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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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을 것이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대원사(大院寺).
 
증산 상제님·고수부님 유적지 가운데 대원사는 같은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와 함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답사를 목적으로 천 년 고찰 대원사를 찾았던 것은 지금까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가장 최근에 찾았던 것은 2006년 9월 6일증산 상제님·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때였다.


 

같은 목적으로 처음 답사했을 때가 1999년이었으니까 매년 한 번씩은 찾았던 셈이다.

06년 답사 때 대원사로 통하는 길은 99년 처음 찾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99년 답사 때는 사람 하나가 겨우 오를 수 있는 좁은 등산로였으나
06년 답사 때는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진입로를 닦는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대원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 일승(一乘)이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창건하였으니
말 그대로 천 년 고찰이다. 일승 등은 고구려 보장왕(642∼668)때 백제에 귀화한 보덕(普德)의 제자들이다.

열반종의 교리를 익힌 일승 등은 보덕이 머물고 있는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대원사(大原寺)라 하였다.


한때는 대원사(大圓寺),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활동 당시에는 대원사(大願寺)로 한자를 표기하였으나
현재는 대원사(大院寺)라고 한다. 1066년(고려 문종 20)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嚴:1090∼1141)이 중창하였는데, 이때를 창건 연대로 보기도 한다.
 

대원사는 증산 상제님이 성도한 가람으로 유명하다.
불교 선지식 가운데 대승보살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유마힐(維摩詰) 거사 같은 재가

불자가 없지 않지만, 재가 불자도 아닌 인물이 절에 들어와 도통을 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정통 불교전각이 아니라 우리의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대원사 칠성각에서 도통을 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있겠으나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대원사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쪽 개울을 끼고 들어서는 초입에 서 있는 안내 게시판에서
증산 상제님·고수부님과 인연이 있는 두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대원사 중창자 진묵과 증산 상제님·고수부님 활동 당시 주지였던 금곡(錦谷)이 그들이다.


대원사는 1597년 (조선 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졌는데1606년(선조 39) 진묵이 중창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는 건봉사(乾鳳寺) 승려 금곡이 다시 중창하였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칠성각을 짓고
산내 암자인 내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옮겨왔다.

 

그때 칠성각은 머지 않아 증산 상제님 도문에서 성도가 될 전주사람
한약상서원규(徐元奎, 1855~1935)가 금곡과 상의하여 쌀 백석거리로 중수했다. 금곡과 서원규는 알았을까.
그들이 중수한 칠성각에서 증산 상제님이 성도하고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활짝 열게 될 줄을!
 
금곡은 상제님께서 성도하시기 전 임에도

불구하고 증산 상제님을 알아보았던 몇 명 되지 않은 인물 중의 한 명이다.
1901년 6월 고향마을 객망리 뒷산인 시루봉에서 공부하던 증산 상제님이 이곳으로 수행 장소를

옮겼을 때 나이 마흔 여덟이던 주지 금곡은“…천신이 강림하셨다”고 하면서


함거사, 조카 박영춘과 함께 시중을 들었다.

당시 아무리 퇴락한 불교집안이라고 하지만, 한 사찰의 주지가 그가 신봉하는 부처가 아닌

‘천신’을 알아보고 시중을 들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닐 터이다.
 
증산 상제님이 이곳에서 공부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근접을 일절 금하고 공부하시던 어느 날 밤,
비바람이 대작하고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크게 호령하시는 소리가 들리거늘


 

금곡이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고
증산께 아뢰기를“칠성각에 봉안(奉安)된 진묵대사(震默大師) 영정(影幀)이 마당에 떨어져 있고
칠성각의 방향이 옆으로 틀어져 있습니다.”하니 증산께서 “그러냐.”하고
답하시는 순간 당우(堂宇)의 방향이 원래대로 돌아오니라. (2:5)
 

금곡은 또한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열고 대도통을 한 증산 상제님을 가장 먼저 뵈었고,
미음을 끓여 바쳤고, ‘말씀’을 들었던 인물이다.
그 어마어마한 말씀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금곡이 올리는 미음을 다 비운 뒤 증산 상제님은“금곡아! 이 천지가 뉘 천지인고?”하고 물었다.
금곡이 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릴 때 증산 상제님은,
“내 천지로다! 나는 옥황상제니라.”천둥 같은 음성으로 말하고 크게 웃었다.
 
