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장 용화동 셋째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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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 옳은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살려야지요.” (道典 11:324:5)
 
그해 동짓달 6일 고수부님은 고찬홍, 이근목, 전준엽, 박종오 등을
용화동으로 보내 동지 하루 전날에 이사할 뜻을 전했다.
같은 달 14일에 용화동 교단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고수부님을 모시러 왔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고찬홍, 이근목, 전준엽, 박종오, 강재숙, 고민환, 김수열, 이용기, 정아옥 등 10여 명을 데리고 용화동으로 이사했다.
정읍 왕심리 도장생활 2년 3개월 만에 다시 도장을 옮긴 것이었다.

 

용화동 도장―. 고수부님의 셋째 살림 도장이 시작됐다.
고수부님은 용화동 도장이 당신에게 주어진 ‘크나 큰 세 살림’ 가운데 마지막
셋째 살림 도장이 되리라는 것을, 몸이 부서질 줄을 알면서 당신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에 고수부님은 동지치성을 봉행하였다. 그리고 용화동 도장에서 첫 공사를 행하였다.
고수부님은 “법은 상제님께서 내셨으되 용사(用事)는 내가 하노라”고 전제한 뒤에 노래한다.


 
평천하 운수요 평천하 도수로다. / 전국말세 진시황은 평천하한 연후에 /
만리장성 높이 쌓고 / 사람을 만드느라 학정이 자심하매 /
상극사배(相剋司配) 선천 운수 갈수록 극렬했네. /
상제님의 신성하신 법력으로 제생의세(濟生醫世) 하신 후로 /
후천 해원 도수 따라 상생 도술이 무궁하리라.(11:313)
 
선천 상극운수를 전제군주 진시황의 독재에 비유한 뒤 후천 선경세계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내용이다.
앞에서 우리는 증산 상제님이 “나는 동정어묵(動靜語?) 하나라도 천지공사가 아님이 없다”(3:18)라고 했을 때,
그것은 고수부님에게도 해당한다고 정의했다.

 

바꾸어 얘기하면 고수부님의 동정어묵 하나라도 천지공사가 아님이 없다고 했을 때,
당신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천지공사 아님이 없다.
따라서 지금 고수부님이 부르는 노래는 곧 천지공사가 된다.


이 사실을 동화교 측 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고수부님의 이와 같은 공사는 동화교 측 신도들에게는 퍽 낯설게 느껴졌는가 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고수부님은 당신을 모시고 온 조종리 성도들과 동화교 간부들에게 명하여 서로 악수하고 즐기게 하였다.
 
 
마침 그날은 동화교가 개교한 지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동화교 측으로서는 동지치성을 자기들이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성영은 후일 고수부님 주재로 봉행하는 동지치성을 ‘동화교 개교 3주년 기념치성’이라는
동화교 중심적인 시각으로 기록하였다.
고수부님의 용화동 도장이 본격적으로 깃발을 올리기도 전에 동화교 측의 ‘속셈’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나 교단을 개창하게 되면 자기 교단이야말로 진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화교 측도 지금까지 같은 주장을 하였으나
‘판’ 밖의 인물인 이상호·성영 형제의 주도로 개교된 교단이 진법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맡은 고수부님을 맞이함으로써 사정은 달라졌다.


동화교 측은 이제 다른 교단을 난법 교단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통성이 확보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고수부님을 모시고자 했던 동화교 측의 노림수였다.
 

그날 치성을 마친 뒤 고수부님은 용화동 도장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고수부님 주재 아래 대교령(大敎領) 한 사람과 부교령(副敎領) 두 사람을 두어 도장을 운영케 하고


대보(大保) 한 사람과 아보(亞保), 찬보(贊保) 각 두 사람씩으로 구성된 보화원(保華院)을 두어 도무(道務)를 돕게 하였다.
곧이어 고수부님은 대교령에는 홍원표(洪元杓), 부교령에는 전준엽과 이성영,
대보에는 이상호, 아보에는 임경호와 고찬홍, 찬보에는 김환(金丸)과 이근목이 각각 선임했다.

 
이로써 고수부님의 용화동 도장이 탄생하였다.
고수부님 개인으로서는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르지 않는 불안한 미래와 함께 일찍이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한테 붙인 ‘크나큰 세 살림’ 가운데 셋째 살림 도장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용화동 도장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고수부님은 좀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용화동 도장이 공식적으로 발족한 뒤 고수부님은 “두어 달 동안 일을 보고 돌아오리라”고 말하고
용화동을 떠나 왕심리 도장으로 가서 머물렀다.

