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제5회] 거룩한 생애


 제12장 도장 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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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모님께서 신도(神道)로써

포정소 문을 여시고 도장 개창을 선언하시니라.”(道典11:28:3)
 
1911년 9월 20일, 대도통을 한 다음날부터
고수부님은 날마다 마당에 청수를 떠 놓고 물형부(物形符)를 받아 불살랐다.
그 광경을 보고 못마땅해 하는 것은 이종사촌동생 차경석 성도였다.


그날도 고수부님이 의식을 행하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차경석은“아아.
부인만 알고 제자는 알지 못하는구나”하고 투덜거렸다. 증산 상제님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당시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은 각기 나름대로 큰 희망 하나씩을 갖고 있었다.
당장에는 증산 상제님을 추종하는 성도로서 도통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천 개벽의 그날이 하루빨리 와서‘선택받은 자’로서 살아남는 영광을,
후천 선경세계에 거듭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벽의 그날은 오지 않았고 도통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동안 믿고 의지했던 증산 상제님이 훌쩍 어천해버렸다.
성도들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차경석이 그랬다.
 
차경석은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기국이 컸던 인물이었다.
그만큼 큰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증산 상제님에 대해 강철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모를 일이로되, 차경석은 증산 상제님이 도통을 준다면 누구보다
먼저 자기에게 줄 것이라는, …도통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을 갖고 있었을 터였다.

증산 상제님 어천 후에 차경석은 앞장서서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증산 상제님에 비할 만한 스승은 없었다. 내친걸음이라 전주 대원사,
신경수 성도의 집 등지를 찾아다니면서 도통을 찾아 헤맸으나 도대체 무망한 노릇이었다.
절망감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터.


바로 그때 고수부님이 도통을 하고 신도(神道)로써 물형부를 받아 일을 행하는 것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차경석은 고수부님의 모습을 보고‘왜 저 양반한테만 기운을 붙여 주고
나한테는 기운을 붙여주지 않는 거냐’라며 증산 상제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차경석뿐만 아니라 증산 상제님을 믿고 따랐던 다른 성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부 도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은 고수부님이 신도를 열어 천지조화를 자유자재로 하는
대도통을 한 뒤“우리가 (증산 상제님에게) 정성을 바쳐 왔으므로
도통을 해도 (우리가) 먼저 해야 될 터인데 왜 고부인에게만 도통을 주느냐”고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고수부님도 성도들의 불만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물형부를 불사른 뒤 고수부님은 차경석을 향해“부(符)를 받아라”하고 말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경석이 붓을 들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부는 내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득 고수부님에게 신도가 내렸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의 음성으로

경석을 향해“공우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담아 놓은 술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당시 박공우 성도는 신경수 성도의 집에 살고 있었다. 차경석이 보낸 인편으로부터
술을 가져오라는 명을 들은 박공우는 깜짝 놀랐다.


1909년 봄에 (증산 상제님의 명으로) 술 서 말을 빚어 두었으나
증산 상제님이 찾지 않고 어천하였으므로 그대로 봉하여 두었던 것을 고수부님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박공우는 기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여 아무 소리도 못한 채

신경수로 하여금 그 술을 지고 가게 하였다.
 
차경석, 박공우는 비록 증산의 9년 천지공사 기간 중 후반기에 입도(1907)하였으나
다른 어떤 성도들보다 비중 있는 천지공사 도수의 주인공들이었다.


도통한 다음 날 보여준 고수부님의 모습에 두 성도들은 감복 이상의,
어쩌면 (차경석이 품었던 불만을) 일거에 제압하는 효과를 낳았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다른 성도들의 불만까지 잠재우기에 충분한 조화였을 것이다.
 
차경석, 박공우를 비롯한 성도들의 불만을 누른 뒤
고수부님은 종통대권 후계사명자로서 자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수순을 정확하게 밟아 나가고 있었다.
그 해 9월 24일, 고수부님은 차경석을 불러 사인교와 백마 한 필을 구해오라고 하였다.


다음날, 침방을 깨끗하게 청소한 뒤 차윤덕에게 방을 잘 지키라고 하였다.

차경석을 불러 한삼에‘어명(御命)’이라고 써서 입히고 갓을 주물러 삐뚜름하게 씌운 뒤에
어사도수(御使度數)를 정하며“너는 암행어사다. 암행어사는 폐의파립(폐衣破笠)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도통이란 어떤 경지인가. 고
수부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말씀’은 물론 행동 하나하나가 천지조화에 통하는,
천지공사에 부합하는 것일 터. 고수부님은 사인교에 올라 원평으로 행차했다.


