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전준엽은 조종리 도장의 재정을 총괄하였다. 포교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준엽이 재정을 총괄한 이후
조종리 도장에는 여성 신도들이 크게 늘어났고 성금이 많이 들어오면서 재정이 넉넉해졌다.
 
 여성 신도들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이 무렵 고수부님의 공사에는‘여성’이 소재가 된 경우가 많아졌다.
그날도 고수부님은‘여성’을 재료로 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주로 남성 신도들이었다.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고수부님은,
 
 “이놈들아, 아느냐? …천지가 생긴 이래로 네 어미 밑구녕이 제일 거니라.”
 
 하고 맞은편 조종산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남성 신도들로서는 좀 민망하였을 터였다.
증산 상제님도 그랬지만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라는 것이 모두가 하나같이 처음 있는 일이요,
그랬으므로 파격적인 것이야 당위일 터였다. 아무리 그러하기로‘네 어미 밑구녕이 제일 걸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어미 밑구녕’은 어머니의 음부를 가리킨다.‘ 걸다’는 말은 푸지다,
기름지다는 정도의 의미로 풀이된다.

 
 “부인들은 천지의 보지 단지니 너희들은 보지가 무엇인지 아느냐?
보배 보(寶) 자, 땅 지(地) 자니라. 밥지어 바쳐 주니 좋고, 의복 지어 바쳐 주니 좋고,
아들 딸 낳아 선령 봉제사(奉祭祀) 하여 주고 대(代) 이어 주어 좋으니 그
러므로 보지(寶地) 앞에 절해 주어야 하거늘 너희들이 어찌 보지를 괄시하느냐, 이놈들아!”
 
 꾸짖듯이 말하고 고수부님은 담뱃대로 앞에 늘어선 남성 신도들의 머리를 딱딱 때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듯이“가도(家道)를 바로잡으려면 부인에게 공손공대(恭遜恭待)하며 잘 해 주어야 하느니라”고 말했다.
 
 4월이다. 4월이면 초파일 치성이 있다.
그 동안 치성 때만 되면 고수부님은 늘“사람이 없어서…사람이 없어서….”말하곤 하였다.
성도들은‘어머니께서 신도들 수가 적어서 저러시나 보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성도들의 생각에는 당장에 차경석의 보천교가 떠올랐을 것이다.
성도들은 한 자리에 모여 의논했다.
결론은 쉽게 났다. “이번 치성에는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어머니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자.”


 
 성도들은 여러 가지로 정성껏 치성을 준비했다.
누구보다도 치성을 잘 챙기는 고수부님이“이번 치성에는 소 한 마리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소 성품이 조용하고 말이 없는 김수열(金壽烈: 1897∼1978) 성도가
1백여 리가 넘는 옥구군 미면 미룡리 고향으로 달려갔다.
미룡리에서 둘째가는 부자인 김수열은 대흥리 도장시절부터 한결같이 신앙해 온 열성 신도였다.


 
 때는 귀신도 깨어 일어나 일손을 돕는다는 모내기철이다.
김수열은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머슴이 논을 가느라 한참 부리고 있는 검은 황소를 끌고 왔다.
조종리 본소에 도착한 김수열은“이 소를 잡아서 치성에 쓰십시오”하고 황소를 헌성하였다.
고수부님은 김수열의 성경신(誠敬信)을 크게 치하했다.
 
 4월 초파일 치성 하루 전날이다. 과연 성도들이 정성을 쏟은 결과가 있어서
도장에 모인 신도가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정도라면 좁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조종리 중조마을을 뒤덮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치 중조마을에 온통 하얀 배꽃이 떨어져 뒤덮은 것처럼. 참례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온 신도들이었다.


 
 “치성 때면 소를 몇 마리씩 잡았고 돼지는 수십 마리씩 잡았다.
경상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소발에 짚신을 신겨서 끌고 모이는 것을 집적 봤다.
치성하는 날에는 동네 뒤로 변소를 수십 개씩 지었다.
그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은 도집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채 같은 데 있고 그 안에 들어가질 못했다.
아이들은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하고….”(강용 증언, 『도전』재인용)
 
 참례자들이 이 정도 모였으므로 치성을 준비하던 성도들은‘이번만은 어머님께서 낙담치 않으시리라.’ 자신했다.
치성석에 나온 고수부님은 참례한 신도들을 한번 휘 둘러보고 혀를 끌끌 찼다.
 