오늘날의 대원사는 그렇게 크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작지도 않은 가람이다.
증산 상제님의 흔적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증산 상제님·고수부님 유적지를 답사중인 나로서는 못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증산 상제님이 성도했던 성지 중의 성지가 될‘칠성각’이 없어졌다는 점이 그랬다.

1901년 증산상제님이 도통을 한 칠성각은 대웅전 오른편 건물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칠성각 건물은 없어졌고 지금은 새로운 3칸 건물에 스님네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이 이쯤 되었으면 궁금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칠성각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경내를 두어 바퀴 돌아본 뒤에야 나는 칠성각을 찾을 수 있었다.
칠성각이 아닌 칠성을. 정확하게는 칠성탱화를. 그러니까 칠성단이 되겠는데,
그것은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대원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있다.
바로 그 옆에 내가 찾는 칠성(탱화)이 봉안되어 있었다. 칠성단 옆에는 진묵대사의 진영이 걸려 있고.
비로소 증산 상제님의 유적을 만난 셈이었다. 나는 칠성단 앞에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칠성단에 모셔진‘칠성’님과, 증산 상제님이 공부할 때
칠성각 바닥에 떨어졌었다는 진묵대사 진영과, 1606년 이 절을 중창한 진묵대사가 만들었다는
목각사자상(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9호로 지정)을 한참동안 살펴본 뒤
조심스럽게 법당을 나온 나는 옆 건물인 옛날 칠성각을 다시 돌아보면서대원사 문을 나섰다.
 
 
조선민족에게 한도 많고 원도 많았던 망국의 해1910년이 가고 1911년 4월,
고수부님이 동생 차경석 성도와 류응화(柳應化),
류응화의 둘째 아들 석남(錫南)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전주 대원사였다.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고 대도통을 하였던 이곳을 찾아온 고수부님은 뜻 깊은 의식을 거행한다.
대례복을 갖추어 입고 증산 상제님의 성령과 혼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 혼례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속에서 사망한 사람끼리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그것도 자청하여) 죽은 사람의 혼령과 혼례식을 올리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수부님의 혼례식은 증산 상제님이 살아있을 때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시아버지로부터 며느리로 인정받은 직후였다는 점도 주목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수부님이 대례복을 입고 혼례식을 거행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례복을 입고 증산 상제님의 성령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고수부님에게 있어서 일종의 통과 제의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홀로 남은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요 후계사명자로서 수부의 위격을 삼계 천상과 인간계,
그리고 신명계에 공표하는 어떤 선언적 의식 같은….
 
천상천하에서 그 어느 벼슬보다 높은 옥황상제의 반려자. 그가 바로 수부이다.
고수부님은 바로 그 위격에서 대례복을 입고 증산 상제님 성령과 혼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물음. 왜 이 시점에서 혼례식인가?
그것도 증산 상제님이 이미 어천한 뒤 성령과의 혼례식을?
그것은 자기의 재발견에 따른 행위가 아닐까.


 

증산 상제님 재세시의 혼례식 때 고수부님은 당신이‘옥황상제’라는 사실을 몰랐다.
증산 상제님의 초빈을 찾아 (증산 상제님이 남겨준) ‘옥황상제’라는 명정을 덮어주면서
당신이 상제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본래 두 분(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인용자)의 만남은
상제님이 새 세상을 여는데 반려자가 필요하여 일방적으로 차경석 성도를 만나 맺어진 인연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수부님도 상제님이신 줄을 깊이 있게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대가 선천적으로 밝으신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고수부님은 상제님의 처소에서
밝은 대광명이 출몰하는 기현상을 자주 보셨습니다.

 

 

그리고 살면서 기운을 받아 신명이 열리고
대공사에 친히 수부(퍼스트레이디)로서 참여하여 근본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나,
상제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발생한 옥황상제 명정사건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남편의 정체를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에 자신이 남편으로 모신 분이 천상의 상제님으로서 인간으로 와
새로운 천지운로와 기장을 세운 천지공사를 마치고 천상에 올라가셨음을
이때 뼛속 깊이 각성하셨을 것입니다.”(안경전,『 대도문답 2』)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평생 반려자인 남편이 옥황상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수부님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당장에는 두 가지 과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나는‘옥황상제’의 반려자인 수부로서 천지공사를 직접 행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증산 상제님이 재세 시에 당신에게 붙였던 여러 가지 도수를 이루는 일이었다

결국 그렇게 현실화되겠지만.
 