앞에서 백마를 탄 폐의파립의 차경석이 길을 텄다.
뒤에는 차윤칠과 임정준, 주낙범이 뒤를 따랐다. 행렬은 간소하였으나 영락없이 제왕의 그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천지의 어머니요, 우주의 주재·통치자 되는 옥황상제 반려자의 행차였으므로.
 
모악산 초입의 원평 네거리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을 신앙하는 송찬오(宋贊五)의 주막에 처소를 정했다.
그리고 차윤칠에게“구릿골 약방에 가서 약장과 궤(櫃)를 굳게 지키고 있으라”고 하였다.
차윤칠이 급히 구릿골 약방으로 달려갔다. 고수부님은 다시 차경석을 불렀다.
 
“짐꾼 세 사람을 데리고 약방으로 가서 약장, 궤 등 약방기구 일체와
벽에 붙인 글과 벽 바른 종이까지 모조리 떼고 방바닥 먼지까지 쓸어서 가져오라.”
 
구릿골 약방은 증산 상제님 9년 천지공사 후반기에 지휘부와 같았던 곳—.
상제님은 그곳에서 인류는 물론 우주의 미래 운명에 대한 판을 짰다.
당시 구릿골 약방은 김형렬 성도가 지키고 있었다.


구릿골에 도착한 차경석은

김형렬에게 고수부님의 뜻을 전하고 약방기물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다른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김형렬 역시 고수부님에게 내린 수부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한 사람이었다.
 
“보게. 내 딸이 지금 사경에 임박하였네.
이러한 우환 중에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그러하지만, 본래 선생님 재세 당시부터 나에게 보관케 하신 물건이니 인도할 수 없네.”
 
김형렬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약방기물 인도를 거절했다.
여기서 김형렬의 딸은 셋째 딸 말순을 가리킨다.

일찍이 김형렬이 수부로 천거했고 증산 상제님도 받아 들였으나 형렬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그의 부인 황씨의 반대로 결국 수부사명을 받들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것은 김수부의 불행을 결과할 터였다.
 
증산 상제님은 어천 하루 전날까지도 김수부의 불행을 막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날 밤 증산 상제님은 김형렬을 불러“내가 이제 죽으려 하는데 후비(后妃)가 와서
수족이라도 걷어 줘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상제님의 의중을 어느 정도 짐작했던 형렬은

집에 가서 사정을 말했으나 황씨부인에게 핀잔만 듣고 그냥 돌아왔다.
증산 상제님은 노하여 꾸짖었다.
 
“안동 김씨가 너 하나뿐이라서 내가 너를 찾은 것이더냐?
만일 개가시키면 너희 집안은 쑥대밭이 되어 망하리라.”
 
증산 상제님이 김형렬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니다.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나의 일은 추호도 사정(私情)이 없다”고 말했다.
상제님이 사정을 두고자 해도 상제님을 호위하는 신명들이 그냥 두지않는다.
수부사명은 그렇게 준엄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성도들은 수부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증산 상제님 어천 후 성도들은 상제님께서 수부에게 내린 큰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예 수부를 모신다는 말부터 믿지 않았다. 수석성도인 김형렬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뒤에

김형렬은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는 김수부를 금구 둔산에 사는 최씨에게 개가시켰다.
그가 제대로 수부사명을 이해했더라면 상제님의 명을 어기고 딸을 개가시키지는 않았을 터였다.
김수부 개가시킨 일을 두고 김형렬은 후일에“내 생애에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아니나 다르겠는가.
김수부는 혼인 후 갑자기 남편이 죽고
자신은‘아랫배가 터질 듯한 병’까지 얻어 친정으로 돌아와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김형렬이‘내 딸이 지금 사경에 임박하였다’고 한 일의 전말은 그러하였다.
 
김형렬이 거부한다고 해서 쉽사리 물러설 차경석이 아니었다.
경석은“그럴 수는 없소. 천지공사에서 결정된 일을 좇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
잘 생각하시오”하고 항의했다.
 
“만일 천지공사에서 결정된 일이라면 신도에서 어떤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징조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그대의 말을 믿지 못하겠네.”
 
김형렬이 말했다.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김형렬의 기세를 보고 차경석은 원평으로 기별을 보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고수부님은 양지에 해와 달을 그려 놓고 두 손의 식지로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여기는 다시 구릿골이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고 우르르 쾅 쾅 천둥이 치면서
소나기와 함께 번개가 약방으로 들어와 온 집을 둘렀다.
징조를 요구하던 김형렬은 크게 놀랐다.


문득‘망하는 세간살이는 아낌없이 버리고 새 배포를 꾸미라.
만일 아껴서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서 망하느니라’고 했던

증산 상제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김수부가 나와서“아버지, 내어 주시오.
내 주셔도 괜찮습니다”하고 간청하듯 말했다.
 