 “야아∼ 우리 집에 검불 참 많이 모아다 놨구나!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흰데기 하나 없구나!”고수부님은 한탄하였다.
“박혀 있는 놈이나 온 놈이나 흰데기 하나 가릴 수 없구나.
너희들 중에서는 종자 하나 건지기 힘들것다.”


 
 ‘흰데기’란 가을 추수철에 나락을 한번 훑어내고 두번째 훑을 때 나오는 알곡을 말한다.
여기서 흰데기 하나 없다는 것은 당시 신도들 중에
가을개벽을 넘어 후천에서 거듭 살아남을 만한 정신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결국 당시 성도들을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인데 당시 이 얘기의 뜻을 이해하는 신도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개벽의 때나 기다리고
신앙의 목적을 도통이나「주역」풀이, 「현무경」부적 풀이 따위에 두고 있었다.
고수부님은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인을 경계했다.

 
 신도들로서는 기운이 쑥 빠져 달아났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그런 성도들을 향해“야, 이놈들아! 마음 보따리를 고쳐야 한다.
너희들 마음 보따리를 내놓아라.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심보재기부터 뜯어고쳐야 하느니”하고 호통을 쳤다.
고수부님의 답답한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말없이 듣기만 하는 성도들을 보고 고수부님은“잣대 잡을 놈이 있어야 쓰지,
잣대 잡을 놈이 없구나.”하며 탄식했다.


 
 이날 저녁에 고수부님은 공사를 집행하였다.
도장 앞마당 중앙에 단을 쌓고 청수를 한 동이 길어다 놓게 하였다.
중앙과 사방에는 각 방위에 해당하는 오색 깃발을 세웠다.
고수부님은 물 한 그릇을 떠 오게 하여 입에 머금어 훅 뿜어냈다.
그리고 담배를 피워 연기 몇 모금을 허공을 향해 불었는데 안개가 뿌옇게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어 안개비가 내려 고수부님과 성도들의 옷이 모두 축축이 젖었다.


 
 참례자들의 흰 두루마기가 얼룩덜룩해져 여간 볼썽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원래 갓 위에 옻칠을 하는데 당시 민중들은 생활에 여유가 없었으므로 십중팔구는 갓위에 먹물을 칠하고
그 위에 기름을 먹인 유건(儒巾)을 쓰고 다녔다.
안개비가 내려 갓에 칠한 먹물이 뚝뚝 떨어져 흰옷이 먹물로 얼룩진 것이었다.
참례자들은 자기의 흰 옷에 먹물이 드는데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고수부님이 담뱃대를 휘휘 저으며 공사를 지휘하는데 순식간에 눈앞에서 풍운조화가 일어났다.
참례자들은 도취되어 안개비가 오고 먹물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넋을 잃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고수부님이 두루마기를 입고 점잖게 서있는 고찬홍 성도에게
손짓을 하며“찬홍아, 찬홍아!” 하고 불렀다. 고찬홍이 대령하였다. 고수부님이“찬홍아,
내 옷 좀 갈아입혀라”하고 말했다.
 
 고수부님이 많은 신도들 가운데 굳이 고찬홍 성도를 불러
자기의 옷을 벗기라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뜻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고찬홍은 고수부님보다 5년 연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석꾼의 부호로서 늘 점잖게 정장을 하고 다니는 봉건주의 양반의 한 전형이었다.
아니나 다르겠는가. 고찬홍은‘양반’체면에 어쩔줄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야, 이놈아! 네 에미 옷 좀 벗기라는데 그렇게도 걱정이냐.”고수부님이 꾸짖으며
고찬홍이 쓰고 있는 갓을 확 잡아당겼다.
하필이면 갓이 고수부님의 하초(下焦)에 부딪혀 바싹 구겨지면서 고찬홍의 머리가 고수부님의 양다리 사이에 끼었다.
고수부님은 고찬홍의 머리를 두 다리로 낀 채 조종산 일대가 떠나갈 듯 큰소리로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 놈들이 전부 내 보지 속에서 나왔느니라.”
 
