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제10회] 거룩한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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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9장 도통(道通)을 지극히 원하느냐?”
 
 “도통을 원치 말라. 모르고 짓는 죄는 천지에서 용서를 하되
알고 짓는 죄는 천지에서 용서하지 않나니 도통을 가지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느니라.” (道典 11:284:4)
 
 내가 모악산 금산사 초입에 위치한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을 답사한 것은
아마 열 손가락을 모두 꼽아도 모자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그때부터 금산사에 들락거렸고, 그 곳에 가려면 용화동을 거쳐야 했던 까닭이다.
물론 스쳐 지나간 것과 답사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답사를 했다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용화동은 재미있는 곳이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용화동만큼 재미있는 곳을 보지 못했다. 용화동에 가면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는 문패를 보라. 문패 대신 낯선 신종교 종파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다.

십중팔구는 ‘대한○○교 총본부’라는 거창한 한 종파의 본부다.
아무리 보아도 시골 농가주택으로 보이는 ‘새마을’ 주택도, 돌담장 너머로 다 쓰러져 가는 한 칸 오두막도….
 
 우리나라 신종교의 메카를 꼽으라면 모악산과 계룡산이라는 데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다.
이곳 모악산 용화동은 골짜기 두어 개 너머 백운동과 함께 모악산을 대표하는 신종교의 메카―.
충청도 계룡산도 마찬가지다. 계룡산 아래 신도안이 바로 용화동과 같은 곳이었다.

오늘날 신도안은 계룡대(육군본부)를 비롯한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계룡시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신종교인들은 대부분 떠났다.
그런 사정과 비교하면 용화동은 조금 나은 편이라고 할까.
 
 모악산 아래 용화동―.
바로 이곳이 고수부님의 큰 세 살림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 도장 살림이 차려졌던 ‘용화동 도장’ 터.
내가 본격적으로 고수부님 유적지를 답사하려고 마음먹고 용화동을 찾았던 것은 2000년 6월 3일이었다.
 
 본격적인 논의 전개과정에서 살펴보겠지만,
고수부님이 용화동 도장 대교령 홍원표에게 집을 지으라고 하여 완공한 것은 1932년이었다.
금산여관 맞은편 팔각정 자리가 용화동 도장 바로 그곳이다.
 
 결국 당시 용화동 도장 건물은 터만 남은 셈이다. 용화동 도장을 답사하면서
나는 문득 려말선초의 성리학자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시조 한 수가 떠올랐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러나 내가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때마다 느낌은 인걸뿐만 아니라 산천도 의구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시조 구절이 처음부터 잘못되지 않았을까.
인걸이 간 데 없는데 그 산천이 어찌 의구하겠는가.
인걸이 없는 그 산천은 이미 다른 산천이다.
한 공간을 살아가던 존재들이 사라지면 그 공간은 사라지는 법이다(황인숙 외, ‘나만의 공간’).
왜 아니 그러겠는가.


 
 용화동을 답사한 뒤 나는 마을앞 도로 건너 맞은편 언덕으로 향했다.
몇 십 계단을 밝고 올라가니 거대하게 잘 조성된 묘소 한 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고수부님이 묻힌 묘소라고들 한다. 솔직히 답사계획에도 없었던 곳이다.
나는 묘소 앞에 서서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묘소를 등지고 돌아서면 용화동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내 눈길은 저녁연기가 몽그작몽그작 피어오르는 용화동 위에서 안개처럼 뿌옇게 어른거렸다.


 
 아. 바로 이곳에서 고수부님은 다시 한 번 배반의 쓴 잔을 맞보게 된다.
고수부님이 왕심리 도장에 있을 때,
이미 동화교를 만들어 놓고 정통성 확보와 교세확장을 위해 왕심리 도장을 문턱이 닳도록 찾아와
고수부님을 모시고자 했던 이상호·성영 형제를 비롯한
(동화교) 간부들은 고수부님이 용화동으로 이거한 직후 곧 배반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고수부님이 인간세상에서 마지막 들이키는 배반의 잔이었다.
 