“알았네. 알았으이. 진실로 하늘의 뜻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게.”김형렬이 말했다.
 
차경석은 약장과 궤, 철연자, 삭도, 횃대, 부벽시(付壁詩), 액자 등
모든 약방기구와 방바닥의 먼지까지 쓸어서 짐꾼에게 지웠다.
마지막으로 도배지를 뜯어냈다. 일찍이 증산 상제님이“이 종이를 뜯을 날이 속히 이르러야 하리라”고

했던 말씀이 응험되는 순간이다.
 
약방을 나오면서 차경석은 김형렬에게 돈 20원을 주었다.
“ 따님의 병이 위중하다 하니 약소하나마 약값에 보태어 쓰시오.”

 
비바람은 계속 몰아쳤다.

차경석 일행이 구릿골 앞 정문(旌門) 거리에 이르렀을 때 풍우와 뇌성이 그쳤다.
그때였다. 김형렬의 집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왔다.
잠시 후 김형렬의 집에서 한 사람이 달려와“김 부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전했다.
증산 상제님이 김형렬에게“약장은 곧 안장(安葬)롱이니라”고 했던 공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차경석이 약장을 지고 원평에 당도하였을 때
고수부님이“약장 지고 올 적에 무슨 소리가 난 일이 있더냐?”고 물었다.
차경석이“예, 곡성이 있었습니다.”하고 김수부의 사망 사실을 전했다.


고수부님은“불쌍하구나!”탄식하면서“장사에 보태어 쓰게 갖다 주어라” 하고 치상비를 후히 주었다.
고수부님의 면모를 읽을 수 있는 한 자료다.
구릿골 약방 기물을 가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수부님은 왠지 주막을 떠나지 않았다.

 
고수부님이 원평 주막에 머문 지 닷새째 되던 9월 29일 아침에 김형렬이 찾아왔다.
고수부님은 김형렬을 위로한 뒤 비로소 떠날 채비를 하였다.

먼저 태인 도돔실(오늘날의 정읍시 감곡면 화봉리 천곡마을)

류응화 성도에게 원삼과 족두리를 빌려 오라고 하여 단장했다.
(약방 기물을 찾아가기 위해) 이곳으로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사인교를 타고 약방기물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운 채 주막을 떠난 고수부님 일행은 대흥리로 향했다.


영락없이 신부가 농바리를 앞세우고 신행길을 가는 행렬이다.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약장은 네 농(籠)바리가 되리라”고 했던 공사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대흥리로 돌아온 고수부님은

약장을 비롯한 모든 약방기물을 침방에 봉안하고 부벽시는 벽에 붙이고
벽에 발랐던 종이는 뭉쳐서 천장 속에 간수했다.


마치 구릿골 약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침방을 단장한 뒤 고수부님은 약장 앞에서 치성을 올렸다.
증산 상제님이“약장은 네 신주독(神主독)이 되리라”고 했던 공사가 이루어졌다.
물샐틈없이 짜여 진 천지공사는 그렇게 하나씩 역사되고 있었다.
 

 

그해 10월, 고수부님이 머물고 있는 정읍 대흥리에서 가까이는 비룡산,
조금 멀리는 입암산, 더 멀리는 모악산 능선으로 오색찬연한 단풍의 물결이 파도가

출렁이듯 우우우 밀려오고 있을 무렵,


고수부님은 무엇인가 큰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질정해 놓으신 포정소 도수에 따라 도문을 여는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먼저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을 불러 모았다. 연락을 받은 성도들이 대흥리로 몰려 왔다.

 
그 자리에서 여러 성도들은 고수부님의 신통력을 목격했다.
고수부님은 성도들이 모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 자리에서 신통력을 보였다.
당시 고수부님이 어떤 신통력을 보였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성도들이 찾아와 태모님의 신통력을 보고 모두 놀라며 이상히 여기더라”(11:28)는 기록이 전할 뿐이다.


대도통 이후 보여 주었던 고수부님의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하는) 조화권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하면 될 것이다.
일찍이 고수부님이‘수부’로 책봉되었을 때 성도들이 마음속으로부터‘고수부님’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 도통(道統)을,
종통을 전수하는 공사를 수차례 보아왔으면서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또한‘수부’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없었으므로 종통대권이 고수부님에게 전수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증산 상제님이 없는 마당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고수부님이 종통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알았다고 해도 몰랐던 것으로 하고 싶었던 성도들로서는 한낱 아녀자에 지나지 않은 고수부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논의한 바와 같이
증산 상제님 어천 사실까지도 몇 달이 지나도록 숨겼을 정도로 고수부님은 성도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런데 이날 고수부님의 신통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성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충격 그 자체였으리라. 이에 모두 승복하고 수부님을 인정한 것이다.
바로 그날 고수부님은 신도로서 포정소 문을 열고 도장(道場) 개창을 선언하였다.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 그러니까 고수부님이 머물고 있는 수부소가 그대로 본소가 되었다.
1908년 겨울 증산 상제님이 정읍에 포정소를 정한다는 포정공사가 실현된 것이요,
같은 시기에 증산 상제님이 천지공사로서 정해 놓은
도운의‘크나큰 세 살림’가운데 첫째 살림으로서 정읍 대흥리 도장이 막을 올린 것이었다.

