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부님의 공사 말씀이 계속되었다.
 
 1) 너희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누구 하나 알게 하시는 줄 아느냐.
 / 천부지(天不知), 신부지(神不知), 인부지(人不知) 삼부지(三不知)이니 참종자 외에는 모르느니라.
 / ... / 일은 딴 사람이 하느니 조화 조화 개조화(改造化)라.(11:250)
 
 2) 잘 되었네 잘 되었네, 천지 일이 잘 되었네. / 바다 해(海) 자 열 개(開) 자 사진주(四眞主)가 오신다네.
 / 쓸 사람 몇 사람만 있으면 그만이라네. / ‘훔치( 팿?) 훔치(팿?)’는 신농씨 찾는 도수니라.(11:251)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고수부님이 이렇게 많은 공사를 거의 같은 시간에 진행한 일도 드물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조종리 도장 시절의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반드시 그곳에서 처결해야 할 공사를 집행하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터이다.


 
 1) 공사에서 ‘너희 아버지’는 곧 증산 상제님을 일컫는 말씀이요,
‘증산 상제님이 하는 일’은 후천 가을 세상을 건설하는 천지공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일은 딴 사람이 한다’는 것은
후천개벽이 고수부님이 당대(이것도 하나의 ‘판’으로 이해된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판밖에서 인물이 나와 마무리를 짓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판밖의 인물’에 대해서는 『도전』 곳곳에 도수로서 정해져 있다.


 
 2) 공사에서 ‘사진주’는 증산 상제님의 종통맥을 이루는 도체(道體)로서
천지일월(天地日月: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離) 사체(四體)를 일컫는다.
인사적으로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그리고 (증산 상제님의) 대행자로서
대사부를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전체 공사 내용은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수부님 공사는 날이 갈수록 더욱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무렵 고수부님 공사 가운데 특히 후천 가을대개벽에 대한 공사가 집중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조종리 도장시절의 마감이 임박했다는 얘기다.
고수부님이 조종리 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배경이 그러하였다.


 
 태모님께서 병인년에 칠성용정 공사를 보신 이후 고민환을 크게 신임하여
모든 일을 민환에게 위임하시니
강응칠과 강사성 등을 주축으로 한 몇몇 조종리 강씨들이 그 동안의 공로와 신앙 경륜을 내세우며
친목단을 조직하여 불만을 토로하다가 무진년에 이르러
태모님께서 간부 조직을 새로운 인물로 대폭 개편하시매 노골적으로 반동하며 강응칠은 아예 도문을 떠나니라.


그 후 이들은 전혀 개심의 여지가 없이 계속하여
태모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모략을 하거늘 그 동안 태모님을 모시고
‘사모님, 사모님’ 하며 공사에 수종하던 신앙심은 온데간데없고 심지어
태모님께 ‘이년, 저년’ 하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매
그 불경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더니 급기야 도장에서 10여 년 동안 부쳐 오던
소작답 24두락마저 끊어 버리는 등 도장 운영을 하지 못하게 공작을 펴니라.(11:269)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누구인가. 고수부님이 차경석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쫓겨나다시피 하였을 때 조종리로 모시고 온 장본인들이요,

고수부님의 둘째 살림 도장이 자리 잡고 있는 조종리에서 터줏대감과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는 대흥리 도장 시절부터 신앙해 온 터라
고민환 등 임옥(임피ㆍ옥구) 출신 핵심 간부들보다 신앙경력도 많았다.
결국 선배가 선배 노릇을 못하고 권력만 탐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자신들의 공로와 신앙경륜을 내세워 은연중에 불만을 토로하다가
지난 해 간부조직 개편 이후 수석성도 고민환에 대한 음해계획까지 세웠고,
그 때문에 고민환 성도가 몰래 고향으로 피난을 갔다는 것은 이미 얘기하였다.
강씨 신도들의 고수부님 도정 집행 방해공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장 치졸한 방법으로 고수부님을 괴롭혔다.


조종리 도장에서 10년 동안이나 부쳐오던 소작답 24두락마저 끊어버린 것이었다.
아예 도장 운영을 하지 못하도록 목줄을 조르겠다는 본새였다.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날 때 도장 건물을 위임받게 될 강휘만 성도의 증언에 기대면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날 무렵에는 땅 한 평도 가진 것이 없었다.
 