 남성 신도들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인가. 그 자리에 누가 있어 웃거나 울 수 있단 말인가.
신도들로서는 고수부님의 그 말씀이 선천의 묵은 천지를 문 닫고 새천지를 연
상제님을 대행하여 후천선경세계로 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인류의 어머니’자리에서 정신을 깨는
이른바‘육두문자’식 말씀이라는 것을 쉬이 깨달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고찬홍이 옷을 벗기는데 뜻 밖에 고수부님이 월경 중이었다.
고수부님의 고쟁이에는 월경수가 묻어 옷이 빨갛게 젖어 있었다.
민망해진 고찬홍이 옷을 벗기다 말고 몸 둘 바를 몰라 허둥거리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였다. 고수부님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 고찬홍의 갓을 잡아 고개를 똑바로 돌려놓고 따귀를 철썩 때렸다.


 
 “아이고, 못난 자식! 이놈아, 네가 나온 구멍이 무엇이 그렇게도 쑥스럽냐.
뭐가 그렇게 싫단 말이더냐.” 고수부님이 꾸짖는데 고찬홍이‘점잖은 사람이 도(道)도 좋지만
이렇게 여자 거시기로 잡아당겨졌으니 이런 쑥스러울 데가 어디 있는가’하며
무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본새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의 심중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고수부님은“수건으로 다 닦으라”하고 말했다.
고수부님은 알몸을 드러낸 채 대중을 향해 큰 소리로 부르짖듯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다 내 밑구녕에서 나왔다. 천하가 다 내 밑구녕에서 나왔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땅에서 나온 것 아니면 어떻게 먹고사느냐.
네 어미 보지 속에서 나왔으니까 다 먹고살지. 이놈들아—.”

 
 천하를 호령하는 듯 외치는 고수부님의 목소리는 조종산 너머 멀리 징게맹경 드넓은 평야 위로 메아리쳐 갔다.
참관한 수많은 갓 쓴 신도들은 양반이요 남자 체면에 감히 볼 수가 없다는 듯
전부 고개를 돌린 채 망연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천하가 다 고수부님의‘밑구녕’에서 나왔다면
어떻게 되는가. 고수부님이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날 저녁 공사를 마친 후에 치성을 준비하는데, 고수부님은 왠지 서둘렀다.
치성은 그날 밤중에 마쳤다. 고수부님은 참례자들의 이름이 적힌 방명록을 가져오게 하여 모두 찢어 버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서둘러라.
농사철이니 어서 이 밤길로 나서서 돌아가라.”고수부님은 쫓아내듯 신도들을 돌려보냈다.
 
 신도들이 영문도 모르고 엉겁결에 도장 밖으로 나서는데
칠흑같이 캄캄한 밤중에 갈 길이 수백 리요, 더군다나 안개가 짙게 낀 데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니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워 우왕좌왕했다. 때는 4월이라 마침 모내기를 하려고 논에 물을 한창 가두어 놓았으므로
일부는 짚신 발이 논에 빠져 질척거리며 가고, 일부는 논길로 가로질러 각기 서둘러 돌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던지 길이 아주 새로 났을 지경이었다.


 
 바로 그날, 김제경찰서에 귀가 번쩍 뜨이는 첩보가 접수되었다.
4월 초파일을 맞아 조종리 도장에서 1천명이나 되는 인원이 운집했다는 것이었다.
때가 어느때인데 1천 명이 모인단 말인가. 그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반기라도 드는 날에는….
경찰서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이튿날 아침에
일본인 경찰서장이 직접 말을 타고 기마대 여덟 명을 진두지휘하여 도장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조종리 본소에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에 덮여 있는 가운데
사람이라고는 불과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장 이하 순사들은 마치 귀신한테 홀렸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본소에서 고수부님을 모시던 20여 명의 간부 신도들이 도장에서 나왔다.
서장이“너희 두목을 만나야겠다”고 윽박지르며 부하들을 시켜 도장 안팎을 수색하라고 지시하였다.
도장에는 전날 잡은 소가죽과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릇과 음식들이 그대로 널려 있어 들통나기가 십상이었다.
성도들이‘이제는 꼼짝없이 잡혀가게 되었구나’하고 마음을 졸였다.
이상한 일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순사들이 도장 건물 뒤꼍에 널려 있는 소가죽을 밟고 다니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순사들이 도장 안팎을 수색하고 있을 때 고민환 성도가 서장을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뒤
고수부님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고수부님은 밖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놓은 채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고수부님으로부터 출입을 허락받은 서장이 군화를 신은 채 덜컥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고수부님을 한 번 쓱 쳐다보는 순간 그만 그 자리에 엎어져 마치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 뿐이었다.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향해“야들아, 쟈가 와 저런다냐”하고 말한 뒤 서장에게“왜 그러느냐?
초악이 붙기라도 했느냐? 못난 눔!”짐짓 꾸짖으며“네가 나를 찾았다 하니 무슨 용무인가?”하고 물었다.
서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에 고수부님은“네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용무가 없는 거 아니더냐.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라”하고 말했다.
 