 
 
제13장 고수부님이 만동묘를 찾아간 까닭
 
“천하를 통일하는 도(道)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다시 진법(眞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道典11:29:2)
 
도장이 개창되었다면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도장을 개창한 지 며칠 뒤 성도들이 고수부님에게 교 이름[敎名]을 무엇으로 정하겠느냐고 물었다.
 
“천하를 통일하는 도(道)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다시 진법(眞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고수부님이 말했다.

 
고수부님이 자신이 개창한 도장을 선도라고 한 것은
증산 상제님이“나의 도(道)는 사불비불(似佛非佛)이요, 사선비선(似仙非仙)이요, 사유비유(似儒非儒)니라.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선(仙)에 붙여 놓았느니라”(4:8)고 했던


천지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불교와 비슷하지만 불교가 아니고,
선교와 비슷하지만 선교가 아니고, 유교와 비슷하지만 유교가 아닌, 유불선의 진액을

뽑아서 만든 선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불선 안의 선도가 아니라 유불선을 포괄하는 선도라는 점에 유의하자.
이‘선(仙)’은 후천선경의 그것이다.
증산 상제님의 도는 선천문화의 종교가 아니다. 그랬으므로,
당시 성도들이 같은 질문을 자주 하였기 때문에, 과도기에 그렇게 부르게 한 것이다.


도장이름은 머지않은 훗날 도운의 성숙시대를 여는 일꾼에 의해 바로 잡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고수부님의 말씀에서 나타난 ‘선도’가 정식 도장 명칭이 아니었다.


고수부님의 대흥리 시절에는 특별한 도장 명칭이 없었다.
외부인들, 당시 고수부님 도장의 활동에 주목했던
언론들에 의해 ‘선교(仙敎)’,‘ 선도교(仙道敎)’,‘ 태을교(太乙敎)’등으로 불렸던 것이다.

 
도장을 개창한 뒤 고수부님은 신경원(辛京元, 1863~1924)과 김병욱(金秉旭, 1874~1938) 성도에게
태인 우시장에서 검은 소[黑牛] 한 마리를 사 오라고 하였다.
이후 고수부님은 그 소를 기르며 도정(道政)을 집행했다.
고수부님은 왜 굳이‘검은 소’를 기르며 도정(道政)을 집행했을까.


‘교 이름’을‘선도’라고 하라는 것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검은 소’는 흔히 신선을 상징한다.

중국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가 은거 생활을 하기 위해 타고 갔던 소가 다름 아닌 검은 소였다.
‘검은 소’를 흑우(黑牛)라고 하지 않고‘청우(靑牛)’라고 한다.
소설가 이광수의 수필‘우덕송(牛德頌)’일절을 보자.

 
특별히 우리 조선 민족과 소와는 큰 관계가 있다.
우리 창조신화에는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사람의 조상을 낳았다 하며,


또 꿈에서 소가 보이면 조상이 보인 것이라 하고
또 콩쥐팥쥐 이야기에도 콩쥐가 밭을 갈다가 호미를 분지르고 울 때에 하늘에서

 검은 암소가 내려와서 밭을 갈아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민족은 소를 사랑하였고, 특별히 또 검은 소를 사랑하였다.

 
검은 소를 한문으로 쓰면, ‘청우(靑牛)’즉 푸른 소라고 한다. 검은빛은 북방 빛이요,
겨울 빛이요, 죽음의 빛이라 하여 그것을 꺼리고 동방 빛이요, 봄빛이요,

생명 빛인 푸른빛을 끌어다 붙인 것이다.


동방은 푸른빛, 남방은 붉은 빛, 서방은 흰 빛, 북방은 검은 빛, 중앙은 누른빛이라 하거니와,
이것은 한족들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요,

 

기실은 우리 조상들이 생각해 낸 것이라고 우리 역사가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
소! 소는 동물 중에 인도주의자다. 동물 중에 부처요,


성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만물이 점점 고등하게 진화되어 가다가 소가 된 것이니,
소 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거니와, 아마 소는 사람이 동물성을 잃어버리는

신성(神性)에 달하기 위하여 가장 본받을 선생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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