 

 고수부님으로서는 도문을 개창한 이후
누구보다도 믿었던 교단 간부들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한 셈이다.

첫째가 차경석이요,
두 번째가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었다.
인간적으로 (누차 지적하였다시피) 차경석은 친남매와 다름없는 이종사촌 동생이요,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남편 증산 상제님과 같은 일족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역경을 헤쳐 왔던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을 만나 수부 도수의 주인이 된 이후
천하의 ‘우두머리 된 여성’이요,
‘온 인류의 어머니’라고 했으되 여전히 역경 속에 서 있는 모진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것도 휘하의 믿었던 신도들로부터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소용돌이치는 거친 폭풍 앞에 서 있는….


 
 조종리 강씨 종손으로 최고 어른인 강응칠 성도를 주목하자.
한때 한약방을 경영하였고 200석지기의 부농이었던 강응칠은 고수부님에게 등을 돌린 이후
얼마 남지 않은 가산마저 탕진해버렸다.
살기가 어려워진 강응칠은 가산을 만회하기 위해 나름대로 궁리한 것을 실행에 옮겼다.
조종리 도장 건물을 가지고 저당을 잡혀버린 것이었다. 물론 고수부님과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


 
 고수부님은 그런 강응칠을 버리지 않았다.
조종리 도장에서 강응칠의 채무를 대신 갚아 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응칠은 나중에 도장 건물을
(조종리 시절 초기에 고수부님이 잠시 머물렀던) 오두막집 주인에게 팔아 버렸다.
고수부님은 물론 조종리 도장 성도들로서는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오두막집 주인으로부터 도장 건물을 내어 달라는 통고를 받고서야 내막을 알고 고수부님은 크게 노했다.
도장 건물을 비워달라는 오두막 주인의 요구도 거절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오두막집 주인은 강응칠을 전주 지방법원에 고소했다.


 
 재판의 초점은 조종리 도장 건물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조종리 도장은 여러 신도들의 공동 모금으로 건축한 건물이었다.
결국 강응칠이 패소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대용이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왔다.
사람들은 이 재판 사건을 일러 ‘도집 재판 사건’이라 하였다.


 
 감옥을 살고 나온 강대용이 누구인가.
고수부님이 양자로 삼을 정도로 총애했고 ‘태자 도수’까지 붙인 인물이다.
바로 그 강대용이 아버지의 불의함으로 감옥까지 살고 나오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고수부님의 내면풍경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응칠의 만행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후 강응칠은 다시 도장 건물을 팔아넘길 속셈으로
‘김제 청년 혁신파’와 의기투합하여 고수부님을 경찰서에 밀고했다.
강응칠이 고수부님을 밀고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독립운동을 위해 집회, 결사를 한 우두머리’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도덕이, 윤리가, 의리가 무너졌기로 인두겁을 쓰고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자가 스승을, 신도가 교주를 그것도 교조의 반려자를, 자식이 어머니를 고발한 꼴이 아닌가 말이다.


 
 경찰서에서 출두 통지서가 날아왔다. 고수부님 대신 한 성도가 출두했다.
일본인 서장이 “교주가 여자라며? 내일 교주와 같이 나오라”며 돌려보냈다.
이튿날 김수응 성도가 고수부님을 모시고 출두했다. 또 한 맺힌 걸음을 걷게 되었다.


고수부님의 길은 그렇게 영광과 함께 형극의 길이기도 하였다.
고수부님이 일제 경찰들과 맞닥뜨린 것이 몇 번째인가. 또 경찰서 출두가 몇 번째인가.
‘무오년 옥화’ 때는 대흥리 차경석 교단의 모함을 받아 경찰서에 출두하여 38일 동안 온갖 고초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오년 옥화 때 목포 경찰서에 함께 구속되었던 장본인이 바로 강응칠 성도였다.


 
 고수부님이 경찰서에 도착하여 일본인 서장 앞에 앉았다.
일본인 서장이 “…돈 많은 영감이나 잡고 지내면 좋지 않소”하고 비아냥거렸다.
 
