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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님이 전주 백남신(白南信, 1858~1920)

성도에게“상제님께서 맡겨 두신 돈 10만 냥을 들여와서 도장 운영비로 쓰게 하라”고

명을 내린 것은 이즈음이었다.

백남신이 누구인가.
당시 조선 3대 갑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본명은 낙신(樂信). 남신(南信)은‘남삼도(南三道)를 믿고 맡길 만하다’고 하여 고종이 하사한이름이다.

 

김병욱 성도와 잘 아는 사이였고 서원규(徐元奎, 1855~1935) 성도와 인척간이다.
방송작가 이용선의『거부실록』에 따르면 육군 부령(副領: 지금의 중령에 해당하는 무관)으로

전라 거부였던 백남신은 해마다 왕궁에 들어가는
부채 3만 자루씩(당시 1만원에 상당)을 수십 마리의 말에 실어 상납하던
전주 토호로서 한말의 한지대왕(韓紙大王)이었다.


백남신 성도는 증산이 맡겨 놓은 돈 10만 냥을 들이라는 고수부님의 명을 따를 것인가.
10만 냥이라면 백남신 성도 전 재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서 당시 돈 2만 원에 해당한다.
 
고수부님이‘증산 상제님께서 백남신에게 맡겨 두신 돈 10만 냥’의 내막은 그러하였다.
1903년 3월‘조선 신명을 서양으로 보내어 천지에 전쟁을 붙이는 일꾼으로 쓰는’공사를 행하던
증산 상제님은“이제 재주(財主)를 얻어 길을 틔워야 할지니 재주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김병욱 성도가 전주 부호 백남신을 천거했다.

증산 상제님은 백남신에게“쓸 곳이 있으니 돈 십만 냥을 들이라”고 하였다.
증산 상제님은 말할 나위 없지만, 백남신의 배포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백남신은 어음 십만 냥을 바치겠다는 증서를 써서 올렸다.
그 후 기한이 되어 백남신이 어음 열두 장으로 10만 냥을 바쳤는데 증산 상제님은“이미

요긴하게 썼다”며 어음을 돌려주었다.

 
증산 상제님과 백남신 사이에 얽힌 10만 냥 일화는 또 있다.
같은 해 11월 중앙정부로부터 백남신을 불러 올리라는 공문이 전주부(全州府)에 하달됐다.
‘목이 떨어질 위기’에 봉착한 백남신이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숨겼다.

그때 김병욱이 남신에게

“지난번에 저(김병욱)의 화란(禍亂)을 선생님께서 끌러 주셨습니다”고 넌지시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 남신은 병욱을 통하여 증산 상제님께 관액을 풀어 주시기를 간청했다.


증산 상제님은“부자는 돈을 써야 하나니 10만 냥의 증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남신이 곧 10만 냥의 증서를 올리는데 증산 상제님은 그 자리에서 증서를 불살랐다.


그 뒤로 관액이 풀린 남신은 승진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듬해(1904년) 7월 육군 전주 진위대(鎭衛隊) 대장이 되고, 석 달 뒤에는 전북

징세 독쇄관(督刷官)이 되어큰돈을 모았다.
 
문제는 고수부님의 입장이다. 도장을 개창하였으므로 자금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동안 한적한 수부소만 지키고 있었던 고수부님에게 자금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만큼 도장살림은 궁핍하였고 백남신이 고수부님의 명을 따라 10만 냥을 바친다면 도장 운영비로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남신은 고수부님의 명을 거절했다.
 
고수부님으로서는 타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증산 상제님이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수부님에게는 하나씩 헤쳐 나아가야 할 난관이었다.
백남신의 입장에서, 고수부님의 명을 거역한 것은 그의 불행이었다.


일찍이 증산 상제님은“남신의 일이 용두사미(龍頭蛇尾)와 같다”고 탄식했다.

한때 재물로서 천하를 호령했던 백남신은 인생말년에 큰며느리에게 경제권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어 익산에서 외로이 살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912년 7월 3일 고수부님은 차경석을 대동하고 걸어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로 갔다.
고수부님이 만동묘로 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설명이 좀 필요하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파견한 명나라 신종(神宗)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제사 지내기 위해 조선 숙종(肅宗) 29년(1703)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유지를 받들어 지은 사당이다.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줄임말로 만 번을 굽이치고 꺾어져도 반드시 동으로 간다는 깊은 뜻이다.

증산 상제님이 몇 차례에 걸쳐 천지공사를 집행 할 정도로 만동묘는
(천지공사의) 중요한 자료였다(2:3 ; 5:325 ; 5:402 ; 5:410).
 
