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제7회] 거룩한 생애
 제16장 소작답 스물네 마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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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바뀔 때에는 대두목이 나오리라. 그래야 우리 일이 되는 거다.”(道典11:54:3)
 
 산산 골골 3·1운동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1919년, 그해 윤7월 18일에 조종리 본소 도장이 완공되었다.
지난 해 11월부터 도장을 짓기 시작하였으니까 열 달이 걸린 셈이었다. 고수부님은 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네 사람들이‘도집’이라고 부르게 될 이 도장은 마을에서 그중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도장 뒤에는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 사이사이로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한옥으로는 큰 집이었다.
앞에서 보면 세 칸인데 겹집으로 되어 있어서 총 여섯 칸 겹집 전퇴였다.

 
 고수부님은 도장에서 신도 20여 명과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당장에는 치성을 올리시는 것 외에는 다른 신정(神政)을 행하지 않았다.
소작답 스물네 마지기를 붙여 농사나 감독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치성을 올릴 뿐이었다.
소작답은 전주부호 백남신 성도의 아들 인기가 설립한 화성농장 김제관리소에서 마름으로 일하고

있는 강사성 성도가 주선한 것이었다.

 

인류가 진멸지경이 될 후천 가을개벽이 저기 저만큼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는데
‘천지의 어머니’된 고수부님이 한가한 듯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궁금하다. 무오년 옥화 때문일까.
그럴 법도 하지만, 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당시 고수부님이 일체 바깥일을 하지 않은 채

수행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항상 새벽닭이 울고 난 뒤에 주문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고 쩌렁쩌렁했든지 건넛마을

원조 마을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고수부님이 아무리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어도 당신의 명성을 받들고 찾아오는

신도들의 발길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조종리 도장을 찾아오는 신도들은 늘어갔다.
당시 조종리 사람들의 증언에 기대면 고수부님을 한번 대면하려고 해도 웬만큼 신앙해서는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장 안팎은 거의 매일같이 북적거렸다.
고수부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특히 신도들한테는 곧 전범이 되는 것은 당위일 터였다.


당신이 주로 수행을 하고 계셨으므로 도장을 찾아온 신도들도 대부분 수행에 임하였다.
방마다 앉아서 주문을 외는 등 수행공부를 하는 모습이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기록이 없으므로 당시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수행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추측할 수 있는 정황 근거는 있다.
그때 조종리 도장에는 부엌일 하는 여자신도 두어 명이 있었는데 부엌에서 칼질하는 소리가 조종리 바깥까지 끊이지 않았다.
신도들의 수행공부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수부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고수부님은 항상 큰 방에 앉아서 날이 따뜻하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냈다고 한다.

2006년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가이드는 “천지신명들이
태모님의 하명을 받기 위해 장문(將門)을 형성하므로 문을 열어놓고 계신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해 8월, 전북 옥구에 괴질(콜레라)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괴질 공포가 확산되는 가운데 고수부님을 찾아와 의지하는 신도들이 더욱 많아졌다.
‘만백성의 어머니’수부로서 어찌 모른 체 하고 뿌리 칠 수 있겠는가. 고수부님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옥구사람 고민환(高旻煥: 1887∼1966)과 이근우(李根宇, 1890∼1967)가 조종리 본소를 찾아와 입도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수부님 도문에서 수석성도가 될 고민환은 증산 상제님 도문의 수석성도 김형렬과 비교되는 인물이다.


 
 고민환 —. 본관은 제주, 호는 성포(聖圃, 고수부님이 내려 준 도호)다.
500석지기 부호의 아들로서 일찍이 구도에 뜻을 두고 정진하였던 인물이다.
한때 군산은적사로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한 경험도 있었다. 얼마 동안 승려생활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전하고 있는 승복을 입은 그의 초상화로 볼 때 꽤 오랜기간 동안 불교에 몸담았던 것 같다.


고민환은 불교는 물론이지만 유학과 신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었다.
문밖출입을 할 때는 항상 말을 타고 다녔으며 성품이 온순한 학자로서 사욕이 없고 남과 시비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행적을 수집하여『선정원경(仙政圓經)』을 집필하게 된다.