 
 
한 해가 저무는 섣달 그믐날 밤이다. 보천교 신도 4, 5명이 왕심리 도장에 와서 서로 한탄했다.
“해마다 이날 저녁에 상제님의 묘각에 촛불을 켰는데 오늘은 촛불을 켜지 못하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오?” 이용기 성도가 연고를 물었다.
 
“글쎄, 그게 말이요. (증산 상제님 묘각에 근무하는) 묘직원이 파면되고
아직 새 직원이 임명되지 않아 책임자가 없다고 안협뎌. 오늘이 섣달 그믐날인디.”
 
이용기는 무쇠덩어리같이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고수부님 도장에서
둘째 가라고 하면 서러워할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운 성도였다.


보천교 신도들의 얘기를 들은 이용기는 김수열 성도와 함께 그날 밤중으로 도장을 나섰다.
당시 증산 상제님의 성골은 비룡산에 암장되어 있었고 묘각은 진등 마을에 있었다.

칠흑 같은 밤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눈보라가 거칠게 몰아쳤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중도에서 포기할 두 성도가 아니었다.
곧 꺼질 듯 희미한 등불에 기대어 한 걸음, 두 걸음…, 두 성도는 묘각을 향해 더딘 걸음을 옮겼다.
가까스로 묘각에 도착한 두 성도는 얼어 터질 것 같은 손으로 촛불을 켜 놓고 그날 밤중으로 돌아왔다.


 
두 성도가 도장에 도착하였을 때 고수부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성도는 무슨 일이냐는 듯 쭈뼛거리며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너희들, 그곳에 뭐가 있다고…, 개 송장한테 갔다 오냐?” 고수부님이 대뜸 꾸짖었다.
두 성도는 입을 떠억 벌린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고수부님이 혼잣말처럼 한탄했다. “어떤 머슴놈 뼈를 갖다 놓고 너희 아버지라고 하는구나.”
 

한 마디로 증산 상제님의 성골(聖骨)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이 ‘증산 상제님 성골 도굴사건’에 관한 상제한 얘기는 다른 기회에 하자.
개략적으로 소개하면 1921년 3월 정읍군 감곡면 통석리 통사동에 있는 전의 이씨 재실에서
도통 공부를 하던 ‘판’ 밖의 인물 조철제가 증산 상제님의 백골을 모시고 있으면 그 기운이 자기에게 내린다고


생각하여 성골을 도굴해 간 사건이다(10:138).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증산 상제님 성골은 보천교로 귀속되었다.
지금 고수부님의 얘기는 차경석이 극비리에 성골을 비룡산에 숨겨 놓고 묘각에는 어떤 머슴살이하다
죽은 사람의 해골로 바꿔치기하였다는 것이다.
 
 
1932년, 고수부님의 나이 53세가 되는 해였다.
고수부님이 왕심리 도장에서 보천교 신도 구휼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상호·성영 형제의 ‘동화교[고수부님의 용화동 도장이 출범한 이후 ‘동화교’란 표현은 적절치 않다.
고수부님의 용화동 도장의 출범은 곧 동화교의 문 닫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용화동 도장 내에서 그동안 고수부님을 직접 추종해
온 ‘조종리 도장(→ 왕심리 도장)’ 성도들과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편의상 ‘동화교’로 표기한다]’
측에서는 퍽 노심초사(勞心焦思)했던 것 같다.


고수부님이 곧 돌아오겠다고 하고 왕심리 도장으로 갔으나 혹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동화교’ 측은 어떻게 되는가. 허탈한 심정으로 왕심리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터였다.


 
동화교’ 측으로서는 뭔가 성의를 표시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고수부님이 대교령 홍원표에게 “내가 거처할 집을 지으라”고 하였다.
홍 대교령은 사재를 내어 1월 20일경부터 네 칸 전퇴의 기와집을 짓기 시작하여 3월 보름께 낙성하였다.
바로 그날이다. 동화교 측으로서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소식이 왔다.
고수부님이 채유중 성도를 용화동에 보내어 “정읍 일을 다 보았으니 스무날에 돌아가겠다”는 기별을 준 것이다.
 
고수부님이 돌아오겠다고 했던 하루 전날,
그러니까 3월 열아흐렛날 용화동 도장 부교령 이성영이 고수부님을 모시고 가기 위해 왕심리 도장에 왔다.
그날 저녁이다. 이성영과 이용기 성도를 대흥리 보천교 신축 건물들을 향해 세운 고수부님은,

 
“경석이 이제 상제님을 배반하고 수백만 신도의 앞길을 그르치니 어떻게 조처함이 옳겠느냐?”하고 물었다.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身)이라 하였사오니 죽어야 마땅할까 합니다.” 이성영이 대답했다.
“그러하냐.” 고수부님이 또 물었다. “…허면, 수백만 교도의 피를 거두어 지어 놓은 것이
마침내 허사로 돌아가니 어떻게 조처해야 좋겠느냐?”
 