 이상호·성영 형제들로부터 철저한 배반을 당하였을 때 고수부님은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미련이 없는 듯 보였다.
육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고수부님은 곧 쓰러질 듯 피골이 상접한 몸을 이끌고 용화동을 떠나게 된다.
 
 용화동에서 시린 눈길을 거두어들인 나는 ‘고수부님의 묘소’ 앞에 참배를 하고 돌아섰다.
묘소 앞 계단을 내려오면서 왠지 일행의 분위기가 서먹하였다.
유적지가 바뀔 때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안내를 했던 가이드도 입을 꾹 다물었다.
가이드뿐만 아니라 일행이 그랬다. 용화동을 뒤로 하고 원평으로 향할 때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
묘지의 주인이 진짜 고수부님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결국 그랬단 말인가. 참으로 모진 삶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자.


 
 
 고수부님은 여전히 바빴다. 특히 ‘어머니’로서 끝없는 사랑을 베푸는 공사가 많았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1930년 정월에 박종호의 열병, 김상윤(金相允)의 딸의 독종(毒腫)을 낫게 했다.
3월에는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했던 전춘옥을 낫게 하고 유일태의 노증(怒症)을 고쳐 주었다.
또 호열자에 걸린 이근목의 아들을 낫게 하고 조종리 강원섭의 자손 줄을 태워주기도 했다.
 
 “너희들, 도통(道通)을 지극히 원하느냐?” 고수부님이 성도들에게 물었다.
 
 “원이옵니다.”
 
 “격물(格物)이 곧 도통이니라.” 고수부님은 계속 말한다.
“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관통(貫通)하는 것이니,
관통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닦아 심통(心通)을 해야 하느니라.”


 
 고수부님의 입에서 ‘말씀’이 우박처럼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도통을 원치 말라. 모르고 짓는 죄는 천지에서 용서를 하되 알고 짓는 죄는 천지에서 용서하지 않나니
도통을 가지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느니라.
도통과 조화와 법술을 가졌다 하나 시대를 만나지 못하면 쓸모가 없나니 다 허망한 것이니라.
그 동안 도통을 해서 한 번이라도 써먹은 놈이 있더냐. 도리어 자신에게 해(害)가 미치느니라.”

 
 
 고수부님 도장을 다니면서 성도들은 평소 ‘의통’을 지극히 원했다. 원래 ‘의통’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의(醫)를 통(通)한다는 뜻과 전 세계 3년 병겁 심판에 인간 역사를 통일[統]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고수부님은 의통을 원하는 성도들에게 “마음을 고쳐야 의통이 오지,
너희 아버지가 의통 준다고 다 줄 것 같으냐.” 하고 꾸짖었다.
 
 “의통, 신통, 관통을 해야 하나니 그것도 때가 있느니라.”
그것은 평소 고수부님이 했던 말씀 그대로이다. “마음을 고쳐야 한다.
마음을 고치면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마음을 고치려면 선덕(善德)이 있어야 하고 선덕이 있어야 활연관통(豁然貫通)이 되느니라.”
 
 

그날 고수부님은 도통(道通)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신인합발(神人合發)이라야 하나니 신통해서 신명 기운을 받아야 의통이 열리느니라.
의통을 하려면 활연관통을 해야 하고,
활연관통에 신통을 해야 도통이 되느니라. 도도통이 활연관통에 있느니라.”
 
 
 

그날 공사에서 고수부님은 좀 복잡한 듯 보이는 ‘통(通)’에 대한 공사를 행하였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도문에서 공부(수련)를 통해 지향하는 ‘통(通)’의 단계는 여섯 가지가 있다.
이를 보통 ‘육통(六通)’이라고 한다.
 
 첫째, 이통(理通)이다. 사물의 이치를 통한다는 얘기다.
곧 유가에서 얘기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관통하는 것이 곧 이통이다.
 
 ‘격물’은 곧 ‘격물치지’의 줄임말로서 문자 그대로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한다는 뜻이다.
『대학』의 8조목 격물·치지·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서 가장 철학적인 조목.
 