 
 고민환과 이근우가 조종리 본소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때 고수부님이 고민환을 향해“어디에 사느냐?” 고 물었다.
 
 “옥구군 성산면 성덕리에 삽니다.”
 “좋은 곳에 사는구나. 앞으로 그곳을 떠나지 마라.”
 고수부님은‘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세 번씩이나 거듭다짐을 받은 뒤 또 물었다.
 “그곳에 오성산이 있느냐?”
 “예. 있나이다.”
 
 “그러하냐. 그곳에 수천 칸이라도 지을 만한 집터가 있느냐?”
고수부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고민환은“수만칸이라도 지을 수 있나이다”고 대답했다.
고수부님은 기다렸다는 듯이“좋구나. 그러면 좋은 곳이니라”하고 말했다.
당장의 고민환으로서는 고수부님이 왜 그런 질문을,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은연중에 오성산으로 갈 뜻을 드러낸 것이었다.


 
 증산 상제님은 재세 시에 오성산에서 몇 번에 걸쳐 공사를 집행했다.
그 중에서도 고수부님과 관련된 공사를 행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1905년 오성산에 가서“세상이 칭찬할 만한 곳이라”(6:20)고 하였던‘고수부님의 오성산 은둔 공사’,
1908년 겨울‘임옥에서 땅빠진다’(10:9) 공사 등이 그것이다.
지금 고수부님의 말씀은 증산 상제님의 공사와도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고민환은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 가운데 김형렬 수석성도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첫 대면부터 그럴 싹이 보이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고수부님은 첫 대면부터 고민환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인품도 그렇지만 그가 오성산 아래 옥구 성덕리에 살고 있다는 것도 더욱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첫 대면 얼마 후 부터 고민환은 조종리 본소에 머물면서 고수부님의 수종을 들었다.

 
 조종리 도장을 찾는 신도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임피·옥구는 물론 각 지방에서도 고수부님을 찾아 조종리로, 조종리로 밀물같이 밀려왔다.
고수부님이 도장 개창을 선포한 이래 단 한 번도 거르지 않는 행사 중의 하나는 치성봉행이었다.
정기적인 큰 치성은 경우 음력 1월 3일의 정삼(正三)치성, 6월 24일 증산 상제님 어천치성,
9월 19일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 그리고 양력 12월 22일경의 동지치성이 있다.
이밖에도 4월 초파일 치성(후에 치성에서 제외시켰다), 24절후 치성들이 거행된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도(神道)로 역사하는,
모든 일에는 신이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치성은 곧 신명을 받들고 신도와 교류하는 성스러운 제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치성에 온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은 당위였다.
정성에는 물질적인 것도 포함될 터. 신도 수가 늘어나자 치성 때마다 많은 경비가 소요됐다.
성도들은 지역별로 구획을 정하여 치성 경비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내가 농사를 지어서 여유가 있으니 그 돈으로 치성때 자금으로 쓰라.
가난한 신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으니 그리 알라.”고수부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사람이 적고 그로 인해 도무(道務)진행이 어려움을 한탄하지 말라.
판밖에서 성도(成道)하여 들일 때에는 사람바다를 이루는 가운데 너희들의 노고라 크리라.”

 
 고수부님의 말씀 가운데‘사람바다를 이루게 된다’는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판밖에서 성도하여 들일 때’라고 했으므로
도운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볼 때 후천 가을개벽 직전의 도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무렵의 조종리 도장 상황을 추정하면 그랬다. 신도들은 일을 하고 싶어서 죽겠는데
도대체 고수부님이 허락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이라고 언제까지 일을 하지 않고 농사만 짓고 있겠는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신도들은 답답했을 것이다. 하루는 성도들이 고수부님께 물었다.

 
 “어머니, 우리 도판이 언제나 발전해서 사람도 많이 생기고 재력도 풍족하게 될는지요?”
 