“허사로 돌아갈진대 뜯어버림이 마땅하겠습니다.” 이성영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씩 물어 다짐을 받은 뒤에 고수부님은, “선도 오세(五歲)요 악도 오세니라.”
 
하고 별안간 이성영의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이성영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차경석은 물론 보천교의 운명을 결정짓는 천지공사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이 공사를 행한 5년 뒤인 1936년에 보천교 교주 차경석이 사망하고 십일전을 비롯한

보천교 본소 건물들이 모두 철거된다.
 
 
다음날 고수부님은 이성영의 안내로 이용기, 김수열, 김재윤, 박진호 등 여러 성도들을 데리고 용화동으로 이사했다.
그날부터 고수부님은 며칠 전에 완공한 집에 거처하며 공사를 행하고 용화동 도장 살림을 주재하였다.
 

그러나 고수부님의 용화동 셋째 살림 도장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고수부님을 추종해 온 조종리 도장 성도들과 판 밖의 집단 ‘동화교’ 성도들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같은 증산 상제님을 신앙하였으나 조종리 성도들은 종통대권자 고수부님으로부터
직접 신도세례를 받아온 반면 아직 유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판 밖의 인물
이상호·성영 형제가 주도해 온 ‘동화교’ 측 성도들은 태생적으로 맞을 수가 없었다.
갈등은 곳곳에서 표면화되었다.


 
같은 달 21일 고수부님은 부교령 이성영을 불러들여 며칠 동안 공사를 행하였다.
용화동 도장 부교령이라면 핵심간부이지만 이성영은 천지공사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왕심리에서 차경석과 보천교 운명을 결정짓는 공사를 행하였을 때
고수부님에게 갑자기 걷어차여 엎어진 일도 아직 유학자로서 선비의 테를 벗지 못하는
이성영으로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그러하였으니 공사에 참여하는 것이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영은 공사 도중에 도망을 갈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았다.

 
고수부님은 이성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예 곁에 앉혀놓고 하루 종일 놓아주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을 때 고수부님은,
 
“오늘 저녁에 나하고 같이 있자”고 하였다. 이성영으로서는 죽을 지경이었다.
고수부님이 아무리 용화동 도장 최고 지도자라고 해도 아직 유교질서의 테를 벗지 못한
이성영에게는 한낱 ‘여성’으로 보였는지 몰랐다. 민망한 일이었으나 지엄한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조심스럽게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밤에 고수부님은 또 같이 보내자고 하였다. 연유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고수부님과 같은 방에서 지낸 지 나흘째 되는 날 24일 새벽,
고수부님이 잠깐 잠을 자고 있는 틈을 타서 방을 빠져 나온 이성영은 전주로 줄행랑을 쳤다.
잠을 깨고 일어난 고수부님은 옆에 있어야 할 이성영이 보이지 않으므로 크게 걱정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용기 성도가 달려왔다.

 
“제 놈이 가봐야 거기서 거기지. 이미 올가미에 옭혔으니 제 아무리 달아나려 하여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성영은 물오리라. 사면팔방으로 날아다녀도 앉는 곳마다 물이니라.” 고수부님이 말했다.

 
이 공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고수부님이 이성영을 데리고 잠을 잔 것은 그에게 기운을 붙여 주기 위한 공사로 해석된다.
이성영은 고수부님이 선화한 이후에 그것을 깨닫고 ‘나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나는 그저 모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때는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며
뼈저린 후회를 했다(이성영의 부인 장옥 증언)고 한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대보 이상호를 만날 때마다
“상호, 저 도둑놈, 역적놈! 저놈이 내 일을 망쳐 놓는다”하고 꾸짖곤 하였다.
그날도 고수부님은 이상호를 보고 “저 도둑놈, 역적놈!”하고 호통을 쳤다.
 
그날은 이상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가 무슨 도둑질을 했습니까?” 이상호가 덤벼들 듯이 말했다.
 
고수부님이 신도가 내린 음성으로 “뭐라구. 네 이놈!”하고 호령하며 담뱃대를 휘둘렀다.
그제야 이상호는 줄행랑을 쳤다.


고수부님은 아예 이상호에게 자신이 거처하는 방문 앞을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간혹 이상호가 앞을 지나가면 “저기 어떤 놈이 지나가느냐!”하고 불벼락을 내렸다.

고수부님은 왜 갑자기 대보 이상호를 경계하였을까.