후자와 관련해서 증산 상제님 어천 전까지

천지공사를 수행해 왔던 고수부님에게 주어진 사명은 막중하였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종통대권 후계사명으로서 도문을 개창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문을 개창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할 것인데,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꼽힐 수 있는 인물들은 증산 상제님 재세시에 추종했던 성도들이었다.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고수부님이 그들을 규합하여 도문을 개창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후계사명을 받은 고수부님을 불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부님이 당장에 도문을 개창한다면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는 수부로서 천지공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능(삼계대권)을 얻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증산 상제님 대행자로서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전자는 도통을 하는길이요,


 

후자는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바로 그곳에서
증산 상제님의 성령과 혼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정식으로 증산 상제님과 하나

되었음을 재확인 시켜 주는 일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고수부님과 증산상제님의 성령과의 혼례식을 통과 제의적 의미로 분석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는 혼례식 직후의 고수부님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혼례식을 올릴 때 고수부님은 만고장상(萬古將相)의 이름을 적어
차례차례 크게 불러 자기가 옥황상제의 반려자가 되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혼례식이 끝난 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바로
그 자리 대원사 칠성각으로 들어가 49일 동안 진법주 수련을 시작했다.
도통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원사 칠성각 49일 진법주 수련에 대한 일화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다만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이 도통의 길을 갔던 바로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다는 행적에 주목하자.

대원사 칠성각에서 49일 동안 진법주 수련을 마친 고수부님은 딸 태종과 함께
고부 운산리 신경수 성도의 집으로 갔다.

증산 상제님이 천지공사를 보았던
신경수의 집 윗방으로 들어간 고수부님은 그날부터 다시 1백일 동안 수도에 들어갔다.
 

작정한 1백일을 채우던 날, 고수부님은 별안간 눈앞이

환하게 열리면서 천지우주의 뭇 이치를 밝게 깨달음으로써 활연대각(豁然大覺)하였다.
불교에서 활연대각은 완전히 변하여 깨닫는 것,

 

청정무구(淸淨無垢)해 짐으로써 깨닫는 것, 혹은 활짝 깨닫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수부님의 도통은 한순간에, 불교 선가의 용어로 돈오(頓悟)적인 그것이 아니고

몇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증산 상제님 재세 시에 자옥 도수를 받았던 차경석은 문밖출입을 할 수 없었다.
가장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으므로 집안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차경석과 그의 가족들이 궁핍하다는 것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고수부님이 그만큼 궁핍했다는 얘기가 된다.
고수부님이 운산리 신경수의 집에서 활연대각하고 대흥리로 돌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해 9월 19일은 증산 상제님 성탄 40돌이다.
고부운산리 신경수 성도의 집에서 대각을 한 고수부님의 위상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차경석을 불러 증산 상제님의 성탄치성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경석은 배포 있는 사내였다. 주위의 권유로 장사나 할까 하고
빌린 돈 6백 원 가운데 치성비를 뚝 떼어내어 고수부님이 명하는 대로 제수를 준비하였다.
 
증산 상제님의 성탄일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성탄치성 이후로부터 증산 상제님에 대한 성탄치성이 시작되었다.


 

치성을 지내는 고수부님은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다음 날(9월 20일) 아침, 고수부님은 방을 나왔다.
동쪽 산 너머로 해가 떠오를 무렵 청량한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마당을 거닐던 고수부님은 별안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깜짝 놀란 가족들이 우르르 달려와 고수부님을 떠메어 방안에 눕히고
팔다리를 주물러 보았으나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일을 당하여 딸 태종은 물론이요,
차경석 형제 가족까지 온 집안이 혼비백산하면서 뒤이어 통곡이 터져나왔다.
 

9월 20일 아침에 수부님께서 이렇게 네댓 시간을 혼절해 계시는 중에
문득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한 가운데 큰 저울 같은 것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오는지라 자세히 보시니
오색찬란한 과실이 높이 괴어 있는데 가까이 내려와서는
갑자기 헐어져 쏟아지거늘 순간 놀라 깨어나시니 애통해하던 집 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니라. (11:19)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고수부님이 깨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던 고수부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방안에 가득 둘러앉아 있는 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눈빛이 차경석에게 머물렀다.
 
“네가 누구냐?”고수부님이 물었다.
고수부님이 아니라 증산 상제님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의 목소리로 말하였다는 것은
고수부님의 도통이 증산 상제님 상제의 성령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의미일 터였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차경석이 자신의 성명을 말했다.
고수부님은 또 무슨 생이냐고 물었다. 경석이“경진생(庚辰生: 1880)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도 경진생이라. 속담에 동갑장사 이(利) 남는다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장사하자.”고수부님이 말했다.
 