 “내 몸일지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고수부님이 대답했다.
일본인 서장이 주재하여 심문을 하였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고수부님은 심문을 받고 돌아왔다.
조종리 도장으로 돌아오는 고수부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행주좌와(行住坐臥), 인류가 진멸지경에 처하게 되는
후천 개벽기를 맞아 창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오매불망 살아가고 있는 인류의 어머니가,
천지의 어머니가 한낱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법망에 끌려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는.
 
 고수부님의 결단을 재촉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조종리 강씨 신도들의 온갖 모략과 방해 공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왕래하던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었다.
고수부님 입장에서 다른 어떤 모욕이나 고초, 역경, 고난도 참을 수 있지만
저기 거대한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후천개벽을 앞두고
천하창생을 구원하는 일을 방해받았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배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었으면서도 묵묵히 참아 왔던 고수부님은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종리 강씨들의 무도함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아아. 어머니의 사랑이란 그런가. 분노의 폭발은 화살이 되어 날아갔지만,
그 화살은 다시 당신의 가슴으로 돌아와 꽂혔다.
결국 고수부님은 거센 폭풍같이 밀어닥치는 모든 시련을 당신 혼자 온몸으로 감내했다.
고수부님이 분노의 폭발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고작해야 조종리와 이별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무리 무도한 자식이라고 해서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자식일수록 더욱 정을 쏟아 키워야 하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끝없는 모성애가 아니던가.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나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보천교 몰락으로 갈 곳 없이 떠돌면서 헐벗음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보천교 신도들을 구휼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또 있었다.
무엇보다도 증산 상제님이 공사로 짜놓은 ‘세 살림’ 도수 중에 둘째 도장 살림의 기한이 다 된 것이었다.
 
 조종리를 떠나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 9월 18, 19일경 고수부님은 도장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불렀다.
고수부님은 “인간의 원한이나 신명의 원한이 동일하니 할 수 없는 일이로다”하고 정읍으로 옮길 의사를 밝혔다.
인심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바쳐 추종할 것 같았던 신도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어떤 신도는 ‘신씨 가문의 일을 하러 간다’고 비웃기도 하였다.
신씨 가문이란 대흥리에 있는 고수부님의 전남편 신여옥의 집안을 가리킨다.

 

 
 9월 19일,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을 봉행했다.
그리고 이틀 뒤 21일, 고수부님은 대흥리를 떠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오직 담뱃대 하나만 달랑 든 채
몇몇 성도들과 함께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조종리 도장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도장에서 곁방살이하던 강휘만 성도를 불러 도장 살림을 맡겼다.
강휘만이 비록 도문에 늦게 들어왔으나 심성이 착하고 그 동안 도장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일심으로 주문을 읽고 다니므로 그 마음자리를 보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이 조종리 도장을 떠나던 날, 몇 년을 추종했던 강사성,
강응칠 등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장 대문을 나서며 고수부님은 “용기야, 등 대거라”하고
뒤따르는 이용기 성도를 불렀다. 이용기가 고수부님을 등에 업고 도장을 나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이용기 성도인들 발걸음이 제대로 옮겨졌을까.


고수부님이 김제 송산마을에서 조종리 중조마을 오두막집으로 옮긴 것은 1918년 10월 중순이었다.
그곳에서 한 달을 지내다가 하조마을 강응칠의 집으로 옮겨 아홉 달을 지냈다.
중조 마을 도장으로 이사한 것이 1919년 윤7월 18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개월의 세월이 지났다.
고수부님의 세 살림 가운데 가장 긴 기간이 될 것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고 보면 정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이미 주택을 구입해 놓았던 정읍 왕심리 .
고수부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7, 8명이 고작이었다.
박종오, 김재윤, 전준엽, 김수열, 전선필, 이용기, 전대윤, 박서옥의 아내 조씨 등이었다.
음력 9월이면 만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이다.