 그것은 그가 상제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상제님에서 태모님으로,
다시 추수 도운의 마무리 인사 대권자로 이어지는 구원의 종통맥을 왜곡, 날조하여
장차 수많은 난법자가 양산될 것을 내다보고 경계하는 공사로 해석된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화장실에 가다가 이마를 부딪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에 깨어난 고수부님은 “사람 같은 놈이 있느냐.
저 살기, 저놈의 살기!”하고 허공을 향해 부르짖는 듯 꾸짖는 듯 호통을 쳤다.

 
며칠 뒤 고수부님은 방문을 열고 부엌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문턱에 가슴을 찧고 또 기절했다.
이용기 성도의 아내 정아옥(鄭阿玉, 1909~1972)이 보고 당황하여
“어머니가 왜 저러시죠?”하고 옆에 있는 전대윤 성도에게 물었다.
항상 주문을 읽고 다니고 죽은 사람도 살려낼 정도로 신도가 열린 전대윤이 신안을 통해 보고
“아버지가 탁 치시더만”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물론 증산 상제님을 가리킨다.
 
어머니의 삶이란 그런 것일까.
잠시 후에 깨어나 일어난 고수부님은 “이 세상에 옳은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살려야지요”하고 안타까운 듯 혼잣말로 말했다.
여기서 ‘그래도 살려야’ 한다는 것은 신도로 볼 때 이상호·성영 형제뿐만 아니라
 난법난도자(亂法亂道者)는 모두 죽을 죄인이지만 고수부님이 애정으로 감싸 주는 것이다.


 
용화동 도장시절 고수부님의 뒷수발을 드는 소임은 전대윤 성도가 맡았다.
고수부님은 밥상과 요강 심부름은 물론 일체의 수종을 전 성도에게만 들게 하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전대윤은 72세요 고수부님은 53세, 열아홉 살의 나이 차이가 났으나 전 성도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시중을 들었다.
 
전대윤 성도가 누구인가.
고수부님의 대흥리 도장시절부터 신앙한 전 성도는 간부급 성도 중의 한 명이었다.
김수남, 김수응 성도가 그의 아들이고 전준엽은 김수남의 처남이다.


그러니까 증산 도문에서 전대윤 일가는

고수부님 도장에서 신앙경력은 물론 신앙생활 태도 등에서 한 전범이 된다.


전대윤은 고수부님 도장에서 신앙한 이후 신도가 내려 때로는
고수부님을 대신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치병을 맡을 정도로 치병에 능할 뿐 아니라

미래사를 예지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문제는 전대윤 성도를 대하는 고수부님의 태도였다.
고수부님은 웬일인지 전 성도를 볼 때마다 “이년! 이년”하고 구박이 심했다.
심지어는 머리채를 잡아끌기도 했다(이우인씨 증언. 2003.6.19.).
어느 때는 전 성도로 하여금 백발을 산발한 채 대막대기를 잡고 상주 노릇을 하라고 하는가
하면 또 어느 때는 고수부님이 다리를 벌리고 앉아 전 성도의 머리를 처박아 놓고 벌을 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성도는 불평은 커녕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고수부님을 극진하게 모셨다.
불편하게 생각한 것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신도들이었다.
특히 신도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화교’ 측 신도들이 그랬다.


 
대보 이상호의 아내가 나섰다. 그녀는 종종 전 성도에게 “대윤 형님!
그렇게 고초를 겪지 말고 아드님한테 도망을 가시오”하고 부추겼다.
전 성도는 들은 척도 않고 고수부님 곁에서 계속 시중을 들었다.
 
이상호의 아내가 태인에 사는 전 성도의 큰아들 김수응 성도에게 사람을 보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의 신도세계를 알고 있는 김수응은 어머니를 모셔가지 않았다.
이상호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대윤의 손자 김준익에게 “할머니가 여기 있으면 꼴이 영 말이 아니니 어서 집으로 모셔 가라”고 설득하였다.
내막을 듣게 된 김준익이 할머니를 모셔 가기 위해 용화동에 왔다.