 성도들은‘사람도 많고 재력도 풍족’한 대흥리 교단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당시 조종리 성도들은 차경석이 이끄는 대흥리 교단을 퍽 부러워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마라. 내 일은 셋, 둘, 하나면 되나니,
한사람만 있으면 다 따라 하느니라. 세상이 바뀔 때에는 대두목이 나오리라. 그래야 우리 일이 되는 거다.”
 
 이 말씀은 고수부님이 대도통을 하던 날 차경석 성도를 주인으로 행하였던‘이종 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고수부님은 차경석의‘이종’한 도운을 정리내지 갈무리하여 결실도운으로 매듭짓게 될 추수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추수할 사람’이 대두목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말씀’에서‘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곧 후천 가을개벽을 가리킨다.
그때 대두목이 출세하게 되고, 그가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추종하게 될 것이며,
그때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고수부님의 도운‘말씀’은 계속된다.

 
 3·1운동의 함성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던 그해 가을 어느 날,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안흥마을에 사는 고찬홍(高贊弘: 1875∼1951)이 조종리 본소를 찾아왔다.
대흥리 도장 때부터 신앙한 고찬홍은 인품과 풍채가 좋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천석꾼 부호로 항상 세루 두루마기 차림을 하고 다닐 정도로 깔끔하고 엄격한 면도 있었다.
고수부님에게 문안을 드린 고찬홍은 포교운동을 크게 일으킬 것을 청했다.

 
 고수부님이 대답한다. “장차 너희들에게 찾아오는자만 거두어 가르치기도 바쁘리라.
이제 새로 포교할바가 아니요, 먼저 몸 닦음을 근본으로 삼아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남에게 척짓지 말고, 농사에 힘써 때를 기다리라.”1년 전, 강응칠과 강사성에게도 이와 비슷한 대답을 했었다.
“포교 운동은 오직 천명을 좇아 시기라 이르기를 기다릴 것이며,
오는 자는 오고 가는 자는 가게 하여 그들의 뜻에 맡김이 옳으니라.”

 
 3·1운동 실패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저 교활한 문화통치 아래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민중들이 구원의 빛을 따라 찾아올 곳은 오직 고수부님의 도장일 터.
고수부님은 지금 도약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고수부님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하자니까 전하지, 알고보면 전하기가 아까우니라.
앞으로 좋은 세상 나오리니 너희들은 좋은 때를 타고났느니라.”

 
 들리는가. 당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도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고수부님의 말씀이 당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19년 그때 그 시절은 물론이요, 오늘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한테 쩡쩡한 종소리처럼 들려주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제17장 평천하(平天下) 치천하(治天下)
 
  “잘못된 그 날에 제 복장 제가 찧고 죽을 적에 앞거리 돌멩이가 모자라리라.”(11:70:9)
 
 1921년 증산 상제님의 성탄치성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렵 전준엽(田俊燁: 1891∼1945) 성도가 조종리 본소로 찾아오는 신도들을 수습하여
도장 유지의 원칙을 정할 것을 고수부님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전준엽은 고찬홍, 이근목 성도와 더불어 의논한 끝에 지역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본소에 있는 간부 성도들이 직접 나섰다. 전준엽과 이근목은 충청남도 일대,
고찬홍은 임피·옥구를 돌아 회의소집을 통지했다.

