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제6회] 거룩한 생애

 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제6회)
 거룩한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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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상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제14장 고수부님과 도운의 뿌리 분열 시대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태모님께서 거처하시는 방의 출입을 금하니라.”(道典11:39:8)
 
그 해 10월 30일 독실한 신앙인 유일태 성도가 고수부님을 찾아왔다. 등에 큰 혹이 있어

고통을 겪던 전주군 초포면 전당리(全堂里) 진기(陳機) 마을에

사는 77세 된 이태우(李台雨)가 유일태에게 혹을 없애 달라고 애걸한다는 것을 아뢰었다.
 
“네가 가서 청수 모시고 기도한 후에‘시천주주’를 읽으면서 혹을 문질러

풀어 주도록 하라.”고수부님이 말했다.
유일태가 이태우의 집에 가서 고수부님이 일러준대로 하였는데

곧바로 혹이 터져 약을 쓰지 않고도 완쾌되었다.
 
이태우의 혹을 치료해준 직후였다. 문둥병을 앓아 눈썹이 하나도 없는

한 사람이 대흥리 도장에 찾아왔다.

불쌍히 여긴 고수부님은 그 자리에서 병을 낫게 하였는데(어떤 식으로 병을 낫게 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곧바로 눈썹이 다시 생겨났다.
 
위의 두 치병(治病)은‘자손줄 (태워주는) 공사’와 함께

앞으로 고수부님이 행하게 될 천지공사의 한 특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에 따르면 고수부님이 행한 천지공사의 많은 부분은 치병 공사

 

(자손줄 공사도 종종 행하여진다)가 차지한다. 증산 상제님이 치병 공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양적으로 고수부님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고수부님이 행한 천지공사에 대한 행적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치병 공사가 상대적으로 많아 보일 수는 있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과 당신의 공사에 대해“상제님의 천지공사는 낳는 일이요,

나의 천지공사는 키우는 일이니라”(11:99)라고 말했다. 그러니까‘부생모육(父生母育)’정신이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을

(당신들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만백성의 어버이’요,‘ 천지의 부모’라고 얘기하였다.

 

천지공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정표이다. 특히 고수부님의 자손줄 공사와 치병 공사에는

만백성의 어머니, 천지의 어머니로서‘낳아서 키우는’ 어머니의 본성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고수부님이 행하는 많은 자손줄 공사와 치병 공사에 대한 얘기는 생략한다.)
 
1915년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 하에 놓인 지 5년이 지난 그 해, 고수부님 도장을 박차고 나간

김형렬은 모악산 금강대에서 1백일 수련을 마친 뒤 신안(神眼)이 열려 풍운조화를 짓는 경지에 올랐다.

일부 기록에는 김형렬이 신안이 열렸을 때‘영서(靈書)’를 받았다고 전한다.
 
금강대에서 하산한 김형렬은 교단을 개창하고 포교에 전력하였다. 김형렬 교단은

개창 초기에는 교명이 없었다. 금산사 미륵불을 대성(大聖)의 영체로 받들었으므로 일반사람들은

금산사 미륵불을 받드는 교단 정도로 알았다. 그 후 불교진흥회(1921)라는 교명을 거쳐

이듬해 9월에 미륵불교(1922)로 바꾸고 본부를 모악산 금산사에 두게 된다.
 
김형렬 교단의 소식은 고수부님 도장을 이탈한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다른 성도들에게

자극이 됐던것 같다. 그들 역시 신력(神力)을 통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들은 정읍군 감곡면 통사동(通司洞)에 있는 영모재(永慕齋)에 모여 도통 공부에 들어갔다.

박공우, 김경학, 김광찬, 문공신 등 20여 명이었다.

 

원래 김광찬 성도는 성품이 호탕하고 급한 성격으로 남과 잘 다투는 편이었다. 그가 공부하는

도중에 돌연 광기가 발동하여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 일을 계기로 성도들은 도통 공부에 회의를 품고 뿔뿔이 흩어져 돌아갔다.
 
한편 대흥리 본소에서 각 방면의 포교활동을 감독하고 있던 이치복 성도는 차경석이
전횡을 휘둘러

성도들을 배척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한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 스승 밑에서 같이 공부하며 9년 천지공사에 수종을 들었던 성도들이다.

그들이 하루아침에 갈라져 도장을 떠나는 광경을 지켜보던 이치복은 본소 이전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해 봄, 이치복은 김형국 성도와 만나 그가 살고 있는 장성 필암(筆岩)에

집 한 채를 지어 본소를 옮기고 고수부님을 모시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고수부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수부님은 도장 분열의 진원지인 차경석이 미웠으나

등을 질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고수부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치복의 본소 이전 운동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해(1916년) 가을에 이치복은 다시 움직였다.

채사윤 성도와 함께 경북지역 신도들과 의논하여 본소를 원평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원평에 집 한 채를 사 놓고 다시 고수부님을 설득했다.

 

고수부님 역시 차경석의 전횡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고수부님은 본소 이전을 허락하였다. 이, 채의 본소 이전 운동은 탄력을 받았다.
 
그해 동지 다음 날 고수부님을 모시고 본소를 원평으로

이사하기로 계획한 이치복은 동지 하루 전날 각지방 신도 대표들을 차윤경의 집으로 소집했다.

그날 저녁에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 사는 강사성(姜四星:1885∼1961) 성도가 대흥리 본소에 도착했다. 이치복들로부터 소집 통지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아직 차윤경의 집에 모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기 전이었다. 본소는 전에 없이 고요했다.

차경석을 찾아간 강사성은“중요한 회의가 있다기에 왔는데 한 사람도 오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이오?”하고 물었다.
 
고수부님 도장에 입도하여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조종리 강참봉의 아들과 같은

또래의 한량들과 어울려 사냥 따위를 즐기며 살았던 강사성은 원래 성격이 드세어 대하기가

무척 어려운 인물이었다. 친해지기는 어려웠으나 한번 친해지기만 하면 흔히 하는 얘기로 간까지

꺼내줄 수 있는, 무슨 일이든지 한번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밀고나갈 위인이었다.
 