하필이면 김준익이 도장에 나타났을 때 고수부님은 전대윤을 향해 “이년, 저년…”하며 꾸짖고 있는 중이었다.
김준익이 불평을 하며 할머니를 강제로 모시고 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전대윤 성도가 태인으로 돌아간 지 얼마 후에 작은아들 김수남 성도가 사망했다.
전대윤 성도 역시 일 년 뒤에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몇 년 후에는 전 성도의 남편 김두옥과 큰아들 수응도 차례로 사망했다.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대저 태모님께서 대윤을 심하게 구박하심은 그 죄업을 벗기어 목숨을 건져 주시고자 함이거늘
상호의 아내가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뒷날
상호의 아내가 수없이 뉘우쳐 말하기를 “내가 신인(神人)의 세계를 모르고 사모님과
대윤 형님의 천륜(天倫)을 끊었으니 이제 와서 죄가 된다.” 하니라.(11:325)


 
잠시 용화동 도장 초기에 고수부님을 중심으로 도장을 운영했던 조직을 보자.
내무는 고민환, 김수열, 이용기 성도가 맡았다. 전대윤 성도가 고수부님의 시중을 들었고,
정아옥 성도가 부엌일을 하며 고수부님을 함께 모셨다.
결국 고수부님 주위를 ‘조종리 도장’ 신도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동화교’ 측에서는 그것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용화동 도장이 삐걱거리는 것은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대보 이상호를 주축으로 한 ‘동화교’ 측 간부들은 드러내놓고 고수부님을 배척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누구보다도 이상호가 그랬다.


굳이 비교한다면 이상호는 고수부님의 첫째 살림인 대흥리 도장 시절 차경석,
둘째 살림인 조종리 도장 시절 진주 강씨 신도들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까.

 
아직까지는 간부급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조종리 도장’ 측과 ‘동화교’ 측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표면화되었다.
갈등은 곧 폭발직전에 이르렀다. 몇몇 뜻있는 성도들은 용화동 도장의 앞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려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조종리’ 측 간부신도였던 김수열과 전선필 성도가 이상호 대보를 불량한 자라 여기고 용화동 도장을 떠나버렸다.
도장을 떠났다는 것은 당장에는 ‘고수부님’ 곁을 떠났다는 얘기다.


김수열, 전선필 성도가 누구인가. 조종리 도장의 대들보와 같은 성도들이다.
증산 도문에서 ‘고수부님’을 떠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터이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고수부님 도장의 버팀목이었던 성도들이 하나둘씩 떠났다는 것은 고수부님이 점점 고립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와 같은 결과는 고수부님의 행동반경을 더욱 좁히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고수부님으로서는 ‘조종리’ 측 신도,
그 중에서도 수석성도 고민환과 그 밖의 몇몇 성도밖에 믿을 만한 신도가 없었다.
고수부님은 아예 고민환을 옆방에 거처하게 하고 모든 일을 상의하여 처리했다.

 
일은 계속 꼬였다. 이번에는 대보 이상호를 비롯한 ‘동화교’ 측에서 고수부님의 처사에 불평을 드러냈다.
이상호는 마침내 고민환을 해치려는 계획을 꾸몄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다던가.
고수부님의 생애란 그렇게 영욕으로 얼룩진 삶이다.


첫째, 둘째 살림 도장에 이어 셋째 살림 도장에서도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수석성도 고민환도 마찬가지였다.


조종리 도장에서도 음해의 표적이 되어

고향 옥구로 도망쳤던 고민환이 용화동 도장에 와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은 이상호 측의 음모를 알고 고민환으로 하여금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것으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민환이 작금의 현실을 모를 리 만무하였다. 고민환은 탄식하였다.
“슬프도다! 교인들이 어머님의 신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허례를 일삼으며
또한 생명을 다루는 도업을 앞에 두고 장난삼아 망동하니
어찌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천하사 일꾼의 자세라 할 수 있으리오.”

 
고민환은 의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용화동 도장 출범 이후 떨어져 나간 신도들을 모아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다른 방도를 찾으리라’고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이상호의 위해가 두렵기도 하여 밤중에 도장을 나와 고향 옥구로 도망을 쳤다.
조종리 도장 시절 말기에 이은 두 번째 도망 길이었다. 고수부님을 모시는 길은 그렇게 험난하기만 하였다.
 
이로부터 민환이 이전에 신앙하던 신도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교단 재건립 운동을 추진하니
옥구군 옥산면 남내리(玉山面 南內里) 지재 마을 문영희(文榮喜)의 집에 임시

연락처를 정하고 도체(道體) 조직을 서두르니라.(11:327)

 
 
제32장 서신사명 수부사명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道典 11:365:3)
 
1933년이다. 그해 1월 독일에서 나치정권이 수립되었다.
세계 정국은, 증산 상제님이 ‘총각판 도수’로 짜놓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점점 막다른 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용화동 도장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해 6월 증산 상제님 어천치성을 앞두고 대교령 홍원표가 사임했다.
비록 실권 없는 대교령이었다고 해도 공식적인 조직표상에서 최고위에 있었던 그가 사임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도장의 내분 때문이지 않았을까.
고수부님은 부교령 이성영으로 하여금 대교령의 직권을 대행케 하였다.
이성영은 지난 3월 21일 공사 중에 전주로 도망을 간 이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6월 24일 증산 상제님 어천치성을 올렸다.
치성이 끝난 뒤 고수부님은 성도 수십 명을 벌여 앉히고 ‘진액주’를 한 시간 동안 읽게 하였다.
주문이 끝난 뒤에 박종오 성도에게 “지필(紙筆)을 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구천지 상극 대원대한(舊天地 相剋 大寃大恨) 신천지 상생 대자대비(新天地 相生 大慈大悲)’를 쓰라고 하였다.