 고수부님은 ‘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관통하는 것으로서 관통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닦아 심통을 해야 한다’고 했다.
 6통의 두 번째 단계는 심통(心通)이다.
‘심통’에 대해서는 고수부님이 자주 강조해 온 터이므로 더 이상의 애기는 생략한다.
한 가지 지적한다면 불가의 최종목적이 심통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기통(氣通)이다.
증산 상제님이 “내가 주재하는 천지 사계절 변화의 근본 기강은 기(氣)로 주장하느니라.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대도술이니라”(6:124)고 했을 때, 그것은 ‘기통’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신통(神通)이다. 신도세계를 통한다는 얘기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행하는 천지공사는 곧
신도 차원의 행위라는 것은 누차 지적한 바와 같다. 다시 말하면 신통이 전제된 행위이다.
 
 다섯째, 의통이다. 여기서 ‘의통(醫統)’과 ‘의통(醫通)’ 개념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적하였다.
전자는 후천개벽의 대환란기 병겁심판 때
증산 상제님이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그의 대행자 대두목에게 전수한 인류구원의 법방(法方)을 가리킨다.
어천 직전에 박공우 성도에게 전한 것이 바로 의통(醫統)이다.
 
 후자는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고수부님이 펼친 많은 ‘(병자)치유’ 공사의 바탕이 되는 그것이다.
1928년 중풍이 들어 9년 동안 자리에 누워있는 익산군 용안면 중신리(龍安面 中新里)에 사는
여신도 김순화(金順華)를 치료하기 위해 고수부님이
고찬홍 성도에게 ‘의통(醫通)의 신비한 묘력(妙力)을 붙여 주었던’(11:195) 바로 그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구릿골 약방을 개설한 뒤 “병이 들어 죽게 된 놈 병만 낫게 해 주면 그만이지.
만법 가운데 의통법(醫通法)이 제일이로구나!”(5:242)고 하였다.
 
 6통 가운데 마지막 여섯 번째는 도통이다. ‘도통’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도통을 원치 말라. (…) 그 동안 도통을 해서 한 번이라도 써먹은 놈이 있더냐.
도리어 자신에게 해가 미치느니라’고 한 고수부님의 경계의 말을 명심하자.

 

 
 
 제30장 도덕가
 
 “좋을씨구 좋을씨구 우리 시절 좋을씨구. 미륵존불 때가 와서 우리 시절 좋을씨구.” (道典 11:309:7)
 
 천지의 부모님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증산 상제님도 그랬으나 고수부님의 대속(代贖) 공사만큼 ‘인류의 어머니’
사랑을 그대로 전해주는 공사도 또 없을 터였다. 1930년 그해, 고수부님은 또 한 차례 대속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세상 인류가 죄 없는 사람이 없나니 대죄(大罪)는 천지에서도 용서치 않으므로
불원간 제 몸으로 받으나 소소한 죄는 차차로 전하여져 그 과보(果報)가 자손에게까지 미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죄를 대신하여 받아 없애리라.”
 
 인류의 죄업을 대속하는 공사다.
고수부님은 바둑판 위에 청수를 올려놓은 다음 성도들에게 ‘오주’를 읽게 하였다.
잠시 후 고수부님은 문득 혼몽하여 호흡이 통하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난 뒤에 고수부님은 깨어났다.
 
 “세상일이 이와 같이 복잡하도다.” 고수부님이 말했다.
 
 이 공사 이후 고수부님은 별다른 공사를 행하지 않고 지냈다.
금산면 용화동 이상호 교단에서 고수부님을 찾아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상호 교단에서는 고수부님을 용화동에서 시봉하기를 간청하였다.
이미 용화동에 동화교(東華敎)를 설립하고 통정(統正)이 된 이상호가 고수부님을 모시려고 한 의도는 그러하였다.