이, 채 성도들은 본소 이전 운동을 은밀하게 추진하였으나 차경석도 이미 알고 있었다.

큰 기국을 타고난 차경석은 또한 그만큼 치밀한 인물이었다. 바로 그 두사람이 만났다.

다음은 차·강의 대화-.
 
“본소를 원평으로 옮길 일을 의논하기 위해 이치복이 대표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지금쯤 윤경의

집에 모였을 것이오.” “본소를 옮기다니오. 그것이 상제님의 뜻에 합치된 일입니까?”
 
“불가하오. 불가한 일을 이치복이 어떤 야심을 갖고 계획하는 모양인데, 만약 이치복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상제님의 일은 허사가 될 것이오.”
 
“헛. 그러면 안 되지. 진실로 그러할진대, 내가 사모님께 찾아가 이사를 작파하게 하고

치복의 계획을 부서버려야겠소이다.”
 
차경석으로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강사성의 두 손을 꽉 잡은 차경석은“진실로 그대의 말대로

하여 이사를 중지케 한다면, 그대의 은공을 평생 잊지않으리다”라고 말하면서 이치복의 전횡을

한껏 부추겼다. 두 사람은 본소 이전을 막는데 의기투합했다.
 
차경석은 치밀한 조직력으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강사성뿐만 아니라 이윤수(李胤洙)까지 포섭하여 본소이전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짓날, 차경석의 부탁을 받은 이윤수가 먼저 고수부님을 찾아가 본소  이전의 부당함을 얘기했다.

뒤이어 강사성이 나타나 고수부님 앞에서 이치복의 과실을 들어 공격했다.
 
“원평으로 이사하신다 하니 누구를 데리고 가시려 합니까?”강사성이 물었다.
 
“치복을 데리고 가려 한다.”
 
“본소 이전 일의 가부는 사모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나

이치복이 사모님께 불명예스러운 말을 유포하여

항간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 자를 신임하다가는 뒷날 크게 후회할 일이 있을까 걱정됩니다.

”강사성은 이치복이 유포한 말과 증거들을 들어 낱낱이 지적하였다.
 
두 성도의 얘기를 듣고 고수부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도장의 내분은 어떤 식으로든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고수부님은 이치복을 크게 염려하시는

한편 성도들의 분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고수부님은,

“본소 이전을 작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본소 이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치복과 채사윤은 어쩔 수 없이 도문을 하직하고 물러갔다.

차경석의 전횡을 참을 수 없어 집요하게 본소 이전 운동을 추진했던 이치복은 동지 다음날

혼자 쓸쓸히 원평으로 이사를 갔다. 그 후 그를 따르는 일부 성도들과 함께 따로 교단을 창설했다.

훗날 제화교가 그것이다.

 

어디 이치복 성도뿐이겠는가. 일찍이 증산 상제님은 “도운(道運)의 개시(開始)가

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를 이루리라”고 하였다. 김형렬, 이치복은 물론 차경석에게 불만을 품고

고수부님 도장을 떠난 성도들이 각자 교단을 개창한 것이었다.
 
각 지방으로 흩어져 돌아간 성도들이 지방 신도들과 연락하여 따로 문호(門戶)를 세우니 이러하니라.

안내성은 순천 양율(順天良栗)에서, 이치복은 원평에서, 박공우는 태인에서 교단을 세우니라.

또 김형렬, 김광찬, 문공신, 김병선(金炳善) 등이 각기 문호를 여니 이로부터

각 교파가 분립하여 도운의 뿌리 분열 시대가 열리니라.(11:40)
 
김형렬의 미륵불교,

이치복의 제화교와 같은 여러 교단이 태동하기는 하였으나 고수부님 도장의

도세는 날이 갈수록 창성했다. 고수부님의‘큰 세 살림’도수가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은

논의를 계속하겠으나 대흥리 첫째 도장 살림은 1916, 17년이 그 절정이었다.

신도 수는 이미 수만 명에 이르렀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암울한 시절이었고,

 

또한 그만큼 고수부님이 전하는 태을주의 조화기적, 후천개벽과 구원의 소식이

당시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었다는 반증도 될 터였다.속담에‘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다. 도장도 인간의 모임이요,

 

인간이 하는 일이라 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갈등도 많아지는 것은 당위일 터였다.

그 갈등의 씨앗이 차경석 성도였고, 그의 전횡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칼을 뽑아 들었던 인물이

이치복 성도였다. 당장에 결판은 차경석 성도의‘판정승’으로 났다.
 
이치복 성도가 도문을 떠났던 그해 11월 28일 동짓날, 본소 이전 운동을 무력화시킨 차경석은

단 하루의 쉴 틈도 없이 반격의 칼을 뽑아 들었다. 동짓날 치성을 드린 후

차경석은 교체(敎體)조직을 발표하였다.

 

방주(方主)에 문정삼(文正三)·채규일(蔡奎一)·

채규철(蔡奎喆)·송영대(宋英大)·김천종(金千種)·한영진(韓永鎭)·

송명희(宋明熙)·류종상(柳種相)·김영두(金永斗)·최일문(崔一文)·박종하(朴種河)·박종식(朴種植)·

김형규(金泂奎)·김홍규(金洪圭)·채선묵(蔡善默)·신기섭(申基燮)·이원유(李元有)·

김명옥(金明玉)·조만원(趙晩元)·이용하(李容夏)·김혁중(金赫中)·이기호(李基浩)·

이두현(李斗鉉)·김철환(金喆煥) 24인이 임명되었다.
 
차경석이 방주 명단을 고수부님과 사전에 협의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24방주에 임명된 자들이 하나같이 차경석의 심복들이라는 점이다. 대반란이었다.

그렇게 차경석의 행동은 빨랐고 또한 주도면밀했다.

순식간에 고수부님 도장의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24방주 명단에 차경석과 특히 가까운

이상호(李祥昊)·백윤기(白潤基)·이교상(李敎祥) 등 3인의 이름이 빠졌다.

