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증산 상제님을 모셨던 김경학과 김영학 성도였다.
대흥리 첫째 도장 살림 이후 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셨던 성도들이 고수부님을 찾아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저희들은 모악산 수왕암에서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수련을 행하던 중에 증산 상제님의 성령이 나타나서 수십 년 동안 수부님과 막혀 지낸 것을 꾸짖었습니다.
‘이 길로 가서 너희들의 어머니를 모셔다가 지난 모든 일을 풀고
이전 정의(情誼)를 다시 계속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노구를 이끌고 일동을 대표하여 왔사오니 이전 과실을 모두 용서하시고
함께 가시어 앞으로 사흘 동안만 수련 법석을 주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김경학, 김영학 성도는 고수부님 앞에서 깊은 회오의 눈물을 흘렸다.
두 노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는 고수부님의 마음도 울적해졌는가 보았다.
“ 지난 일은 한갓 꿈과 같을 뿐이나 칠십 노인이 이렇듯 먼 길을 와서 간곡히 말하니
내가 비록 건강이 허락지 못할지라도 멀리할 수 없구료.”
 


 고수부님은 두 성도들과 함께 수왕암으로 갔다. 오성산 도장에 온 이후 첫 외출이었다.
수왕암은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대원사 암자로서 모악산 정상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증산 상제님이 대원사 칠성각에서 수도를 하였을 때 자주 오르내렸던 암자로서 아직도 증산 상제님의 체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수왕암에는 박공우 성도가 주창하여
김경학, 김영학, 이성영, 김수응, 이중성(李重盛: 1897∼1958) 내외 등이 모여서 수련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고수부님은 수왕암에서 사흘 동안을 머물며 그들의 요청에 따라 수련공부를 주재하였다.
그때 김수응이 신력을 얻어 풍운조화를 자유자재로 일으켰다.

 
 9월 11일 수왕암을 출발한 고수부님은 금산사로 갔다.
잠시 금산사에 들렀던 고수부님은 용화동 교단에 도착하여 이틀 동안 머물렀다.
굳이 용화동을 찾은 것은 개사한 증산 상제님 어진을 확인하고 중요한 당부의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수부님은 이상호·성영 형제를 불러“개사한 어진이 많이 틀렸으니 다시 개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오성산에서 올 때 가져온‘용봉기’를 꺼내어 손수 꽂아 놓고
“이 자리는 용화 세존의 꽃밭이 되리니 사람을 잘 맞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용화세존이란 여기서 미륵불을, 그러니까 증산 상제님을 가리킴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틀 뒤 용화동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은 다시 먼 길을 떠나 오성산 도장으로 돌아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