1901년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천지대신문을 활짝 열고
도문을 개창한 증산 상제님은 각국 제왕신(帝王神)과 24장(二十四將)을 만동묘에 응집시켜 놓았다.
‘24장’이란 당태종을 도와 개국에 공로가 컸던 장손무기(長孫無忌),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이정(李靖), 장량(張亮) 등 스물네 명의 신하들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증산 상제님이 만동묘에 응집시켰다는 24장은‘24장신(二十四將神)’으로 이해된다.
각국 제왕신과 24장 신을 만동묘에 응집시켜 놓은 증산 상제님은

성도들에게“이 신명들을 잘 대접하라”고 하였다.

 
증산 상제님은 왜 도문을 연 후 각국 제왕신과 24장을 만동묘에 응집해 놓았을까.
해명은 다음에 진행되는 만동묘 관련 천지공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908년 10월, 증산 상제님은

고부 와룡리 문공신 성도의 집에서‘세계일가 통일정권 대공사’를 주재하였다.
이 자리에서 증산 상제님은“천하의 난국을 당하여 장차 만세의 대도정사(大道政事)를 세우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 와야 한다”고 말하면서‘황극신 옮겨오기’공사를 행하였다(5:325).
 
신도 차원의‘황극신’에 대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얘기할 여유는 없다.
좀 거칠게 일별하면, 황극신이란 우주론적으로는 선/후천 변화의 실질적인 핵심자리를 가리킨다.
인사적으로는 후천문명을 여는 지도자 출세와 직결된다.
만동묘에는 1901년 공사에 의해 각국 제왕신과 24장이 응집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8년에‘황극신 옮겨오기’공사를 행하는 이유는
황극신이‘인류사를 움직일 수 있는 위격의 대신명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난국을 당하여‘만세의 대도 정사’를 세우려면 반드시 황극신이어야 하리라.

 
여기서 천하의 난국이란 물론 후천 가을개벽을 일컫는다.
이 공사에 의해 황극신이 넘어 왔으므로 조선은‘천하의 대중화(大中華)’가 되고(5:325),
인류사의 대세는 동북아의 조선이 지구촌의 천자국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세계질서가 전개된다.
 
결론적으로 만동묘는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후천 개벽사상과 관련하여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수부님이 교단을 개창한 뒤 가장 먼저 만동묘로 간 까닭은
만동묘에 응집되어 있는 각국 제왕신과 24장을 (증산 상제님이 공사로써 정해놓은대로)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만동묘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그곳에 머물면서 날마다 치성을 드렸다.
한여름 불볕더위 속에서도 고수부님의 치성은 변함이 없었다. 온 정성을 바쳐 치성을 드리던 어느 날,
냇가 바위 위에 앉아 주문을 외우고 있던 차경석 성도가 한눈을 팔아 그만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여러 날 동안 의식을 잃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중태였다.

그것은 고수부님을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후천개벽을 눈앞에 두고 각국 제왕신과 24장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한눈을 팔았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수부님은 주먹으로 차경석의 등을 치며

“일을 다 보았는데 너는 어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느냐”고 크게 꾸짖었다.

 
그해 여름이 가고 만동묘 주위에는 가을기운이 휘휘 불어오고 있었다.
고수부님이 만동묘에서 치성을 드린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치성을 끝냈을 때는 여비가 없어 돌아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차경석이 먼저 대흥리로 돌아와 여비를 마련하여 그 해 9월 2일에서야 고수부님을 모셔왔다.
 

 

도세(道勢) 확장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태을주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게 되니라”(道典11:28:7)
 
고수부님 도장의 도세(道勢)는 날로 확장되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봉홧불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고수부님 도장을 보고

구원의 희망을 갖고 모여드는 것은 당위였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도세 확장의 주된 이유는

지도자인 고수부님 개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봉건주의 시대 말기, 고리타분한 가부장적 사고의 때가 아직도 켜켜이 껴 있던 시기에
도세가 그렇게 확대되었다는 것은 고수부님의 영도력이 그만큼 탁월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고수부님이 대흥리 첫 도장 살림을 열고

포교방법으로 정한‘태을주’수련의 효력이 금방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태을주가 무엇인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도문에서 태을주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태을주(太乙呪)로 천하 사람을 살리느니라.
 병은 태을주라야 막아내느니라.


 태을주는 만병을 물리치는 구축병마(驅逐病魔)의 조화주라.
 만병통치(萬病通治) 태을주요, 태을주는 여의주니라.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하니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태을주는 수기(水氣) 저장 주문이니라.


 태을주는 천지 어머니 젖줄이니 태을주를 읽지 않으면 다 죽으리라.
 태을주는 우주 율려(律呂)니라.(2:140)
 
증산 상제님은 또한“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태을천(太乙天) 상원군(上元君)은 하늘 으뜸가는 임금이니 오만 년 동안 동리동리 각 학교에서 외우리라.
태을주에는 율려(律呂) 도수가 붙어 있느니라.