보천교연혁사』에는 차경석이 3인 심복을 별도로 불러“24방주에 부속되지 말고 단독으로

교무를 집행하라”고 다독거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도체조직 발표를 기점으로 그동안 물밑에서

실권을 행사하였던 차경석 성도가 마침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장 최고 지도자였던 고수부님으로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신을 당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이종동생에게. 증산 상제님이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하였던 일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차경석의 다음 수순은 지방도장 조직을 휘하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도장을 장악한 차경석은 24방주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신도들을 수습하고

자신에게 교권을 집중시켰다. 모든 일들이 차경석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의 마지막 수순은 고수부님 고립작전이었다.『 도전』기록을 보자.
 
먼저 태모님과 신도들 사이를 이간하여 인맥을 끊게하고 다음으로 태모님께서 거처하시는

방을‘예문(禮門)’이라 하여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출입을 금한 채 그 아내 이씨(李氏)에게만

 

태모님의 수발을 들게 하니 이는 겉으로는 태모님을 높이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신도들이

태모님을 알현(謁見)하는 길을 막기 위함이더라. 이로 인해 도장에는 신도들의 자취가 끊어지고

오직 경석이 그의 아우들과 더불어 태모님을 모시니라.(11:39)
 
차경석이 얼마나 철저하게, 얼마나 교묘하게 고수부님을 고립시켰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혹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도문 개창 이후 고수부님 도장의 실권자는 기왕에

차경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이 도문을 떠난 것은 그가 전횡을 휘둘렀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만큼 차경석은 도장 실권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런그가 왜 굳이 도체조직까지

감행하면서 통교권을 장악하고자 했을까. 왜 도장 최고 지도자인 고수부님과 신도들

사이에 장벽을 쌓았을까.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은 극히 희화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수부님은 경석과 얘기할 때마다 걸핏하면“네 이 놈, 경석아!”하고 말머리를 텄다.

고수부님은 도문 개창 이후 차경석이 하는 짓이 퍽 못마땅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증산 상제님이 짜놓은‘천지공사’도수를 키우기 위함일 터였다. 굳이 경석의 행동이

못마땅한 이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지의 어머니’입장에서 애정 섞인 표현일 수도 있다.
 
문제는, 입장을 바꾸어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교단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차경석의 입장에서 고수부님의 그와 같은 말머리

혹은‘말투’는 두 번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고수부님 도장에서는,

경석이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일 수밖에 없는 것을,

타고난 기국과 배포를 자랑하는 경석은 전자는 안중에도 없었고 단지 후자만 있을 뿐이었다.

 

차경석은 고수부님의 그와 같은‘말투’에

자신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와 같은 우려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고수부님 고립작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고수부님은 연금생활과 다름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대흥리 본소에는 성도들의 자취가 점점 끊어졌다. 고수부님 주위에는 차경석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형제들만이 얼씬거릴 뿐이었다.

 

고수부님으로서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형국과 다름없었다.

이따금씩 고수부님을 참배하기 위해 각 지방에서 찾아오는 성도들은 차경석을 먼저 만나야 했다.

 

차경석은 자기에게 순종한 자는 참배를 허락하고 거슬리는 자는 아예 참배를 막았다.

그러한 제한적인 참배도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참배객 자체의 발길이 끊어져버렸다.

고수부님이 거처하는 이른바‘예문(禮門)’에는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한 겨울 찬바람만이 맹렬한 기세로 기승을 부릴 뿐이었다.
 
1917년이다. 차경석이 손으로 태양을 가린다고 해서 완전히 가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수부님이 누구인가. 고수부님을 얘기할 때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전해 받은 후계자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의 대흥리 도장은 물론 과연 초장봉기지세로 난립하고 있는

김형렬 교단, 안내성 교단, 이치복 교단 등에서 신앙대상으로 받들고 있는 옥황상제이고,

고수부님은 바로 그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종통대권을 받은 까닭이다.

 

따라서 차경석이 아무리 고수부님 주위에

철옹성을 쌓고 신도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해도 도장의 최고 지도자는 예나 지금이나

고수부님이었다. 고수부님이 항성(恒星)이라면 차경석은(아무리 통교권을 장악했다고 해도)

한낱 행성(行星)에지나지 않았다. 항성은 천구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별자리를 구성하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다. 행성은 무엇인가.

 

중심별의 강한 인력의 영향으로 타원 궤도를 그리며 중심별의

주위를 도는 천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중심별의 빛을 받아 반사할 뿐이다.

중심별을 잃어버린 행성은 결국 빛을 잃어버린 채 혼돈과 암흑속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멀지 않은 훗날 차경석과 보천교(대흥리 교단)가 바로 그랬다.
 
징후는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6월 전남 무안군 장산도(長山島) 신도 김경범(金敬範)이 대구 감옥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평소 차경석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김의 아들이 대흥리 본소에

찾아와 수백 원의 돈을 요구했다. 차경석이 여비명목으로 10원을 주었다.

 

그 길로 김의 아들은 일본헌병대 천원분견소로 찾아갔다.

그는“아버지가 차경석을 신앙하여 많은 금전과 물품을 사기 당했다.

 

이 돈은 그 중 돌려받은 일부다”며 차경석을 고소했다.

이 무렵 헌병대에서는 점점 도세가 커지는 대흥리 본소, 특히 차경석을

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헌병대에서 곧바로 차경석을 연행했다.

 

이 사건을 고수부님이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최고 지도자에 의한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차경석은 열흘 후에 석방되긴 하였으나

언제 다시 잡혀 들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과 위기감을 씻어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해 음력 9월 19일은 차경석 모친의 회갑 날이었다.

차경석 모친이라면 고수부님에게는 이모가 된다. 그때까지 고수부님의

모친(차경석 모친의 언니)도 대흥리에 살고 있었다. 그 기쁜 날, 두 분 모친은 물론

고수부님과 차경석 형제들도 한 자리에 모였을 것이다.