이상호는 증산 상제님의 행적을 담은 최초의 경전기록 『대순전경』을 편찬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 붙여 놓은) ‘세 살림 도수’를 알게 되었다.
보천교 간부출신인 이상호는 증산 상제님을 직접 모신 적이 없었던 이른바

‘판’(여기서는 ‘증산 상제님을 직접 추종한 성도’와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종통대권을 받은 후계자’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밖의 인물이다.
『대순전경』을 간행하고 동화교를 설립하기는 하였으나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상호 교단에서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수부님을 모시려고 한 것이다.

 

 
 “상제님 말씀에도 ‘네가 정읍에 있으면 몸이 클 것이요, 금구로 가면 몸이 부서진다.’ 하셨느니라.”
고수부님은 한 마디로 잘라서 거절했다.
 
 고수부님의 ‘말씀’은 물론 증산 상제님이 당신에게 붙인 공사 말씀이다(6:67).
‘금구’는 고수부님 셋째 살림의 터전인 ‘용화동’을 말씀하신 것으로
그곳에서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난법자들을 만나 크게 고통 받을 것을 경계한 것이다.

뒤에 얘기하겠으나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도수에 따라 용화동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질 정도로 많은 고초를 겪게 될 터이다.

 


『대순전경』의 저자로서 ‘도수’ 내용을 모르지 않는 이상호와 그의 교단에서는 고수부님 모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수부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고수부님 모셔가기’를 추진했다.
 
 해가 바뀌었다. 1931년. 매서운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정월 18일에 보천교 신도 10여 명이 왕심리 도장을 찾아왔다.
온통 해골같이 피골이 상접한 그들은 고수부님에게 굶주림을 호소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에는 보천교에 많은 일이 있었다.
 
 1921년 9월 24일, 경남 함양군 지곡면 황석산 기슭에서 비밀리에 고천제를 올린
차경석 성도는 초헌 후 독축에서 교명을 보화(普化)라고 하였다(李英浩, 『보천교연혁사』).
차경석 교단이 보화교(→ 보천교)로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보천교 공식 문건인 『보천교연혁사』에서는 이날 차경석이 ‘축문’을 낭독할 때
보화교라는 교명만 고천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당시 신문지상에는 ‘축문’의 실제내용에
 “국호왈 시 교명왈 보화(國號曰 時 敎名曰 普化)”라고 고천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1922. 10. 26). 차경석이 ‘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하고 천자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 상관없이 당시 인구에 회자됐던 차경석의 ‘천자 등극설’이 등장한 배경이다.

 

 
 이후 많은 보천교 신도들이 본부가 있는 대흥리로 몰려들었다.
대흥리 일대는 일종의 신앙 ‘도시’가 형성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급박해졌다.
보천교에서는 생활이 곤란한 신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조(織造) 공장을 운영했다.
당시 대흥리에서만 1,500여 가구가 살았는데 교세가 번창했을 때는 저녁이면 집집마다 ‘태을주’ 소리가 넘쳐났다.
보천교가 없어진 뒤에는 ‘태을주’ 소리 대신 철거덕철거덕 베 짜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지금도 대흥리에 가서 골목길을 따라 가면 양쪽으로 밀집해 있는 처마 낮은 집에서 독닥독닥 베 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천교 신도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 고수부님은 그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을 배반한 차경석 교단의 신도라고 해도
‘인류의 어머니’ 고수부님이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어머니’인 것을.
 
 “보천교 신도가 저렇듯 굶주리니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하여 보라.” 고수부님이 이용기 성도를 불러 말했다.