태을주 공부는 신선(神仙) 공부니라”(7:75)고 했다.

과연‘태을주’를 외우면 광명현상이 나타나고
신력(神力)을 체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온갖 난치의 질병이 치료되었으므로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1911년 10월 고수부님의 도장 개창 이후-인용자 주)
우리나라에 비로소 상제님 무극대도의 포교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신도들이

구름 일듯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그 후 3년 만에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와

서남해의 모든 섬에 태을주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게 되니라.(11:28)
 
해가 바뀌었다.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강점당한 지 3년이 지난 1913년이다.
이 해에 앞으로 고수부님이 활동하는 동안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게 될 한 성도가 입도했다.
익산군 춘포면 용연리 장연 마을에 사는 이용기(李用己: 1899~1980)가 그 사람이다.

 
이용기는 짧은 명줄을 갖고 태어났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아마도 무속인이나 중으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열 살 이후에는 전주 우동면 만덕사(萬德寺)에 들어가 살았다.

절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칠성경’을 읽는 것이었다.
유일태(劉一太: 1878~1954) 성도의 인도로 이용기는 대흥리 도장을 찾아와 신앙을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수부님은 이용기의 사람됨과 신앙심을 보고 퍽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해 어느 날이다. 고수부님은 갑자기 방에 짚을 깔고 출산 준비를 하라고 명하였다.
준비가 끝나자 고수부님은 옷을 다 벗은 채 출산자리에 누워 이용기 성도로

하여금 팔을 베고 누우라고 하였다.


이게 웬일인가.

시간이 좀 흘렀을 때 고수부님은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며 산통을 겪고 하혈을 시작했다.
이용기는 자기도 모르게 옷을 홀딱 벗은 채 온 몸에 피를 묻히고 고수부님의

하초(下焦) 밑에서 아기처럼“응애응애!”하고 울었다.

 
고수부님은 여신도에게“미역국과 밥을 한 솥 지으라”고 명하였다.
잠시 후 여신도가 끓여온 미역국을 솥째로 다 먹은 뒤 고수부님은,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하고 이용기에게 말했다.
이후부터 고수부님이 하는 모든 일에 이용기가 시중들게 하였고,
이용기는 어머니를 모시듯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수부님을 시봉하였다.


고수부님이 행하는 신도차원의 행위를 언어로 묘사하기는 쉽지 않을 일이다.
우리는 이 일화가 고수부님이 이용기를 아들 삼고 명줄을 이어 주는‘공사’(11:32)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해 음력 9월 19일,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일이었다.
김형렬, 김자현 성도와 사돈으로 일찍이 증산 상제님의 신성함을 듣고 감화를 받았던
전남 순천사람 장기동(張基東)과, 그의 재종 동생 장기준(張基準: 1880∼1922)이 김형렬의 안내로

고수부님을 찾아왔다. 고수부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장씨 형제는 신앙심이 절로 발동하였다.

 

고수부님 도장이 발전하는데 일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장기동은“천하사를 하시는데 본소가 이렇게 협소해서야 얼마나 불편하십니까?” 하고,
차경석을 향해“도장 건물을 새로 지읍시다. 경비는 내가 부담하지요.
명년 정월 보름 이후에 건축비를 가져오도록 하겠소”라고 약속했다.
 

이와 같은 일화는 고수부님의 도력(道力)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과,
또한 고수부님의 대흥리 도장 도세가 그만큼 번창해가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다.
대흥리 도장의 도세가 하루가 다르게 번창해갈 때 내부의‘적’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진원지는 증산 상제님이 생전에

그렇게 우려한 대로 고수부님의 이종사촌 동생 차경석 성도였다.
대흥리 도장은 고수부님을 구심점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나
도장 안팎의 주도권은 그 출발 때부터 알게 모르게 경석이 장악하고 있었다.


차경석은 도장의 안팎살림을 총괄하면서 본소에 찾아오는 신도들을 응접하였다.
이와 같은 관리자 역할은 그가 어디까지나 고수부님을 보좌하는 위치라는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고
충성을 다 바칠 때는 문제가 없겠지만, 조금만 마음을 비뚤게 먹는다면 얼마든지‘위의

한 사람’고수부님을 속이고 자기 영역을 개척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차경석의 타고난 기국이 컸고 그만큼 야심가였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고수부님 체제의 도장 운영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수부님은 희대의 여걸이라고 할 정도로 대범한 여장부였으나 한편으로는

여성 특유의 치밀함도 갖고 있었다.