 일본인 서장은 그제야 살았다는 듯 뒷걸음질로 기다시피 하여 물러 나왔다.
토방 위로 내려선 서장은 마치 저승에나 갔다가 살아난 듯 창백한 얼굴로 부하들에게“가자!
아무것도 없다”하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문밖으로 나가면서 서장은 성도들을 향해“당신네들은 저렇게 무서운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사느냐!”하고 혀를 내둘렀다.

 
 일본 순사대가 물러간 뒤 고수부님은 본소에 상주하는 성도들을 모두 불렀다.
“ 농번기가 되었으니 너희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농업에 힘쓰라.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니라.
…이후에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리라.”고수부님의 명령이 떨어졌으므로 성도들도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성도들이 귀가할 때 고민환 성도 역시 여장을 꾸려 출발하려고 하는데 강대용이“고민환은 돌아갈 생각을 말라.
이곳에 일이 있다”며 고수부님의 말을 대신 전했다. 성도들이 모두 떠난 뒤 조종리 도장에는 다시 정적이 밀려왔다.

 
 
 제19장 천지 보은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2:26:5)
 
 1926년 4월 10일, 고수부님은 강원섭, 강사성, 서인권, 서화임, 이근목 성도 등을 데리고
가마를 타고 예고도 없이 조종리 본소를 떠났다.
정읍 연지평에 있는 딸 태종의 집에서 하루를 쉰 다음날 다시 출발했다.
목적지는 대흥리 보천교 본부였다. 대흥리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차경석의 집 옆 버드나무 아래에 가마를 멈추라고 했다.


고수부님은 가마에 그대로 앉아서“윤경아. 윤경아”하고 차윤경을 불렀다.
잠시 후 차윤경이 달려 나왔다. 고수부님이“가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으나 차윤경이 듣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같은 마을 신대원(申大元)의 집에 처소를 정하였다.
다음날 고수부님은 남자 옷차림으로 가마를 타고 차경석의 집으로 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누구도 열어주지 않았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는데 보천교 여방주 이달영(李達榮)이 나와서 손을 들어 고수부님을 치려고 했다.
말없이 이달영의 거동을 지켜보기만 하던 고수부님이 노한 얼굴로“1년도 살지 못할년이 감히 이렇듯 무례하냐”하고 꾸짖었다.
(천지공사에 한 치 오차가 있을 수 없다. 이듬해 정월, 이달영은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조종리로 돌아 온 얼마 후 고수부님은 고민환을 수석 성도로 세워‘칠성용정 공사(七星用政公事)’를 보았다.
칠성용정 공사는 선천을 마무리 짓고 후천을 열어갈 인사도수를 실현하는 도운의 절정에서 추수일꾼을 내는 대공사.
따라서 공사 진행 하나하나가 엄하기만 하였다.

공사에 들어가기 직전에 고수부님은 강응칠 성도에게“네 갓과 도포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남장을 하고,
다시 고민환 성도에게“네가 입는 의관을 가져오라”고 하여 갈아입었다.
그리고 고민환에게 고수부님 자신의 의복을 입혀 내실에 있게 하였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고수부님은“내가 증산 상제님이니라” 하고 말했다.