 
 고수부님은 보천교 신도들의 구휼 문제뿐만 아니라 보천교 순교자의 해원(解寃)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용기는 오룡동에 사는 김도봉과 해전리에 사는 (이용기 성도의 처남) 정덕근,
광암리에 사는 송병우를 만나 고수부님의 말씀을 전하며 자금 형편을 상의했다.
결론은 세 사람이 협조하여 백미 두 석과 현금 70원을 자금으로 삼아 대흥리에 싸전을 벌여서
굶주린 보천교 신도들의 일상용품을 대 주고 끼니를 잇게 하며 또 일부는 보천교 순교자의 해원 공사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대흥리에 왕심리 도장에서 운영하는 ‘싸전’이 열렸다.
그날 이후 대흥리 싸전에는 보천교 신도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들을 보는 고수부님의 내면풍경은 어떤 것이었을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보천교 신도들의 구휼과 보천교 순교자들의 해원―.
그것은 곧 고수부님이 당신에게 붙여진 ‘크나큰 세 살림 도수’를 잠깐 비켜나서 왕심리 도장으로 옮겨온 이유이기도 했다.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이 있다. 대흥리 ‘싸전’을 찾아오는 보천교 신도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같은 해 3월에 이르러 싸전 자금이 바닥이 났다. 세 사람이 고수부님 앞에 모였다.
 
 “너희들이 참 장한 일 했다.” 고수부님이 그들을 크게 칭찬했다.
 
 
 같은 해 4월 어느 날, 치성을 봉행한 후에 고수부님은 문득 노자(老子)를 불렀다. 그리고 큰 소리로 꾸짖는다.
 
 “복중 팔십년(腹中八十年)에 부모의 공덕을 아느냐 모르느냐.”
 
 ‘복중 팔십년’이란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 80년 동안 잉태되어 있다가 출생하였다는 설화내용을 가리킨다.
고수부님의 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이 어천하기 이틀 전에 집행하였던 ‘선천 성인 심판 공사’와 같은 맥락의 공사라고 할 수 있다.
그날 증산 상제님은 구릿골 약방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반듯이 누워
공자, 석가, 예수를 잇달아 불러 심판하고 추방한 뒤 노자를 불렀다.
 
 “노자야, 세속에 산모가 열 달이 차면 신 벗고 침실에 들어앉을 때마다
신을 다시 신게 될까 하여 사지에 들어가는 생각이 든다 하거늘
‘여든한 해를 어미 뱃속에 머리가 희도록 들어앉아 있었다.’ 하니 그 어미가 어찌 될 것이냐.
그런 불효가 없나니 너는 천하에 다시없는 죄인이니라. 또한 네가 ‘이단(異端) 팔십 권을 지었다.’
 하나 세상에서 본 자가 없고, 나 또한 못 보았노라.
그래도 네가 신선이냐! 너도 이 세상에서 쓸데없으니 딴 세상으로 가거라.”(10:40)


 
 고수부님은 다시 여동빈(呂洞賓, ?~?)을 불렀다. 여동빈은 당팔선(唐八仙) 중 한 사람.
당나라 천보(天寶, 742~755) 연간에 태어났다.
팔선의 수장격인 종리권(鐘離權)으로부터 도를 전수받아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증산 상제님(7:84)과 고수부님의 공사재료가 된 바 있다
(11:210). 특히 고수부님의 ‘칠보산 태자봉 공사’는 이 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동빈을 불러놓고 고수부님은 “하늘을 보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모두 하늘을 보는데 구름이 선관의 모양을 이루며 떠 있었다. 그때였다.
 
 “세계 창생들로 하여금 모두 갱소년 되게 하라.” 고수부님이 선관 모양의 구름을 향해 말했다.
 구름이 머리를 숙여 명을 받드는 형상을 하며 동쪽 하늘로 물러갔다.
 고수부님은 말한다. “앞세상에는 흰머리가 나지 않게 할 것이며 허리도 굽지 않게 하리라.”
 
 

그때 성도들이 “저희들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고수부님은 “후천 가면 너희들이 모두 선관이 되는데, 선관도 죽는다데?” 반문하였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열어준 인류의 낙원―후천 선경세계는 그런 세상이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후천선경에는 수(壽)가 상등은 1200세요, 중등은 900세요,
하등은 700세니라.” 하시고 “그 때에는 장수 시대가 열려
백 리 안에 할아버지가 셋이면 손자는 하나인 세상이 되느니라.” 하시니라.(11:299)

 
 그해 7월 29일, 전북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
동화교 통정 이상호가 간부 조학구(趙鶴九)와 함께 왕심리 도장에 나타났다.
동화교가 개교한 것은 1928년 12월 22일 동짓날이었다.
이상호는 1915년에 고수부님의 대흥리 도장에 입도하여 9년 간 보천교를 신앙하였던 인물.
그 후 보천교를 탈퇴하여 소위 ‘보천교 혁신운동’을 이끌었다.
1925년 김형렬의 미륵불교에 입문하였으나 얼마 후 탈퇴한 뒤에 동화교를 개교했다.
고찬홍 성도가 이상호 일행을 고수부님 앞으로 안내했다.