황금빛으로 수놓았던 징게맹경 들판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에 의해 거둬지고 빈 짚단들만 수북이 쌓일 무렵이다.
‘배반의 이별’ 길을 가는
고수부님 앞은 그렇게 낙엽 되어 떨어지는 가을 나뭇잎처럼 쓸쓸하고 황량하였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그렇게 모질고 외로운 길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제28장 원혼신 해원 공사
 
 “태모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을 거두어 구제하시니라.” (道典 11:274:5)
 
 
 정읍 대흥리 앞을 가로질러 큰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나아가다가
오른편 마을길로 꺾어 들어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우거진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전북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丹谷里) 왕심(旺尋) 마을 . 원래 ‘성신리(誠信里)’라고도 불렸던
‘왕심리’ 마을은 단곡리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정읍군지』에 따르면 옛날 왕신원(往信院)이 있었으므로 성신리 혹은 왕심리로 불렸다고 한다.
순흥(順興) 안(安)씨 집성촌으로서 증산 상제님이 어린 시절 머슴을 살았던 거슬막과 이웃하고 있다.


 
 조종리를 떠났던 고수부님이 2년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곳 왕심리였다.
정확하게는 1929년 9월 21일부터 1932년 3월 20일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왕심리는 뒤쪽으로 비룡산이 감싸고 앞쪽으로 내장산과 삼성산,
입암산이 마치 ‘일월도’ 같이 펼쳐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왕심리 도장은 대숲을 약간 비껴 돌아서 마을 맨 위쪽에 있었다.
당시 도장 건물은 4채로서 다섯 칸짜리 본채는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조금 뒤쪽으로 사무실동,
그리고 본채와 옆으로 나란히 성전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 사랑채가 있었다.
지금은 고수부님 당시의 도장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도장 터에는 ‘대한불교법왕종 성불사’라는 간판 아래 법당과 요사 두 동만이 서 있을 뿐이다.

 
 고수부님이 굳이 대흥리 이웃마을인 왕심리로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천교 신도들을 구휼하고, 굶어 죽은 순교자 신명들의 원혼을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고수부님이 보천교주 차경석에게 붙여진 공사를 거두었고,
그 뒤에 보천교 난법기운을 거두는 공사까지 행한 뒤 보천교는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의 시절을 뒤로 하고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전국 각지에서 교주 차경석의 명령으로 모든 재산을 바치고
보천교 본소로 몰려들었던 신도들은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어버렸다.
당시 보천교 신도 연인원 1만여 명이 고수부님을 찾아와 굶주림을 하소연했다고 한다.


 
 왕심리 도장을 답사하는 동안,
고수부님 도장 시절 저쪽 아랫마을 대흥리로부터 이곳까지 남루한 옷차림에 피골이 상접한
보천교 신도들이 줄을 잇고, 고수부님 도장 성도들이 퍼주는 쌀을 얻어가는 광경이 우련하게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려 대흥리 쪽으로 눈길을 던지자 주위에서 울려 퍼지는 아우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하였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그 때 그 시절 고수부님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종리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 일행은 20리 거리에 이르는 김제역까지 단숨에 왔다.
플랫 홈에는 이미 정읍행 기차가 도착해 있었다. 곧 출발할 태세였다.
마음이 급해진 이용기 성도가 곧장 역으로 달렸는데 등에 업힌 고수부님이 갑자기 ‘시천주주’를 읽기 시작했다.
두 팔을 나비의 날갯짓처럼 위아래로 휘휘 저으며 춤을 추면서.
그리고 역사 너머 기차를 향해 “네가 나를 모를 리가 있나”하고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밥은 먹어야 산다. 굶고서야 무엇을 하겠느냐?
하루 세 끼 먹으려고 우리가 이렇게 다니는 것이니 점심이나 먹고 가자.”
 
 고수부님이 이용기 성도를 향해 방향을 틀라고 하였다.
일행은 역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몇몇 성도들이 기차를 놓칠까 우려하여 역사로 달려가 미리 표를 사 놓았다.
고수부님을 모시고 식당에 들어간 한 성도가 “주인장. 여기 밥 좀 주오.” 성급하게 주문했다.
식당 주인이 “남은 찬밥밖에 없는데”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성도들이 “그거라도 주오”하고 말했다.