 
 “고민환의 나이 마흔에 일곱을 더하면 내 나이 마흔 일곱이 되고
내 나이 마흔일곱에서 일곱을 빼면 고민환의 나이 마흔이 되니 이로부터 고민환이 곧 나의 대리요,
증산 상제님의 대리도 되느니라.”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청년 일곱 사람을 뽑아 ‘칠성 도수(七星度數)’를 정하는 공사가 그것이다.
고수부님은 일곱 명의 청년들에게 의복을 새로 지어 입히고 공사에 수종을 들게 하였다.
굳이 청년 일곱 명을 불러 공사를 본 것은
앞으로 젊은 일꾼들이 나서서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도판을 짊어지고 나갈 것을 미리 내다보고
천지공사로서 집행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체(道體) 조직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육임(六任)에 대한 공사이다.
이와 같은 공사는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날 칠성공사를 마치면서 고수부님은“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야 모든 조화와 기틀을 정하느니라.
…앞으로 모든 일을 고민환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이공사로서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를 자신의 대행자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종리 교단의 운영권과 제반 권한을 고민환에게 위임하였다.


 
 그 후로 태모님께서 모든 도정을
민환과 상의하여 처리하시매 성도들은 민환을 태모님의 정통 후계자로 인식하더니(11:98)
 
 그해 음력 5월 17일이다. 고수부님은 갑자기 외출을 하였다.
고수부님 자신은 가마를 타고 박종오, 고민환, 김수열, 김수응, 고찬홍,
이용기, 김재윤, 강원섭, 강사성, 전준엽, 서인권, 김종기(金鍾基), 주종한(朱鍾翰),
문인원(文仁元), 백종수(白宗洙), 송사일(宋士日), 박남규(朴南奎), 진희만(陳喜萬),
이석봉(李碩奉) 등 열아홉 사람을 따르도록 하였다. 고수부님의 행차는 가히 장관이었다.

 
 태모님께서 조종리에 계실 때 출행하시는 일이 많지 않으나
혹 대흥리나 먼 곳으로 행차하실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시어 기차를 타시거늘
가마의 앞쪽을 마루에 올려놓으면
태모님께서 방에서 나오시어 버선발로 가마에 오르시고 성도들이 가마 안에 신발을 넣어 드리니라.


가마는 네 사람이 메고 항상 교대할 가마꾼들 네 명이 그 뒤를 따르니
태모님께서 돌아오실 때는 가마꾼들이 미리 부용역에 나가 대기하다가 모시고 오는데
조종리에 당도하시면 당산(堂山) 마을에 있는 당산나무를 한 바퀴 돌고 도장으로 들어가시니라.
이렇듯 항상 수십 명의 성도들이 태모님을 모시고 길게 뒤를 따르니
그 모습을 구경하러 나온 인파와 함께 온 마을을 하얗게 덮으매 마치 신관 사또의 부임 행차 같더라.(11:107)


 
 정읍 수성리 구미동(龜尾洞: 현재 정읍시 수성동 구미동)에 당도하였을 때
고수부님은 김수남의 집으로 가서 공사를 행하였다. 정확한 공사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공사과정은 대충 그러하였다.
고수부님은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한 뒤에 전준엽을 그 앞에 세우고“누구도 감당치 못하고 준엽이나 감당하리라”고 하며
무엇인가 써서 불살랐다.
이어 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여 시래기 하나를 담갔다가 꺼내어 위로 올렸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공사를 마친 뒤에 고수부님은 고민환, 주종한, 백종수, 김종기, 김수응, 문인원, 김재윤 등
일곱 성도들은 김수남의 집에 머물러 있게 하고 나머지 열두 성도들을 데리고 김수남의 집을 나섰다.
고수부님이 도착한 곳은 대흥리였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신대원의 집에 처소를 정한 뒤 공사를 행하였다. 공사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11:109∼110을 참조할 것). 그리고 20일 오후에 고수부님은 차경석의 집으로 갔다.


 
 그날 차경석은 휘하의 여방주를 시켜 쫓아냈던 한달 전과는 달리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집안으로 고수부님을 맞아들인 차경석은 교자상을 차려 올렸다.
교자상을 앞에 놓고 앉았던 고수부님은 갑자기“경석아∼”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차경석은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보았다.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비록 보천교가 내분을 겪고 있었으나 (적어도 숫자적으로는) 6백만 신도를 거느린
증산 상제님 계열 최대 교파인 보천교 교주요, 조선 팔도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천자 등극설의 주인공이다.
차경석의 입장으로서는 고수부님의 하대가 민망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전날의 경석이 아니요,
이제는 만인의 두목이니 전날과 같이 경홀한 말을 버리시지요.”
 