 
박종오가 붓을 놓았을 때 고수부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뒤를 따르게 하여
왼쪽으로 열다섯 번을 돌며 ‘구천지 상극 대원대한’을, 오른쪽으로 열다섯 번 돌며 ‘신천지 상생 대자대비’를,
그리고 ‘서신사명(西神司命) 수부사명(首婦司命)’이라고 열여섯 번을 읽으라고 하였다.


 
고수부님이 마지막으로 읽으라고 한 ‘서신사명 수부사명’에서 ‘서신사명’은 증산 상제님,
‘수부사명’은 고수부님을 가리킨다.
조금 구체적으로 전자는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이 우주정신의 결실기에
인간으로 강세하여 대개벽의 통일 세계를 열어 주는 것을 일컫는다.

‘수부사명’ 역시 같은 논리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하였을 때,
전체적인 공사는 다음과 같이 독해할 수 있지 않을까.

 
문맥에 드러나는 그대로 이 공사는 크게는 천지의 판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사의 문맥은 이항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천지/신천지, 상극/상생, 대원대한/대자대비가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인간으로 왔고,
전자에서 후자로 가는 천지공사를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태모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통해 평천하를 이루시고
‘수부 도수(首婦度數)로 천하 만민을 살리는 종통대권(宗統大權)은 나의 수부,
너희들의 어머니에게 맡긴다.’고 말씀하셨느니라.” 하시니라.(11:345)
 
앞의 공사(‘서신사명 수부사명’)와 연결되어 있는 이 공사에서
고수부님이 자기에게 전해진 종통대권을 재확인하고 있다. 고수부님은 왜 이 시점에서 이 공사를 행하였을까.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도장의 내분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가는 가운데
수석성도 고민환이 피신을 하였고 대교령까지 사임하는 터였으므로 당신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이 가고 8월이 되었다.
바람결에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대교령(대행) 이성영이 돌아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지난 3월 공사 중에 도망을 쳤던 이성영은 그 해 4월부터 조학구, 박붕식(朴鵬植),
정태환(鄭台煥)과 여신도 김정렬(金貞烈)을 데리고 전주 완산정(完山町)에 있는
보천교 교당에 머물며 포교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8월 10일경에 조병관(趙秉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경영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더 이상 일을 진척시킬 수 없게 된
이성영은 포교 활동을 중지하고 김정렬 등을 데리고 용화동 도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큰 재앙이 네 몸에 미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니라.”
고수부님은 이성영이 3월 공사를 끝내지 않고 달아난 것을 꾸짖으며 회초리로 종아리를 쳤다.
이후에도 고수부님은 이성영을 볼 때마다 자주 회초리를 휘둘렀다.
이성영이 대교령 대행 업무를 맡았으나 용화동 도장의 내분은 끊이지 않았다.

 
내분의 씨앗은 대보 이상호와 대교령 이성영을 비롯한
‘동화교’ 측 신도들이 신도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습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고수부님이 이상호·성영 형제의 심법을 들여다보고
신도가 내릴 때마다 “이놈, 저놈” 하며 담뱃대로 때리는 것도 여전하였다.
두 사람은 맞는 것이 두렵고 체면도 손상되었으므로 아예 고수부님을 피해 다녔다.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면서 고수부님은 “못난 놈들이 못난 짓거리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상호·성영 형제로서는 고수부님을 모시는 것보다 과거 ‘(여우)왕 노릇’할 때가 그리워졌던 것 같다.
원래 의도와는 달리 막상 고수부님을 모시고 보니까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고수부님이 신도로써 행하는 천지공사의 진행 과정을 무당 짓으로 여겼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그것은 고수부님(나아가서 그들의 신앙대상인 증산 상제님까지도)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신도세계는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을 얘기할 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과연 신도를 걷어낸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세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없다. 없다. 없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 자체가 신도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이상호·성영 형제가 유교의 테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두 사람은 고수부님이 행하는 천지공사 현장을 보고 “도대체 저런 경우가 어디 있냐?
저런 모습이 외부에 알려지면 교단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하여 아예 고수부님 행동반경과 출입을 제한하였다.