 

 
 “이놈들아, 이렇게 다니는데 왜 찬밥 먹고 다니냐.” 잠자코 듣고만 있던 고수부님이 성도들을 꾸짖으며
 식당주인을 향해 밥을 지으라고 했다. 성도들이 급한 마음에 식당 주인을 도와 부랴부랴 밥을 지었다.
 
 고수부님은 느긋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끝낸 고수부님은 “술 가지고 오라.”고 하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워 문 뒤에야 “밥 먹었으니까 가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차는 이미 떠났을 것이다. 성도들은 아예 체념해버렸다.
이용기 성도가 다시 고수부님을 업었다. 일행은 개찰구를 나와 플랫 홈으로 갔다.
떠났을 줄 알았던 기차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고장이 난 모양으로 기관사가 아무리 조작을 해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기관사들이 분주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장 난 곳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고수부님이 기차를 탄 후에 담뱃대를 거꾸로 물고 부우 , 기적소리를 냈다.
그제야 기차가 덜컹하면서 거대한 체구를 움직였다. “내가 이 기차를 타려고 멈추게 하였노라.” 고수부님이 말했다.

 

김제역을 떠난 기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넓은 징게맹경 벌판을 가로질러 정읍 쪽을 향해 달렸다.
 
 물론 그날 고수부님이 도착한 곳은 정읍 왕심리 도장이었다.
고수부님이 왕심리 도장에 머물게 된 며칠 뒤부터 굶주림에 허덕이는 보천교 신도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상황인즉 그러하였다.
 
 보천교 십일전이 경복궁의 근정전보다도 더 거대하게 지어졌다는 것은 이미 얘기했다.
『도전』에 따르면 보천교가 한창 부흥할 때 신도들이 가져오는 돈의 액수에 따라 그에 맞는 감투가 주어졌다.
 물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감투가 아니다.

 

전국의 작은 고을 수령까지 내정되었는데 후천 세상이 오면 장상과 고을 수령까지 해먹겠다는 계산이었다.
이는 증산 상제님이 “각기 왕후, 장상을 꿈꾸다
그릇 죽은 동학 역신들을 해원시키리라”(5:205)고 한 공사가 현실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5년에 착공하였다가 중단되었던
십일전 공사를 1928년부터 재개하게 되자 세간에서는 보천교주 차경석이 드디어 천자가 되어
대궐을 신축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공사가 진척되면서 1929년 3월 15일 봉안식을 거행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십일전 봉안식을 ‘천자 등극식’ 정도로 알았다.
이미 ‘후천 감투’를 사 두었던 신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1928, 29년 사이에 각 지방 보천교 신도들이 대흥리와 그 부근 마을로 이사하여
일대는 순식간에 보천교 신앙촌을 이루었다. 바로 그런 점이 당국을 자극했다.

 

 잔뜩 긴장한 일제 당국이 봉안식 거행을 허가해 줄 리 만무했다.
보천교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봉안식을 거행하려고 시도했으나 당국은 불온설로 민심을 자극하여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아예 봉안식 자체를 금지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보천교 십일전 건축은 신도들의 노동만 착취하였을 뿐,
차 교주의 ‘천자등극’에 대한 희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어버렸다.

 
 당시는, 국내는 물론이지만 세계적으로 대공황기였다.
갑자기 수천 가구가 이주해 왔으므로 보천교 신도들과 그 가족들이 직업은커녕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다.
게다가 차 교주의 천자 등극까지 무위로 끝나자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져버렸으므로
대흥리와 그 주변마을로 이사 온 보천교 신도들은 끼니조차 잇지 못한 채
곤궁한 날들을 기약 없이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해(1929) 가을, 교주 차경석은 신도들의 구제 방편으로
‘벽곡방문(?穀方文)’과 ‘생식방문(生食方文)’을 반포했다.
벽곡·생식방문이란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날것으로 먹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교주의 명이었으므로 무지한 신도들은 또 그 ‘말씀’을 믿고 따랐다.