 
 9월 초닷샛날 조종리 도장에서 지역대표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는 그랬다.
각 지방을 열다섯 구역으로 나눈다. 1년에 열네 번씩 올리는 치성은 각 구역이 나누어 맡는다.
치성 경비는 대치성에는 120원, 소치성에는 80원씩 각 구역이 순차적으로 담당한다.
그리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그해 증산 상제님 성탄절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
보고를 받은 고수부님도 허락했다.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일—. 그날 성탄치성에 참석한 신도는 1백여 명이 넘었다.
때는 여전히 폭압의 시절이다. 때가 때인 만큼 1백여 명이 치성에 참석한다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치성이 한창 진행될 때 고수부님은 왠지 조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부랴부랴 치성을 마친 뒤에는 신도들에게 “…가라. 가라. 속히 돌아들 가라”고 재촉하였다.
고수부님의 명이 빗발쳤으므로 신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치성 날 신도들을 쫓아내듯 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수부님의 심사도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이다. 별안간 도장 바깥이 왁자지껄하였다.
김제경찰서에서 나온 순사들이 굶주린 이리떼같이 달려들어 도장 안팎을 샅샅이 수색했다.
아. 고수부님은 바로 이런 불상사가 있을 줄 알고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흠 잡힐 만한 증거물이 나올 리 만무하였다. 수색을 마친 순사들은 할 일이 없다는 듯 터덜터덜 돌아갔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증산계(甑山系) 교단을‘음모결사(陰謀結社)’라고 지목하여
크게 탄압하는 중인지라 많은 신도가 모여 있으면 검속(檢束)을 면치 못할것이므로 태모님께서 그 기미를 아시고
미리 해산하게 하심이더라.
10월 보름날 밤에 치성을 올릴 때 참석한 신도가 300여 명이라 또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거늘
태모님께서 천지를 안개로 덮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하게 하시니 신도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가니라.(11:60)

 
 얼마 후 옥구군 구읍면 수산리에 사는 전선필(田先必: 1892∼1973)이 조종리 본소에 찾아왔다.
문후인사를 받은 고수부님은 대뜸“너 오다가 사람 봤느냐?”하고 물었다.
 
 “무슨 사람 말씀입니까?”
 “야, 이놈아! 사람 말이다.”
 “좀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영문을 알 수 없는 전선필로서는 답답하기만 하였다.
고수부님은 계속“야, 이놈아! 사람 말이다, 사람!” 하고 호통을 쳤다.
같은 문답이 잠시 이어진 뒤에야 전선필이 알아듣고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고수부님은“사람, 사람, 사람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참으로 사람이 없구나.”하며 크게 탄식했다.
무슨 뜻일까. 『도전』은 천지대업을 개척하는 데 제대로 된 일꾼이 없다는 한탄어린 얘기라고 풀이한다.

그저 개벽 타령이나 하고 도통이나 꿈꾸며
장마철 개구리처럼 입으로만 주문을 읽어대는 유치한 신앙을 후려친 것이라는. 그랬다.
고수부님이 지금까지 소작답이나 부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은 참된 일꾼을 기다려 온 것이었다.
때의 무르익음과 함께. 그러나 고수부님이 기다리는 참 일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지금 그런 일꾼이 없음을 탄식하는 것이었다.

 
 1922년이 밝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해가 바뀔수록 더욱 확고해져 가고 있었다.
일제에 저항하던 조선인의 불타는 기개도 점차 수그러 들어갔다.
그 정도로 일제의 간교한 문화통치가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큼 탄압은 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해 정월 초하룻 날 고수부님은 조종리 동네아이들의 세배를 받았다. ‘큰 어머니’의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고수부님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아이들도 고수부님을 잘 따랐다.
아이들을 부를 때는“야, 칠성아!, 칠성동자야!”하고 불렀는데 물론 호칭에 맞는 기운을 붙이려는 의도였다.


또한 아이들의 부모에게는“저 동자들을 잘 가꾸라”하고 타이르기도 했다.
치성을 마치면 성도들에게 “야, 과일은 칠성 아이들 차지다. 너희들은 먹지 마라.”하며
아이들에게 먼저 내려 주기도 하였다.
 
 당시 조종리에 살았던 강용 노인의 증언—. 내가 여섯 살 먹어서부터 세배를 다녔는데 열두 살까지 뵈었다.
내가 학생모자 쓰고 세배를 가면“이놈, 개떡모자 썼다.”하시고“개떡모자 벗어라.”하신다.
그런데 안벗고 있으면 오셔서 손수 벗기시고 머리를 만져 주시며“장난을 좀 치게 생겼다.”하셨다.
한번은 일곱, 여덟 살경에 세배를 갔는데
그 곳에는 항상 방 앞에 비서가 있었다. “들어와라.”하시자 비서가 들여보내 주어들어가 보니