 
 “제가 듣기로는 천사께서 사모님께 세 살림에 관하여 말씀을 하시고
또 여러 성도들에게 ‘용화동이 나의 기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무진년(1928) 동지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용화동에서 동화교를 창건하고
그 이듬해 기사년(1929) 3월 16일에 『대순전경』을 편찬하여 진법의 기초를 정하고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천사의 회갑을 당하매 비로소 사모님께서 세 살림을 차릴 도수가 된 듯하오니
청컨대 사모님께서 용화동으로 본소를 옮기심이 옳을까 하옵니다.”


 
 이상호가 간절히 청했다. 이상호 얘기 중에 ‘천사’란 증산 상제님을 일컫는다.
증산 상제님 행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증산천사공사기』와 『대순전경』을 편찬한 이상호와
동화교 이론가인 그의 동생 이성영이 보는 상제관이 그랬다.
동화교 측에서는 이미 지난해부터 고수부님을 모셔가기 위해 공을 들여온 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수부님은 썩 내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옆에서 이상호의 얘기를 듣고 있던 (고수부님 도장의) 수석성도 고민환 성도는 생각이 많았다.
그는 ‘이 일은 (고수부님에게 붙여진) 세 살림 도수의 도국 변천(道局變遷)이라’고 생각하였다.
 
“용화동 교인들이 저토록 애원하니 해원도 해 주실 겸
용화동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시어 뒷일을 결정함이 옳은 줄 압니다.” 고민환이 말했다.
고민환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간곡히 청하였다.
고수부님으로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먼저 상제님 성탄절에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에 가서
회갑치성을 올리고 그 뒤에 기회를 보아 본소를 용화동으로 옮기리라.”
 
 마침내 고수부님이 허락하였다. 어떤 일이든 당신 자신의 몸 보전보다는 도장을,
천하창생을 먼저 생각하는 고수부님이 아니던가.
당시 고수부님은 수석성도 고민환까지 간청하는 데야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9월 보름날. 동화교에서 임경호(林敬鎬)와 이성영(李成英, 1895∼1968)이 왕심리 도장에 왔다.
이틀 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임경호, 이성영의 안내로 고찬홍, 이근목, 박종오, 강재숙, 서인권 등 10여 명을 데리고 용화동으로 향했다.
 
 저기 눈길 끝으로 용화동이 보였다. 팥정이다.
옆에 커다란 고목나무 한 그루가 긴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다.
고수부님은 팥정이에 앉아 기다란 담뱃대로 구릿골 입구 돌다리를 가리켰다.


 
 “저기가 천지 문턱이니 제비산에서 장광(長廣) 팔십 리가 꼭 차느니라.
제비산 흙을 쓸 때가 있네. 평사리(坪沙里)는 나의 평상(平床)터네.”
 
 ‘평사리’는 오늘날 김제시 봉남면 평사리.
고수부님은 팥정이 징검다리를 건너며 “하나, 둘, 셋, 넷…”하고 담뱃대로 노둣돌을 세며 건넜다.
그리고 네 번째 돌을 담뱃대로 탁 때리며 “이것이 내 새끼다”하고 말했다.
 
 잠시 후 고수부님은 일행과 함께 용화동 동화교 도장에 도착했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가.
왠지 이상호의 얼굴이 마땅치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상호는 내심 고수부님만을 모시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고수부님을 따라온
‘고수부님 도장’(앞으로는 ‘조종리 도장’으로 표기한다)의 신도들은 1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교 살림이 심히 곤궁하다는 이유로 조종리 도장 신도들을 썩 반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조종리 도장과 동화교의 첫 만남이 그랬다.
 