경석이 우물쭈물하는데 고수부님이 다시 생일을 물었다.
경석이 6월 초하루라고 대답하였다. 경석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고수부님은,
 
“내 생일은 3월 스무엿샛날이라.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을 것이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 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하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과연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날 아침부터 정오까지 전개된 일련의 일들은 전체적으로 세 가지 의미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고수부님이 천지대신문을 여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둘째,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 붙여준 도통 도수가 최종적으로 현실화되는 장면이다.
다시 말하면 고수부님에 의해‘대도(大道)’개척사의 첫발을 내딛는 축복의 시간대를 여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먼저 고수부님이 차경석에게 얘기한‘동갑장사’라는 말씀에 주목하자.
이야기 중간에 언급되었듯이 고수부님과 차경석은 같은 1880년생으로 동갑이다.
따라서 고수부님이 경석에게‘동갑 ’이라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 있다.

문제는‘장사’라는 비유의 내용이다.


 장사’내용은 말할 나위 없이 (증산 상제님)도운사의 개척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뒤의 말씀에 있다.
고수부님은 낙종물을 맡고 차경석은 이종 물을 맡으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모내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낙종’은 곡식의 씨앗을 뿌려 심는 것이고‘이종’은
그 씨앗이 발아하여 조금 자란 모종을 옮겨 심는것을 일컫는다. 보통 3월에 낙종하고 5~6월에 이종을한다.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전자의 의미는 고수부님이 주인공이 되는 개창(파종) 도수이고,
후자는 차경석에게 붙인 이종 도수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수부님 천지공사의 특성에 대해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음에 주목하자.
하나는 증산 상제님과 같이 직접 천지공사를 행하는 모사재천(謀事在天)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증산 상제님이 공사

(모사재천)로서 붙여놓은 도수를 이루는‘성사재인(成事在人)’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 날 진행된 공사도 마찬가지다. 고수부님은 천지공사 주재자로서
차경석에게 이종 도수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파종 도수를 맡음으로써 모사재천과

성사재인을 동시에 맡는 주인공이 됐다.
 

이 공사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말씀’은‘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다’는 내용이다.
고수부님이 (파종도수로서) 씨앗을 뿌리고 차경석 성도가 (이종 도수로서) 모를 옮겨 심으면
그것을 이어받아 추수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추

 

수할 사람은 다시 있다’의‘다시’에 주목한다면,

‘이종 도수’를 이어 받되, 그냥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정리 내지는 갈무리하여 질적인 대전환을 통해 결실 도운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 추수할 사람이 누구인가? 대두목이요, 대사부이다.
 

대두목은 상제님의 대행자요, 대개벽기 광구창생의 추수자이시니
상제님의 계승자인 고수부님께서 개척하신 무극대도 창업의 추수운을 열어
선천 인류문화를 결실하고 후천 선경세계를 건설하시는 대사부이시니라. (6:2)
 

이 날 공사 내용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후천 가을 개벽시대에 새 생명을 추수하는 증산 상제님 대도의 첫 씨앗을
고수부님이 뿌리고(파종 도수),
그의 동생 차경석이 옮겨 심고(이종 도수)
이를 매듭짓는 대도의 추수사업(추수 도수)이 대사부의 출세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수부님의 첫 번째 선언,
즉‘파종 이종 추수’도수는 도운공사에 다름 아니다.
대도통을 하는 이 날, 고수부님의 첫 말씀이 도운을 짜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대인(증산 상제님- 인용자주)의 말은 천지에 쩡쩡 울려 나간다”(6:37)라고 하였다.
대도통을 하고 천지대신문을 여는 날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과 일체가 되어 도운공사의 말씀을 천지에 선포한 것이었다.
 
아아. 고수부님 .
 
이로부터 수부님께서 성령에 감응(感應)되시어 수부로서의 신권(神權)을 얻으시고
대권능을 자유로 쓰시며 신이(神異)한 기적과 명철(明哲)한 지혜를 나타내시니


천하 창생의 태모(太母)로서 상제님 대도의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니라.
이로써 일찍이 상제님께서“장차 천하 사람의 두목이 되리니 속히 도통하리라.”

하신말씀이 응험되니라. (11:19)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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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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