 “뭐라고 했냐?”고수부님은 똑바로 차경석을 쳐다보았다.
“ 네가 천자라 하나 헛천자[虛天子]니라.”고수부님은 교자상에 놓인 큰 배를 들어 차경석의 목덜미를 쳤다.
놀란 차경석은 황급히 몸을 피하여 문밖으로 나갔고 여방주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고수부님을 끌어냈다.
보천교 본소를 나온 고수부님은 성도들과 함께 조종리로 향했다.

 
 고수부님이 출행 중에 조종리 본소로 돌아올 때의 일화 —.
고수부님이 먼 길을 행차할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서 기차를 이용하였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이미 얘기하였다.
그날 행차도 마찬가지였으나 부용역 이후부터는 좀 달랐다.
부용역 앞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온 고수부님은,
 
 “내 머리를 땋고 댕기를 달아라”고 말했다.
시종하는 여신도가 얼른 붉은 댕기를 땋아 놓았는데 47세의 장년인
고수부님은 영락없이 시집 안간 노처녀였다.
 
 부용역 앞 1백 미터 전방에는 김제군 백구면·공덕면·용지면의 합동 주재소가 있었다.
노처녀로 변장한 고수부님은 신도들을 이끌고 맨 앞에 서서 담뱃대를 휘휘 저으며
큰 소리로“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시천주주」를 외우며 걸어갔다.
원래 주문을 욀때는 자신도 모르게 엄숙해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 날 고수부님의 행동은 매우 희화적이었다.
「 시천주주」를 마치 노래하듯 욀 뿐만 아니라‘갈 지(之)’자 걸음으로
신작로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주재소 쪽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었다.


 
 주재소 앞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일본순사들이 앞을 막고“뭐이가, 너희들?”하면서 검문을 하였다.
고수부님이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잠시 후 일본순사대장이 다가와 고수부님을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
태산같이 요지부동한 자세로 앉아 있던 고수부님이 담뱃대로 순사대장의 손을 딱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더욱 큰 소리로 “…신천지 가가장세 일월일월 만사지”를 읊조렸다.

 
 잠시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던 일본순사들이
고수부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아노∼ 기찌가이!
기찌가이!(あの∼ きちがい! きちがい! : 저∼미치광이! 미치광이!)”하고 놀렸다.
그리고 성도들을 향해“저런 미친년을 따라다니다니,
저 놈들도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로군”하고 비아냥거릴 뿐 더 이상 검문을 하지 않았다.


주재소를 무사히 통과하여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에 이르렀을 때 고수부님은“가마를 대령하라”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흥리 보천교 본소에 다녀온 닷새 뒤인 5월 25일, 고수부님이 행한 공사는 의미심장하다.
고수부님은 항상“천지를 믿고 따라야 너희가 살 수 있으니 천지 알기를 너희 부모 알듯이 하라”(11:114)고 말했다.
물론이와 같은 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그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증산 상제님 역시“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2:26)고 했다.
천지에 중심을 둘 때는 천지가 곧 억조창생의 부모가 되지만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공사는 결국 인사적인 문제에 가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날 공사는 준비과정부터 장엄하였다. 도장 마당 동서남북에 각각 단을 쌓고 푸른 기와 흰 기,
붉은 기, 검은 기들을 각 방위에 세우고 중앙에는 삼층 단을 쌓고 푸른 용과 누런 용을 그린 큰 황색 기를 세웠다.
동서남북 각 깃발마다 성도 열다섯 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모두 1백15명의 신도들이 참가한 대규모 천지공사이다. 중앙 단 위에 큰 등과 작은 등 열네 개를,
네 방위에는 각기 작은 등 열다섯 개씩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중앙과 네 방위에 각기 제물을 진설한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다.
고수부님은 뭇 신도들을 지휘하여 중앙과 사방에 돌아가며 절하게 한 뒤「시천주주」를 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고수부님 자신은 제단으로 나와‘천하 만민의 죄업을 풀어 줄 것과
온 세계에 새로운 행복을 내려 줄 것’을 증산 상제님께 기도하였다.
 
 고수부님이 한창 기도를 올릴 때였다. 바람 한 점 없이 청명한 날씨인 터라
네 방위의 깃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중앙의 황기가 별안간 사방으로 펄럭였다.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누런 물이 마치 비를 흩뿌리는 듯 사방으로 뿌려져 신도들의 옷이 모두 누렇게 젖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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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