그분은 방석에 앉아 계시다가“세배 왔어?”하시고“해야지.”하시며 세배를 받고,
그리고 사람을 부르셨다.“ 이놈들을 잘 먹여야겠는데 뭘 좀 내오너라.”하시고 가져온 것이 시원찮으면
직접 나가셔서 먹을 것을 챙겨들고 오셔서“먹어라.”“천천히 잘 먹어라.”하시며
머리부터 전부 쓰다듬어 주시며“잘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셨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도를 반대하는 집안인데도 그렇게 잘해 주셨다.
지금까지 그렇게 훌륭하시고 따뜻한 분을 뵌 적이 없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다.
그런데 열두 살 넘어서는 그분을 못 뵈었다. 조종리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1923년이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틈만 나면 성도들에게 심법 공부를 가르쳤다.
어느 날 고수부님은 강사성 성도에게“‘마음 심’자를 써 놓으라”고 하였다.
지필묵을 챙겨온 강사성이 붓에 먹을 꾹 찍어 큼지막하게 심’자를 썼다.

잠자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고수부님은“아느냐? 이 심’자가 천하만사의 원줄기니라.
누구든지 이 글자의 생김새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말해 보라”고 하면서
앞에 앉아 있는 성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성도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다.
 
 

고수부님은 말한다. “마음 심 자의 아래 모양은 땅의 형상이요,
위의 점 세 개는 불선유(佛仙儒)라. 온갖 부귀영달(富貴榮達)과 생사(生死)의 있고 없음도 이 마음 심 자에 있느니라.
”언제인가 유학자 신도 백용기(白龍基)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했다.
그때 고수부님은 “그것이 마음 심 자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만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명하였다. 백용기가“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을 때
고수부님은“그러고도 학자라고 자부하며 안하무인(眼下無人) 하느냐.
내가 일러 줄 테니 배우라”고 준엄하게 꾸짖으며“아래의 활은 천지 반월용(天地半月用)이요,
세 점은 불선유(佛仙儒)니라”고 가르쳐 주었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삼통[三桶, 『도전』에 따르면
고민환 성도는『선정원경』에서 당시 성도들이 삼통을 당통(黨桶)ㆍ병통(病桶)ㆍ공당통(共黨桶)으로 생각했다고 하였다-
인용자 주]에 싸이지 말라. 오직 일심(一心)으로 심통(心通)하라.”하시고“삼통에 휘말리면 살아날 길이 없느니라.”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올바른 줄 하나 치켜들면 다 오느니라.


평천하(平天下)는 너희 아버지(증산 상제님을 일컬음-인용자주)와 내가 하리니
너희들은 치천하(治天下) 줄이나 꼭 잡고 있으라.”하시고 “도(道) 살림도 그침없이 제 살림도 그침없이,
끈 떨어지지 말고 나아가거라.”하시니라. 자리다툼하지 말고 잘 닦으라.
제 오장(五臟) 제 난리에 제 신세를 망쳐 내니 보고 배운 것 없이 쓸데없는 오장난리 쓸데없는 거짓지기,
쓸데없는 허망치기로다. 잘못된 그 날에 제 복장 제가 찧고 죽을 적에 앞거리 돌멩이가 모자라리라.(11:70)


 
 ‘말씀’중에‘올바른 줄 하나’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집행한 천지공사를 인사로 집행하여
선천 난법시대를 문 닫고 후천 진법시대를 개벽하게 될 대사부의 출세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최근에 고수부님이 전개한 일련의 심법공부 공사에 대한 결론에 다름 아니다.
 
 그해 음력 7월 20일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에 사는 전대윤(田大潤: 1861∼1933) 성도가
아들 김수응(金壽應: 1889∼1936)과 함께 조종리 본소를 찾아왔다.
전대윤과 김수응, 그리고 그의 동생 수남(壽南: 1900∼1932) 일가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고수부님 도장의 독실한 성도들이었다.

 

특히 대흥리 첫째살림 도장시절부터 신앙을 시작한 전대윤은 고수부님보다 19살 연상이었으나
용화동 셋째살림 도장에서 고수부님의 내수(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