 

바로 그날, 차경석은 휘하의 24방주와 그 밖의 교인대표 1백여 명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차경석은 지방으로 잠복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방주를 중심으로 연원체계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자리에서 북도재무(北道財務)에 김홍규(金洪奎), 남도재무(南道財務)에

채규철을 임명하여 교단의 재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고수부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조직개편이었다. 이미‘철의 장막’속에 갇혀 있는 고수부님은

단지‘간판’에 지나지 않았다. 고수부님 고립작전에 관한 한 차경석은 그렇게 철두철미했다.
 
지하로 잠적하는 차경석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고수부님이라는 존재였다.

차경석은 교단 간부들에게 모든‘예문(고수부님)’납객을 금지케 하는 등 교인 단속을 지시했다.

동생 차윤칠에게는“내가 없는 동안 그 어떠한 신도가 예문을 문후하기 위해 올지라도

모조리 거절하고 각기 연비를 찾아 방주에게 연락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교단의 뒷일, 특히 고수부님 고립작전과

연맥을 중심으로 한 조직 확장에 만전을 기한 뒤 차경석은 대흥리 도장을 떠났다.

이후 차경석은 긴 세월동안 전국 각 지방을 유리표박(流離漂泊)하게된다.

물론 그 사이에도 교단 조직을 배후에서 조종할 것이다.
 
차경석이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수부님의 처지가 좀 나아졌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대흥리 도장 사람들은 차경석이 있을 때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고수부님을 감시했던 것 같다. 마치 주인이 외출한 집을 지키는 머슴이

더욱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치듯. 이후 1년여 동안 고수부님은 신도들을 만나지 못하고

‘예문’이라는 허울 좋은 통제 아래 연금 상태와 다름없이 지내면서

홀로이 분노와 울분, 허망함을 달래게 된다.
 
 
제15장 무오년 옥화
“이를 일러‘무오년 옥화’라 하니라.

이로부터 농사에 마음을 두시고 한가로이 지내실 뿐이더라.”(11:49:12∼13)
 
내가 전북 김제시 공덕면 공덕리 송산마을을 찾아간 것은

고수부님 유적지 첫 번째 답사 때였다. 2박 3일의 강행군이 계속되던 날 답사팀 일행은

징게맹경(김제만경)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포장공사 중인 도로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차는 키 작은 나무 숲 사이로 난 언덕길을 따라 갔다.

포장이 되지 않은 붉은 황톳길이다. 얼마정도 갔을까. 차가 속도를 늦추는가 싶었는데

차창 밑 건너편 골짜기 아래쪽으로 작달막한 마을이 나타난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홉 살 이후로 크고 자랐던 대흥리에서, 당신의 손으로 개창했던 대흥리 도장에서,

그것도 도세가 한창 뻗어 나갈 때 누구보다도 믿었던 이종동생 차경석과 그의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못했던(그들을 버리려고 했다면 어떤 벌이라도

내렸을 것이다) 고수부님이 어느 날 갑자기 도장을 떠나

한 달여 동안 머물렀던 곳-, 바로 송산마을이다.
 
차는 송산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누가 세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훌쩍 뛰어 내리면

마을을 덮칠 것 같은 언덕 위에서 차는 약속이나 한 듯 정지했다. 일행은 망연한 눈길로 골짜기

건너 편 송산마을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많은 얘기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각자 침묵 속에서 마을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통하지 않았을까.
 
송산마을-. 마을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하여‘송산(松山)’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마을은 원래 천씨(千氏) 집성촌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경운기 한 대가 넉넉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이 누에처럼 길게 뻗어 있고 길 뒤쪽으로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잠시 후 차는 골짜기 아래쪽으로 구르듯 내려갔다.

마을 초입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일행은 동네 앞으로 난 길을 걸어갔다.
 
당시 고수부님이 머물렀다는 천종서(千宗瑞: 1879∼1956)

성도의 집은 마을 앞길을 끼고 중앙에 위치한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마당을 끼고

정면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집이다. 2006년 답사 때 가이드의 설명-.
 
“태모님께서 대흥리 도장에서 온갖 모욕을 받아가며

머무르시다가 대흥리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날 태모님께서 부용역에 내렸을 때

천종서 성도님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당시 여러 정황으로 보면 태모님께서 부용역에

도착하시는 같은 새벽 시간대에 꿈을 꾸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천종서 성도는 꿈속에서 추워서 떨고 있는 태모님을 보고 곧바로 부용역으로

가서 업고 왔다고 합니다.”
 
고수부님은 송산마을을 오랫동안 머물 거처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 도정(道政)을 보지 않은 것이 근거가 된다. 고수부님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 나무는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바람이 불어오는구나.

 

한도 많고 원도 많은 인간의, 여성의, 어머니의 삶을 체험하고,

만유생명을 해원하고 있는 고수부님이 가는 길이 그렇게 평탄할리 만무하였다.

 

뻐꾸기 둥지처럼 잠시 쉬어가려고 했던 이곳에서도 고수부님은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크게 회자됐던 사회주의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던 천종서의 큰아들에게

고수부님이 눈엣가시로 보였던 것이다.

 

그와 그의 무리들에게 고수부님은 한낱 구닥다리 미신을 퍼뜨리는 무당이거나

그 우두머리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로부터 행패가 자심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 그 자들은 모르는가. 굳이 전근대/근대를 얘기하자면 고수부님이야말로

전근대/근대를 아우르는, 그러면서도 이 땅의 최초의 근대여성 종교지도자라는 것을!
 
송산마을을 답사하고 우리 일행이 찾아간 곳은 송산마을

바로 옆 동네인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였다. 송산리에서 서쪽으로 1킬로 정도 되는

오솔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내리막길로 꺾어 내려가면 야트막한 언덕 밑에 수십여 가구가

모여 있는 조종리라는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나로서는 1999년과 2006년 답사,

두번에 걸쳐 답사를 했던 고수부님 유적지였다.
 