 
증산 상제님이 짜놓은 도수는 그렇게 한 치 어긋남이 없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고수부님이 자신에게 맡겨진 ‘크나큰 세 살림’ 도수대로 종교적 삶을 살아온 것이 그랬고,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 맡겨진 도의 험난함을 예고했듯이 과연 고수부님의 종교적 삶이 험난한 것도 그랬다.


대흥리 첫째 도장 살림 때도,
조종리 둘째 도장 살림 때도 믿었던 성도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감금당하다시피 생활했었다.
그리고 용화동 셋째 도장 살림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이 금구[용화동]로 가면 몸이 부서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미 얘기하였다.

과연 그랬다. 대흥리 도장시절에도, 조종리 도장시절에도 그랬듯이 용화동 도장시절에도
또다시 이상호·성영 형제로부터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천하창생의 죄를 대속하는 ‘만백성의 어머니’ 고수부님의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도장 운영에도 곳곳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당초 ‘조종리’와 ‘동화교’ 측
신도들의 의식이 달랐으므로 교리 해석과 도장 운영의 규칙이 서로 맞지 않았다.
일반 사회의 어느 집단안의 일이라면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해서 타협점을 찾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 단체에서, 그것도 종통대권자가 있는 단체에서 그것은 달랐다.

종통대권자는 곧 그 단체에서 진리의 주인이요, 진리의 기준이 된다.
모든 기준, 초점은 그에게 맞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용화동 도장의 비극이었고,
그것을 온 몸으로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최고 지도자인 고수부님이었다.

 

동화교’ 측 신도들의 텃세도 점점 심해갔다.
그들은 ‘조종리’ 측 신도들을 용화동으로 날아온 ‘신앙’철새 정도로 생각하는 본새였다.
날이 갈수록 용화동 측 신도들은 무례한 언사와 불의한 언사로 분잡을 일으켰다.


‘조종리’ 측 신도들로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장 핵심간부였던 김수열, 전선필, 고민환 성도들에 이어 다른 신도들도 하나 둘씩 용화동 도장을 떠나갔다.
한번 터진 둑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침내 ‘조종리’ 측 신도들이 모두 떠나고 용화동 도장은 쇠퇴하여 사람의
그림자마저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고수부님은 당신의 운명과도 같이 다시 절해고도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조종리 측 신도―특히 임옥 신도들은 고수부님의 수족과 같았다.
그들은 신도 세계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치성 때면 누가 시킬 것도 없이 대소사를 전담하고
공사에 잘 수종하며 뒷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랬으므로 고수부님은 항상 “임옥 신도가 내 자손이니,
보리밥일 지경이라도 임옥 자손을 데리고 모든 일을 처리하리라”고 입버릇처럼 뇌곤 하였다.
그런 알토란같은 신도들이 발길을 뚝 끊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고수부님 주위에는 바람과 고요만이 찾아와 머물다 가곤 할 뿐이었다.
 

옥구 신도 문명수와 이중진 성도가 고수부님을 찾아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두 성도로부터 인사를 받은 고수부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지치성은 오성산에 가서 봉행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했다. 그들이 일어서려고 할 때 고수부님은,
 
“오성산 도장을 속히 완공하라.”
재촉하였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이미 용화동 도장을 떠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 같다.
 
옥구로 돌아간 두 성도는 고민환을 비롯한 임옥 신도들에게 고수부님의 당부를 전했다.
문제는 도장 신축경비였다. 이때 이진묵 성도가 나섰다.


자신의 집을 팔아 건축 비용을 담당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오성산 도장 신축공사가 재개되었으나 동지절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고민환과 옥구 신도들은 신축공사 중인 도장 건물에 큰 방 하나를 먼저 정리하여 고수부님을 모실 준비를 갖추었다.

 

오성산 도장’에 대해서도 조종리 측과 동화교 측은 시각차가 보인다.
당시 대교령 직무대행이었던 이성영은 후일 오성산 도장을 ‘오성산 동화교 수양소(東華敎修養所)’로 기록하였다.

오성산 도장을 용화동 동화교의 한 분파 정도로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고민환 성도의 며느리 김순자 씨의 증언은 이성영의 그러한 주장을 강하게 반박한다.
“그것은 자기네(동화교) 식으로 꾸며 써 놓은 것이다.
오성산 도장은 태모님의 명령에 의해 아버님(고민환)이 옥구의 신도들과 상의해서
지은 것이지 용화동 동화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수부님이 셋째 살림 용화동 도장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결국 고수부님의 셋째 살림 도장 또한 첫째, 둘째 살림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를 추종했던 핵심간부들의 배신으로
끝내 막을 내리게 되는가 보았다.
용화동을 떠나기 며칠 전에 고수부님은 ‘용봉(龍鳳)’을 그려 깃대에 매달아 놓고 대보 이상호를 불렀다.