 “걱정 마라. 굶어 죽지 않으리라.” 고수부님은 이미 이상호의 속내를 다 들여다보고 말했다.


 
 
 9월 19일 새벽에 고수부님은 용화동 도장에서 증산 상제님의 회갑치성을 올렸다.
치성을 마친 후에 고수부님은 노래한다.
 
 만고의 성인도 때 아니면 될 수 있나.
/ 천문(天文) 열고 바라보니 / 만사가 여일(如一)하고 / 앞문 열고 내다보니 / 소원성취 분명하고
/ 팔문 열고 내다보니 / 만신인민(萬神人民) 해원이라.
/ 그 해 그 달 그 날 만나려고 / 오만년을 수도하여 아승기겁(阿僧祇劫) 벗었다네.
/ 전무후무 운수로다 / 전무후무 천운이요 / 전무후무 지운(地運)이네
/ 좋을씨구 좋을씨구 우리 시절 좋을씨구. / … / 아동방 창생들아!
/ 천지운수 염려 말고 마음 ‘심’ 자 닦아 보세.
/ 마음 심 자 닦고 보면 불로불사 아닐런가. / 전몰락 되기로서니 신불참(身不參)까지 해서 쓰랴
/ 좋을씨구 좋을씨구 우리 시절 좋을씨구.
/ 판결 나고 결재 난 일 세상 사람 어이 알랴 / 어떤 사람 저러하고 어떤 사람 이러한가.
/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 좋을씨구 좋을씨구 우리 시절 좋을씨구.
/ 불운한 이 세상에 일편심을 어데 두고 / 천지 공(功)을 닦을 손가.
/ 정심수도(正心修道) 닦아 내세 / 정심수도 닦고 보면 사람 노릇 분명하지.
/ 춘하추동 사시절에 일시라도 변치 말고 / 성경신 닦아 내서 사람 종자 분명하니
/ 좋을씨구 좋을씨구 우리 시절 좋을씨구. / 미륵존불 때가 와서 우리 시절 좋을씨구.(11:309)

 

 
 고수부님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응축되어 있는 노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대업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운명은 전무후무한 후천 가을 대개벽이다.
이것은 이미 우주 변화운동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 일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마음을 잘 닦으라. 그러면 좋은 시절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륵존불’ 증산 상제님은 물론 고수부님이 인간으로 온 시대적 의미이다.
좋을씨구 좋을씨구 우리 시절 좋을씨구.
 
 고수부님은 용화동에서 이틀 동안을 더 머물렀다.
9월 21일 아침 고수부님은 이상호 통정과 여러 성도들에게
“이 길로 돌아가서 대흥리 일을 정리하고 동지치성에 아주 이사하여 오리니 그 동안 준비하라”고 말했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왕심리 도장으로 돌아왔다.
 
 10월 2일 동화교의 임경호와 이성영이 왕심리 도장에 나타났다.
고수부님에게 문안 인사를 여쭌 뒤에 이성영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천사의 법언과 성적(聖蹟)은 이미 『대순전경』으로 간행되었으나
사모님의 언행은 아직까지 세상에 묻혀 있어 알지 못합니다.
통정 이하 여러 간부들이 의논하여 저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사모님의 언행을 수집하여 편찬하게 하므로
이제 그 사명을 띠고 왔습니다.”
 
 얘긴즉 고수부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대순전경』 편찬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다.
임경호는 『대순전경』 제호를 썼고
이성영은 자료를 수집한 형 이상호의 부탁으로 『대순전경』을 직접 집필·간행한 장본인이다.
 
 두 사람의 요청을 들은 고수부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이후 9일 동안 왕심리에 머물면서 고민환을 비롯한 몇몇 성도들에게 듣고 기록했다(11:311).
그 결과물이 이미 소개한 『고부인신정기』(1963)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