동쪽으로는 공덕면 공덕리, 서쪽은 수록리,

남쪽은 하정리, 북쪽은 제말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종리는 상조(上祖), 원조(元祖), 중조(中祖), 남조(南祖), 대산(岱山), 당산(堂山) 등

여러 마을로 이루어졌다. 우리일행이 찾아간 곳은 중조마을이다.

 

원조마을과는 논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중조마을은 조종리 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고수부님의 둘째 도장 살림이 차려졌던 곳으로

우리가 통칭‘조종리(조종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송산마을 답사 때 그랬던 것처럼 초입 언덕에서

한 동안 마을을 굽어보던 우리 일행은 붉은 황토밭 사이로 경사진 도로를 타고

마을을 향해 진군하듯 천천히 내려갔다. 마을은 우리가 가고 있는 언덕과 작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맞은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뒤편 언덕 너머가 하조 마을이다.

그리고 조종리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곳에 해발 30미터밖에

되지 않은 나지막한 야산이 하나 보이는데 이름하여 조종산(祖宗山)이다. 조종산, 조종리-.

얼마나 높고, 깊게 느껴지는 이름이냐.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으뜸가는 조상을 모신 산이요,

 

마을’이라는 뜻이겠다.

이곳에 고수부님의 둘째 도장살림이 차려졌다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저 작은 산을 조종산이라고 하고, 이 작은 마을을 조종리라고 한다면,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큰 이름이 쓰였다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무슨 까닭인고?
 
조종리는 4백여 년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조종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조종리라고 불리게 된 이곳은 마을이 생길 때부터

진주 강씨들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아니, 조종산 자체가 진주 강씨들과 연관되어

생긴 이름이다. 진주 강씨들이 역대 선영의 조산(祖山)을 만들면서

조종산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고수부님 도장의 신도 강휘만(姜彙萬: 1889∼1970)성도의 둘째아들 강송용(姜松容)

노인의 얘기는 좀 다르다. 조종리의 지명은 원래‘종자 종(種)’자를 썼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조종리에는 물이 많이 나와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이 동네만큼은 흉년이 드는 해가 없었다.

가뭄이 들어 다른 곳은 종자까지 없어져도 이 마을은 농사가 잘 되었으므로

조종리의 종자가 김제, 옥구까지 흘러들어가 쓰이곤 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증산 상제님, 진주 강씨와 (그들의) 조산인 조종산, 그리고 고수부님-. 그들 사이에 무슨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고수부님이 진주 강씨의 집성촌 조종리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도장살림을 차린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비록 증산 상제님이 짜놓은 도수에 의한 당연한 결과라고 해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믿었던 이종사촌 동생 차경석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대흥리 첫째 도장살림을 뿌리치고 나온 (진주 강씨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인)

고수부님이 찾아온 곳이 바로 진주 강씨 집성촌이었다면-. 고수부님은 조종리로 옮기기로

결정한 뒤“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 하나 보고 간다”(11:46)고 말했다. 수부도수란 그런가.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 어천 전이나 후에도 늘 함께 있었고, 함께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요, 도수일 터.
 
중조마을은 마치 표주박 같은 형국이다.

언덕길을 내려와 논바닥을 가로질러 표주박 손잡이 같은 마을 초입 길을 따라 들어가면

양쪽으로 길이 갈라진다. 고수부님이 이곳에 와서 본격적으로 도정을 펼쳤던 도장으로 옮기기

전에 한 달여 동안 강휘원(姜彙元) 소유의 오두막에 머물렀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었던 까닭이다. 방 한 칸에 부엌 한 칸이 전부였던 초가집이었다.

가이드는 마을 초입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 오른 편 채마밭을 가리켰다. 바로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오두막집 터다. 그 후 다시 찾았을 때 오두막집터는 마을회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수부님의 둘째 살림 도장건물은‘채마밭 오두막터’바로 위에 자리잡고 있다.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오두막 터를 왼쪽으로 끼고 약간 경사진 황토 길을 조금 올라가면

소나무와 대숲으로 둘러싸인 막다른 집이 나타난다. 제법 넓은 터라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농가와 다를 바 없다. 대문(건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에서 정면으로는 마당이다.

 

오른편 깊숙한 곳에 콘크리트 건물이 보이고 난간 쪽으로 비닐하우스 한 동이 서 있다.

1999년 답사 전에 보았던 사진자료에서 슬레이트 지붕(고수부님이 계실 때에는 초가였다)이었던

옛 도장건물은 헐려서 없어지고 대신 그 옆에 신축한 콘크리트 집이 있는데,

지은 지 4년이 되었다고 하니 도장건물은 1996년쯤에 헐린 것이다.
 
고수부님의 둘째 살림이 차려졌던 조종리 도장이요,

본격적인 고수부님의 10년 천지공사가 진행되었던 유적지-.
 
당시 마을사람들에게‘도집’으로 불렸다는 도장 터에는

고수부님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나는 황토 흙이 질척이는 마당가에 서서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현재의 집 주인은 당시 고수부님 도장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강휘만 성도의

장손 기룡씨라고 가이드가 귀띔해 주었다. 집 주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바쁜 농사일로 집을 비웠을 것이다.
 
도장건물을 나온 일행은 마을 앞길로 다시 나와 왼편으로 돌아갔다.

마을 어귀쯤에 반쯤 열린 삽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이드가 주인을 찾았다.

잠시 후 방안에서 한 시골노인이 나타났다. 강휘만 성도의 둘째아들 강송용 노인이었다.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은 나는 곧 인터뷰에 들어갔다.

 

고수부님의 인상에 대해 물었다.

강 노인은“당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키가 훌쩍 크고, 지금 세상에도 보기 드물 정도로

미인이었다”라는 말로 인터뷰 서두를 장식했다.『 도전』에는 고수부님의 용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태모님께서는 이목구비가 반듯하시고 용모가 아름다우시며

키가 크시고 서 계신 모습이 바르고 꼿꼿하시니라. 또 말씀은 점잖게 잘 하시고

목소리는 보통 여자와 달리 우렁차시어 호령하시면 주위가 우렁우렁 울리니 동네 사람들이

태모님의 모습을 뵙고 싶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니라. 태모님께서는 주로 비단으로

만든 한복을 입으시고 여름에는 모시옷을 입으시는데

 

항상 흰 저고리에 붉은 고름을 길게 달아 입으시며 치마는 푸른색이나

치자 물을 들인 노르스름한 색깔의 옷을 길게 늘어뜨려 입으시니라.