 

‘천지의 어머니’로서 우주를 가슴에 품은 넓고 큰 사랑과 함께 사람 한 명 한 명은 물론이요,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까지도 사랑하는 모성애를 갖고 있는 분이 당신이었으므로.
그런 성격은 그의 도정 운영에도 나타났다.


고수부님은 차경석과 수뇌급 간부들에게 교리와 도무 진행 방침을 정하여
주고 도덕적 진리와 인도상의 정리(正理)와 수행할 때 지녀야 할 계율에 대한 조항 등을 일일이 챙겨 주었다.


고수부님의 그와 같은 도정에 차경석은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차경석의 그와 같은 태도는 도장의 실질적인 관리자로서 전횡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것이 지나쳐 아예 도세를 움켜쥘 욕심을 품게 되었다.

 
차경석의 전횡은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다른 성도들과의 사이에 불화를 낳았다.
증산 상제님 재세 시에도 남달리 총애를 받는 차경석에 대해 성도들 사이에는 불만이 많았었다.
그랬는데 고수부님 시대에 와서는 아예 도장 운영의 주도권을 쥐고 전횡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불화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전횡이 지나쳐 아예 도세를 움켜쥐려고 하지 않은가.
차경석의 야심을 간파한 성도들이 모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담에 절이 보기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경석의 야심을 간파한 성도들이 모두 분개하여 더러는 도문(道門)을 하직하고
지방 신도들과 연락하여 따로 문호(門戶)를 세우기도 하며
일부는 경석을 따돌리고 본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니라.(11:37)

 
1914년이 밝았다. 증산이 생전에 집행한 세운공사 ‘애기판’—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다.
그해 1월에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어 고수부님이 살고 있는 정읍 벌판 위로 기차가 달리면서
검은 연기를 푹푹 내뿜으며 난데없는 기적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1월 20일께 장기동이 약속한 대로 대흥리 본소에 나타났다.


고수부님과 차경석을 만나 본소 신축공사비 1천 원을 헌성한 뒤
장기동은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김형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렬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장기동을 보고“무얼 기다리오.
태운(太雲: 김형렬의 호)은 오지 않을 것이오.
태운의 편지를 월곡(月谷: 차경석의 호)이 보관하여 두었소”하고 알려 주었다.
장기동은 차경석을 찾아가 김형렬의 편지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아. 그 편지요.

일전에 태운의 편지가 우편으로 와서 보니까 사고가 있어서 본소에 오지 못하겠으니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들러 달라는 내용이었소.
편지는 그만 분실하고 말았소이다. 내 생각으로는 태운에게 들리는 것은 불가할 것이오.
바로 순천으로 돌아가시오.


상제님께서 생전에 태운을 불길한 사람이라고 늘 말씀하셨으니 이 뒤로는 직접
사모님(고수부님)께 내왕하고 태운과는 상종을 끊어버림이 옳을 것이오.” 하고 차경석이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당신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장기동은 내심 분개했다.
장기동은 남의 사사로운 편지를 뜯어본 일과 그것을 감춘 일,
동문성도(同門聖徒)를 중상모략 하여 이간질하려는 심사를 들어 차경석을

크게 꾸짖은 뒤 대흥리 본소를 떠났다.


 

구릿골로 달려간 장기동은 김형렬을 만나 자초지종을 전해 주었다.
김형렬 또한 크게 분개했다. 그러나 차경석은 고수부님의 이종 동생이다.
아예 만나지 않으면 모를 일리로되, 일단 만나게 되면 함부로 대할 위인이 아니다.
더 이상 차경석의 꼴을 보기 싫은 김형렬은 아예 대흥리 본소와는 인연을 끊어버렸다.

 
증산 상제님 도문에서

태산북두와도 같았던 수석성도 김형렬의 절연사건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형렬은 차경석이 자신을 중상 모략한 사실을 다른 성도들에게 공개해버렸다.
김형렬 성도가 누구인가. 증산 상제님에 대한‘믿음의 화신’이요, 증산 도문의 수석성도이다.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의 동반이탈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경석의 전횡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나갈 테면 나가라는 심사로 맞섰다. 김형렬이 떠나고
성도들의 동반이탈로 이어질 때는 차경석의 전횡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나쁘게 표현하면 전횡이었으나 좋게 표현하면 차경석다운 배포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차경석의 야심이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있었다.
이 무렵 차경석은 아예 드러내놓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다.


 
그해(1914) 봄, 대흥리 본소 주위로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만개하던 날,
장기동의 성금으로 신축하였던 성전이 완공되었다.

 

차경석의 전횡, 김형렬을 비롯하여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의 동반이탈 등 우여곡절 끝에 본소가 완공되었으므로

고수부님의 감회는 더욱 컸을 것이다.
본소 성전 완공으로 도장이 점차 위용을 갖추어 가면서 도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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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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