결과적으로 약독(藥毒)과 기아로 인하여 죽은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고,
이주한 것을 후회하고 재산과 건강을 탕진한 채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또한 수천 명이요,
남아있는 자도 모두 기아에 빠져 오고갈 수도 없게 되었다.
당시 보천교 방주를 지냈던 아무개의 아들 한학규 씨는
그 때 곡식이 없어 소나무 껍질, 솔잎, 시래기 등을 먹고 살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오갈 곳이 없는 보천교도들을 살려야 하는 ‘공’을 떠맡은 이가 ‘온 인류의 어머니’ 고수부님이었다.
고수부님이 보천교 신도들의 죽어가는 참상을 모를 리 없었고,
알았다면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 아니던가.
고수부님이 왕심리로 이사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 때 태모님께서 왕심리에 우거하시매
보천교 신도들이 매일 수십 명씩 와 뵙고 굶주림을 호소하니 왕래하는 자가 무려 만여 명이 되거늘
태모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을 거두어 구제하시니라.

이로 인해 도장 운영에 지장이 많더니 마침 경찰로 있는 신도 강재룡(姜在龍)의 도움으로
수일을 지내고 또 박종오와 김수열이 임옥 지방을, 이용기 등이 전주,
익산, 김제 지방을 순회하여 경비를 조달하매 간신히 충당이 되니라.(11:274)


 
 그때 고수부님 도장의 수석성도 고민환은 고향 옥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12월 왕심리에서 온 신도 한 명이 “어머니(고수부님)께서 종독(腫毒)으로 고통을 받다가
이제는 증세가 위중하여 속히 오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고민환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왕심리로 달려왔다.
고수부님을 뵈었는데 과연 어깨에 종기가 나서 커다란 박만 하였다.


 
 “어찌 이다지도 고생이 심하십니까.” 고민환은 차라리 고수부님이 야속하다는 듯 오열을 터뜨렸다.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고민환은 몰랐다.

고수부님이 종기를 앓고 있는 것은 모든 원혼신(?魂神)을 해원하는
‘천지공사’라는 것을(11:276). 왕심리 도장으로 옮겨온 고수부님이 가장 먼저
‘원혼신 해원공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류의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고수부님한테 혹독한 한파가 몰아쳤던 1929년이 가고 1930년이 밝았다.
망국의 조선은 그해 1월 역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불안과 혼란 속에 한 해의 문을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해 만세시위와 동맹휴학 등으로
몇 백 명이 검거되어 퇴학을 당하는 혼란도 계속되고 있었다.
 
 1930년 정월 초사흗날 고수부님은 왕심리 도장에서 천지 고사(告祀)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을 마친 뒤 고수부님은 치성에 참석하였던
유일태, 이근목, 이진묵, 문명수, 채유중, 이중진 성도 등 10여 명을 향해 말했다.
 
 “참사람이 어디 있느냐. 참사람을 만나야 하리니
춘하추동 사시절에 일시라도 변치 말고 성경신 석 자로 닦으면서 진심으로 고대하면 참사람을 만나리라.”
 
 여기서 ‘참사람’이 누구인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종통맥을 계승한 일꾼들을 가리킴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공부는 용(用)공부니 남모르는 공부를 많이 해 두라.
마음은 성인의 바탕을 갖고 일은 영웅의 수단을 가지라.
되는 일 안 되게 하고 안 되는 일 되게 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우리 공부는 남 편할 적에 고생하자는 공부요 남 죽을 적에 살자는 공부요 남 살 적에는 영화를 누리자는 공부니라.
‘대학(大學) 공부 성공이라.’ 하나 저만 알고 마는 것이니라.(11:278)
 
 ‘용(用) 공부’에 대한 공사 말씀이다. 1928년에도 고수부님은 ‘용 공부’ 공사를 보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 공부는 용(用)공부니 제 몸 하나 단속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천지의 음덕(蔭德)이요, 선령의 음덕이요,
신군(神君)의 음덕이라. 도(都)부처가 들어앉으니 집은 선가(仙家)가 아닐런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11:212)
 
 고수부님이 얘기하는 ‘용 공부’란 무엇인가?
상제님과 수부님의 가르침 진리가 체라면 그 진리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용이다.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는 후천 가을개벽이 체라면 (가을개벽 때) 실천적 생명 살리기가 용이요,
그 과정이 ‘용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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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