태모님께서 도장에 계실 때 날씨가 춥지 않으면 항상 방문을 열어 놓고 계시고 하루 종일

아무 말씀 없이 지내실 때가 많으시며 대문 밖에 잘 나오지 않으시거늘 종종 문 앞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시며 담배를 피우시면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더라.(11:65)
 
 

1918년이다. 그해 1월에는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의 윌슨(Thomas W. Wilson, 1856~1924)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비롯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망국의 설움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민족에게 한가닥 신기루와

같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랬으나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폭압의 계절이었다.

 

여기는 정읍 대흥리였다. 도장‘예문’에 갇혀 있다시피 한

고수부님은 벌써 여러 달 동안 신도들을 상대하지 못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월 9일, 유일태 성도가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고수부님을 찾아왔다.

고수부님은 반갑게 맞이하면서“간밤 꿈에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상제님께서 새우젓 세 단지를 주시며 한 단지는 천종서를 주고,

한 단지는 강사성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잠자코 유일태의 대답을 듣고 있던 고수부님은

“그러하냐. 새우젓과 같이 오장이 곯도록 썩어야 하느니라”고 말했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말씀일진대, 어찌 쉽사리 지나칠 수 있겠는가.

 

증산 상제님이 유일태의 꿈에 나타나 새우젓 두 단지를 천종서와 강사성한테 보내라고

한 이유는, 그리고‘새우젓과 같이 오장이 곯도록 썩어야 한다’는 고수부님의 말씀의 뜻은

곧 밝혀질 것이다. 아니, 후자는 이미 고수부님이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은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곰삭이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막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는 고수부님에게는 기쁜 일도 없지 않았다.

그해 6월 20일 딸 태종이 정읍군 우순면 초강리 연지평(蓮池坪) 마을 박노일(朴魯一)과

혼인을 한 것이었다. 고수부님과 딸 태종-. 어머니와 딸 사이지만 참으로 모진 인연이었다.

 

고수부님이 그랬듯이 태종 역시 어린 나이에 친아버지를 잃고 고수부님이 홀로 키웠다.

증산 상제님을 만나 천지대업을 이루는 일을 맡은 몸이었으므로 뭇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정인들

제대로 주었을까. 그런 딸이 장성하여 혼인을 하였다. 아무리‘천지의 어머니’된

고수부님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런 큰 어머니였으므로 감회가 없을 수 없을 터였다.
 
그렇게 태종은 출가를 하였다.

유일한 혈육인 태종이 시집간 후 고수부님은 다시 텅 빈‘예문’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담장 옆에 서 있는 벽오동나무의 넓은 잎이 하나 둘 떨어질 무렵인 9월 19일, 증산 상제님 성탄일이다.

 

이날 성탄치성을 정성스럽게 봉행한 고수부님은 평소와 같이 침착한 가운데 바쁘게 움직였다.

사흘 동안을 그렇게 보냈다. 예사로운 움직임이 아니었으나 주위에서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해 9월 19일은 고수부님 이모(차경석의 모친)의 진갑(進甲) 날이었다.

작년 바로 이 날, 차경석은 간부들을 불러 교단은 물론 고수부님 감시를 엄중하게 지시하고

지하로 잠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모를 일이로되,

고수부님은 이모의 진갑을 진심으로 축하했을 터이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고향 땅을 떠나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녀야 했던 시절, 그러니까 고수부님이 아홉 살 때

이후 모녀가 등을 기댈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이모였기에.
 
고수부님에게 마침내 그날이 왔다.

이모의 진갑 다음 날 새벽, 고수부님은 담뱃대 하나만 달랑 들고 대흥리 도장을 빠져 나왔다.

감회가 없을 수 없을 터였다. 아홉 살 때 어머니 치맛자락에 묻혀 온 이후 온갖 애환과 영욕으로

얼룩진 대흥리가 아니던가.

 

이곳에서 혼인을 하였고 딸을 낳고,

남편과 사별한 지 다섯 달 만에 증산 상제님을 만나 수부가 되고 종통대권을 전수 받았으며

증산 상제님 어천 후에는 도장을 개창하여 도운의 첫 장을 장식하였다. 누가 알까,

바로 이곳 대흥리를 떠나는 고수부님의 마음을! 과연 발길인들 제대로 떨어졌을까.
 
대흥리를 벗어난 고수부님의 발길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만든 도장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친 동생과도

같은 차경석의 배척을 받고 떠나는 길이다. 그만큼 굳은 결심이었고,

그만큼 몸도 마음도 무거웠을 터였다. 인간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천지공사의 관점에서는 달랐다.

고수부님의 대흥리 교단 이탈은 곧 증산 상제님이 짜놓은‘크나큰 세 살림’도수 가운데

첫 살림을 마치고 둘째 살림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요,

고수부님 자신이 짜놓은 자신의‘파종 도수’와 차경석에게 붙였던 ‘이종도수’의 현실화에

다름 아니었다. 절망이지만 영광의 길…. 고수부님의 대흥리 이별은 그렇게 예정된 길이었다.
 
고수부님이 당도한 곳은 정읍역이었다.

그곳에는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었다. 차경석 일파인 채규일(蔡奎壹), 채규철(蔡奎喆),

채경대(蔡京大)들이었다. 그날 아침 대흥리 도장에서 고수부님이 없어진 것을 알고

뒤쫓아 온 것이었다. 그들은 고수부님의 조종리 행을 간절히 만류하였다.

 

고수부님은 그들을 뿌리치고 부웅-, 기적소리 울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떠나는 고수부님을 바라보던 채규철, 채경대가 허겁지겁 기차에 올랐다.

고수부님은 정읍역에서 한참을 달려 김제 백구면 부용역(芙蓉驛)에 내렸다.