고수부님이 용봉기(龍鳳旗)를 꽂아놓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용화동 도장으로 옮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용봉기를 꽂아놓고 공사를 행하였다.
그날 용봉기를 꽂아두고 이상호를 부른 고수부님의 표정은 다른 날과는 달랐던 것 같다. 비장감이 흘렀다고 할까.

 
대보 이상호가 나타났을 때
고수부님은 “상호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하고
다시 “용봉기를 꼭 꽂아 두어야 한다, 상호야”하며 다짐을 받았다.

 
그해 동짓달 초닷샛날―. 고수부님이 ‘크나큰 세 살림’의 파란곡절을 뒤로하고 용화동 도장을 떠나는 날이다.
고수부님은 “상호야! 저기다가 건곤사당(乾坤祠堂)을 짓겠느냐?”하고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이 물었다. 이상호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고수부님이 담뱃대로 머리통을 후려치시며 “이놈아! 빨리 대답해라”고 재촉하였다.
이상호가 엉겁결에 “예, 짓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제야 고수부님은 “암, 그래야지”하고 대교령 이성영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고수부님은 이성영을 증산 상제님 어진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한 뒤
증산 상제님 어진 개사(改寫)와 저술, 도장 건축 등 뒷일에 대하여 낱낱이 세 번씩 다짐을 받았다.
 
“네가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
 
그래도 내키지 않았는지 고수부님은 다시 “그것이 무슨 집인지 아느냐?”하고 물었다.
이성영이 우물쭈물하였다. 고수부님은 “어진을 잘 받들라, 알겠냐!
단주수명…”하고 계속 얘기하는데 이성영이 말이 끝난 줄 알고 건성으로 “예, 예!”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고수부님이 역정을 내며 “이놈이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말뚝마냥 대답만 하는구나”하고 담뱃대로 머리를 딱 때렸다.

 
고수부님은 혼잣말로 “영사(靈砂), 주사(朱砂)…” 하며 두 손가락을 펴보였다.
고수부님의 이 공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후천 가을 대개벽때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잠시 후 고수부님은 자신이 거처하던 집을 그냥 남겨두고 용화동을 떠났다.
원도 많고 한도 많은 일생을 접어두고
동짓달 찬 서북풍을 온 몸으로 맞으며 고수부님은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용화동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이 향하는 곳은 옥구 오성산이다.
1926년에 공사를 행하며 거미를 비유로 얘기했던 일이 응험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당시 고수부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용화동을 나온 고수부님은 옥구 오성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 고수부님이 어느 역에서 출발하여 어느 역에서 내렸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기
차운행이 가능한 거리는 기차를 이용하였을 것이다(용화동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역은 김제역,
그리고 옥구 오성산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개정역이다.

 

혹은 군산역을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용화동에서 김제역이거나 혹은 다른 아무개 역까지,
그리고 군산역이거나 개정역 혹은 아무개 역에서 오성산까지 고수부님은 걸어서 갔을 것이다.
드넓은 징게맹경 평야에서 밤새 기다렸다는 듯 동짓달 찬바람이 휘몰아치는데
한 많은 ‘우리들의 어머니’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짜두었던 ‘크나큰 세 살림’ 도장을 마감하고 저리 힘겹게 가고 있구나.

 
목에 걸친 명주수건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펄럭인다.
고수부님은 항상 다섯 자 되는 명주수건을 목에 걸치고 있었는데 이 수건을 신도들은 ‘손님수건’이라고 불렀다.
그 수건으로 스쳐만 주어도 모든 신병이 완쾌되고 또 병 없는 자는 식록이 넉넉해졌으므로
누구라도 손님수건으로 한번 쓸어 주시기를 소원하였다.

 

바로 그 명주수건을 다시 고쳐 두르고 온통 망가진 몸을 이끌고 고수부님이 가고 있다.
멀리 동북쪽 검은 하늘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오성산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천 근 바위덩어리같이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어머니가, 우리들의 어머니가. 엄동설한풍이다. 온 몸을 바늘 끝으로 지르는 듯 한기가 느껴졌을 터이다.

 
가네. 가네. 고수부님. 고수부님이 가네.
매운 땀과 눈물, 피 흘리며 온갖 궂은 일 마다 않고 자식 키우는 일에 인생을 바쳤던 어머니,
결국 당신이 키운 자식들한테 버림받고 저기, 저기에 우리들의 어머니가 가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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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9.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