채규철과 채경대는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돌아갔다.
 
바로 그 날 새벽, 김제군 공덕면 송산리 신도 천종서가 꿈을 꾸었는데

고수부님이 부용역에 있는 것이 생생하게 보였다. 꿈을 깬 천종서는 즉시 일어나

부용역으로 달려갔다. 아. 어머니! 과연 그곳에는 고수부님이 음력 9월 하순의 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홀로 떨고 있었다. 천종서는 얼른 고수부님을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천종서는 고수부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각처 성도들에게 통지하였다.

연락을 받은 신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대흥리 도장시절 차경석에서 따돌림을 당했거나

그의 전횡이 싫어서 도장을 떠났던 성도들의 내왕이 잦아지면서 고수부님 주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수부님은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때가 되면 치성만 올릴 뿐,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송산마을도 오래 머물 곳은 못 되었다. 때는 급변하는 근대 전환기였다.

당시‘근대’는 곧 제국주의 서양 문물에 다름 아니었다. 서구의 것은 새로운 것이요,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고, 우리 것은 낡고 병든 구시대의 것으로 치부되던 시기였다.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장편소설로 꼽히게 될

이광수의 장편소설『무정』이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망국의 청춘남녀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만들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1917).『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이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었던 것은 무엇인가. 문명개화요, 구질서 타파였다.

 

 

1910년대 현재적 상황에서 신학문을 배운 젊은이들 중대부분은

이형식이 외치는‘문명개화, 구질서 타파’세례를 받고 있었다. 사회주의도 그 중의 하나였다.

천종서의 장남 병원(柄元)도 사회주의자였다. 그에게 고수부님은 타파되어야

할 구질서의 주장자쯤으로 보였다.

 

천병원은 걸핏하면“미신을 타파해야 될 판국에…”라며 고수부님을 배척했다.

전근대/근대를 통틀어 모든 시대를 통섭하는, 그러면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초(超)종교 지도자 고수부님이 그런 대접을 받다니! 한 집에 사는, 철없는 젊은이로부터

그런 배척을 받아야 하는 고수부님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고수부님이 천종서의 집에 한 달여 동안 머물고 있었던

그해 10월 중순께, 이웃마을 조종리에 사는 강응칠(姜應七: 1871∼1941), 강사성,

강운서(姜雲瑞), 강원섭(姜元 ) 등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고수부님을 찾아왔다.

일찍이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상제님께서는 저희들과 동종(同宗) 간이며

수부님께서는 저희들의 사모님이시니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하고 여러 차례 청해 오던 터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고수부님도 이제 서서히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고수부님은“그러면 종서하고 상의해 보라”고 하였다. 강씨 신도들이 천종서와 상의하여

고수부님의 거처를 옮기기로 합의했다.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천종서와 조종리 강씨들과는

친분이 있었으므로 얘기는 잘 통했다. 상의 결과를 들은 고수부님은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성씨 하나 보고 간다”고 하며 허락하였다.

마침내 고수부님의‘두 번째 살림’이 될 조종리 행이 결정된 것이었다.
 
며칠 뒤 고수부님은 송산마을 천종서의 집을 떠나 조종리로 거처를 옮겼다.

천종서를 비롯하여 강응칠, 강사성, 강원섭 성도 등 일곱 명이 고수부님을 모시고 갔다.

 

유일태의 꿈에 나타난 증산 상제님이 새우젓 세단지를 주며‘한 단지는 천종서를 주고,

한 단지는 강사성을 주라’고 한‘말씀’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고수부님의‘두 번째 살림’도장이 열리려면 아직도 많은 시련이 필요했다.
 
당시 조종리 강씨들이 고수부님을 모시기는 했으나 사전에 계획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종리에 온 이후에도 고수부님이 몇 번씩이나 거처를 옮긴 것이 반증이다. 당장에 고수부님이

옮겨간 곳은 조종리 중조마을 초입에 위치한 방 한 칸 부엌 한 칸짜리의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그곳에서 한 달여 동안 머문 뒤 하조마을 강응칠 성도의 집으로 다시 옮겼다.
 
강응칠을 주목한다. 강사성 성도와 함께 고수부님을 조종리로 모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강응칠은 고수부님의 대흥리 첫 살림 도장 때부터 신앙했다.

 

조종리 진주 강씨의 종손으로 한때 한약방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2백석 지기의 부농이었다.

고수부님의 조종리 시절 초기에 실질적인 교무를 맡아서 처리한 핵심 인물이다.

그는 고수부님의 조종리 둘째 도장살림 기간 동안 제2의 차경석이 될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고수부님은 강응칠의 집에서 9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동안 고수부님이 하는 일이라고는 한 달에 두 번씩 소와 돼지를 잡아 치성을 올리는 것이었다.

조종리 강씨들이 그런 고수부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초 그들이 고수부님을 모신 것은

차경석과 그의 무리에게 배반당한 고수부님을 지킨다는 순수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다른 계산도 있었다.

차경석이 그랬던 것처럼 조종리를 포교의 중심지로 삼고 도장의 실질적인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강씨들은 조종리에 온 이후 고수부님의 거동이 한편으로는

불만족스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고수부님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조차 마련되지 못한 형편 아닌가.
 
고수부님이 조종리에 온 뒤 오두막과 강응칠의 집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강응칠, 강사성, 강운서, 강원섭, 양문경, 김재윤, 김봉우, 백용기, 천종서, 박종화, 서문백,

이용기 등 열두 명이 뜻을 모아 성전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각자 성의껏 성금을 내어 7백 원을 모았다.

그해 11월 11일부터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당시 조종리 강씨들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또한 급했던 모양이다.

11월 15일에 주춧돌을 놓았고, 다음날 상량을 올렸다. 한편으로 성전을 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수부님의 활동을 간청했다. 강사성과 강응칠 등이 고수부님을 찾아와 면담한 이 무렵이었다.
 
“이제 사모님께서 본소를 옮기셨으니 새로 포교 운동을 크게 일으킴이 옳을까 합니다.

”두 강씨 신도가 말했다. 당시 고수부님에 대한 호칭은 다양했다. 신도들은‘사모님’혹은‘어머니’,

동네사람들은‘정읍 새댁’, 내지는‘정읍 아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도수가 있느니라.

농자(農者)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니 마땅히 농업에 힘쓸 것이요

포교 운동은 오직 천명을 쫓아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릴 것이며 오는 자는 오고 가는 자는

가게 하여 그들의 뜻에 맡김이 옳으니라.”
 
고수부님의 말인즉 포교는 뒤로 미루고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무렵 고수부님은 무엇인가 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당장에 고수부님이

기다리는‘때’는 조종리 강씨들이 원하는 포교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때’가 아니었다.
 
그해 겨울이다.

고수부님이 대흥리를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그해 동짓달 22일, 성도들을 본소로 오라고

한 고수부님은,
 
“너희들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

”갑작스런 질문을 하며 다짐을 받았다. 성도들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고수부님이 기다리고 있는‘때’와 관련되어 있음을 그들이 어찌 알았겠는가.
 
조종리 도장 성전 건축이 시작된 지 아흐레밖에 지나지 않은 그해 동짓달 25일이다.

그날 새벽에 치성을 올릴 때, 잔을 올리던 고수부님이“제상(祭床)에 술 방울이 몇 점이나

떨어졌느냐?”하고 물었다.
 
성도들이“스물두 점입니다.”대답했는데 고수부님은 들은 척도 않고 다시 물었다.
“스물 석 점입니다.”
 
성도들이 대답했으나 고수부님은 또 같은 질문을 했다.

성도들이 자세히 세어 보니까 스물넉 점이었다. 그제야 고수부님은“그러하리라”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정오께였다. 조종리에 난데없이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강사성이 응대하였다. 순사들은 고수부님의 행방을 물었다. 때가 때인지라 조용하던

시골에 순사들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순사들은

고수부님을 찾고 있지 않은가. 강응칠이 고수부님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알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화가 있을 듯합니다. 잠깐 피하십시오.”
“내가 이미 알고 있노라. 그러나 이번에 내가 순하게 받아야 뒷일이 없을지니 피하는 것이 불가하다.”
 
고수부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증산 상제님이 남긴 [현무경]에 나오는) ‘소멸음해부(消滅陰害符)’에

‘해마주(解魔呪)’를 적어 불사른 뒤에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치 순사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잠시 후 순사들이 강응칠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고수부님은 순사들을 불러오라고 하였다. 순사들이 달려왔다.

고수부님과 몇 마디를 나눈 순사들은 그 자리에서 강응칠과 함께 정읍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내막은 그러하였다. 차경석이 지하로 잠복한 뒤 대흥리 교단은

잇달아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관할 경찰서 순사들이 밤낮으로 차경석 교단을 감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수부님이 대흥리 교단을 떠나 버렸다. 하루아침에 항성을 잃어버린

대흥리 차경석 교단이 빛을 잃고 어둠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것은 당위일 터였다.
 
고수부님이 대흥리 교단을 떠난 직후인 그 해 동짓달,

제주도 신도 문인택(文仁宅)이 성금 10만여 원을 포대 속에 감추어 배를 타고 나오다가

목포에서 발각됐다. 일본경찰은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이라고 덮어씌워 사건은

본소로까지 크게 확대됐다.

 

교주인 차경석이 없는 대신 차윤칠을

비롯한 방주 18명이 줄줄이 체포되어 목포경찰서에 수감됐고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대흥리 교단에서 사건 담당자를 파견하였다. 사건이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담당자는 모든 책임을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이미 대흥리 교단을 떠난)

고수부님에게 떠넘겼다.
 
그 후 차경석 교단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경찰 당국에서 차경석 교단을 추적하는 가운데‘교주 고판례’라는 이름이 거듭 튀어 나왔고

마침내 조종리까지 수색을 나와 고수부님을 검거한 것이었다.
 
정읍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낸 고수부님과 강응칠은 다음날 목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취조는 가혹했다. 혐의점을 찾을 수 없는 경찰당국은 12월 12일 강응칠을 먼저 풀어 주었다.

고수부님은 계속 차디 찬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물론 취조는 계속 되었을 것이다.
 

해가 바뀌었다. 조선인의 기개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새해가 밝아왔다. 그해 음력 1월 3일, 그러니까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고수부님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세인들은 이를 일러‘무오년 옥화(獄禍)’라 하니라.

이로부터 태모님께서 농사에 마음을 두시고 몇 년 동안 한가로이 지내실 뿐이더라.(11:49)
 
38일 동안 옥고를 치른 것이었다. ‘인간’들의 배신은 그렇게 끝이 없었다

모성애란 그런가. 어머니-, ‘만백성의 어머니’되는 고수부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애로움을 잊지 않았다. 당초 순사들이 조종리에 들이닥쳤을 때 고수부님이 피할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다.

 

고수부님이 스스로 옥화를 자초한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그 중의 하나는 당신을 배반한‘인간’들을 버릴 수 없는 까닭이었다. 당신이 나서지 않으면,

당신을 배반한‘인간’들이 더욱 혹독한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고수부님의 육신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당시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왔을 고수부님이 내린 중간 기착지가 김제역인지 부용역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부용역에서 조종리까지는 십 리 길, 김제역에서 조종리까지는 20리 길이다.

고수부님이 조종리 도장에 머무는 동안 출타할 때는 주로 부용역을 이용-

태모님께서 조종리에 계실 때 출행하시는 일이 많지 않으나

 

 

혹 대흥리나 먼 곳으로 행차하실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시어

기차를 타시니라.(11:107)-했다는 점에 유의한다면, 아마도 부용역에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목포에서 (김제역 혹은) 부용역을 거쳐 조종리로 향하는 고수부님은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더욱 무거웠을 것이었다. 차경석을 비롯한‘인간’들의 배신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고수부님은 언제까지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 줄 것인가.
 
【다음호에 계속】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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