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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님 탄생 일화 한 토막
 
1879년 5월 박씨 부인이 어느 절에서 기도할 때 꿈을 꾸게 되었다.
높은 산에 올라 한 웅장한 집에 들어갔다.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과 누런 책을 한 권씩 주었다.
황송하고 놀라운 마음으로 두 권의 책을 받는 순간 꿈을 깼고,
그때부터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후일 수부님이 되신 판례였다.
 
고수부님 탄강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서는 증산 상제님의 탄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증산 상제님께서“내가 미륵이니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혀 주었다는 것은 이미 소개하였다.


증산 상제님은 또한 구천(九天)에 계시다가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다”(2:15)고

탄강내력에 대해 말했다. 증산 상제님의 이러한 탄강내력이 전제될 때 고수부님이 밝힌

당신의 전생과 탄강과정, 목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금산사 미륵전 남쪽 보처불(補處佛)은
삼십삼천(三十三天) 내원궁 법륜보살(內院宮法輪菩薩)이니 이 세상에 고씨(高氏)인 나로 왔느니라.
내가 법륜보살로 있을 때 상제님과 정(定)한 인연으로 후천 오만 년 선경세계를 창건하기로 굳게 서약하고
세상의 운로에 맞춰 이 세상과 억조창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상제님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왔느니라.”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내가 이 세상에 오려고 모악산 산신으로 내려와 있던 중에,
상제님께서 오시기에 금산 미륵불로 인도하고 시종하다가
상제님께서 개 구(狗) 자 아홉 드는 구구지(九狗地)의 중앙인 시루산 아래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나시기로 나는 9년 만에 담양땅 고씨문(高氏門)에 태어났느니라. (11:20)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고수부님의‘말씀’중에는 많은 불교용어가 등장하지만,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인 경우가 많이 있다.
인용문 중에 있는 불교용어를 그대로 풀이하면‘삼십삼천’은 욕계6천(欲界六天) 가운데
제2천인 도리천(利天)으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Sumeru)의 정상에 있다.
그곳에는 미륵이 아닌 제석천(帝釋天, Indra)의 천궁(天宮)이 있다.

 

내원궁’은 욕계 6천 가운데 제4천인 도솔천에 있다는 미륵보살의 정토(淨土, 處所).
불교설화에 기대면 미륵보살은 내원궁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이 세상에 하생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법륜보살은 불교경전에도 등장하는 보살이다.


원래 법륜은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인

륜성왕(轉輪聖王)이 갖고 있는 보배 바퀴로서 부처의 가르침·불법을 비유하는 용어이다.
이와 같이 각각의 불교용어를 문자 그대로 풀이해 보면 의미망이 연결되지 않지만,
우리는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입장에서 의미망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고수부님은 전생에, 증산으로 오신 미륵불을 모셨던 법륜보살이었고,
그때 증산 상제님과 인연을 맺어 후천 오만 년 선경세계를 창건하기로 서약하고
억조창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증산 상제님을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고수부님은 모악산 산신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상제님이 인간으로 강세하시기에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로 인도하고 시종하다가
증산 상제님이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태어난 뒤에 고수부님 자신은 9년 후에 담양땅

고씨 문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결국 고수부님은 전생에서부터

증산 상제님을 모셨고 인간으로 오는 과정에서도 인도, 시종했던 분이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은 전라도 고부와 담양 땅에서 각각 태어나 서로 모른 채 성장하였으나

결국 그 두분은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이다.

 

훗날 증산 상제님께서 고수부를 만났을 때“수부, 잘 만났구나.
만날 사람 만났으니 오죽이나 좋을쏘냐” (11:20)고 감개무량하였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1885년, 여섯 살이 된 판례에게는 첫 번째 불행이요,
그의 인생에 있어서 불운의 시작이기도 한 사건이 터졌다.
정확하게는 그해 9월 27일, 아버지 고덕삼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제적부가 그 햇수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봉건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의 타계는 곧 집안의 몰락을 의미한다.
박씨 부인과 판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덕삼이 죽은 그해에 판례는 어머니 박씨 부인의 치맛자락에 묻혀 정든 고향 땅을 떠났다.
고수부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곧 유랑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박씨 부인과 판례가 몸을 의탁한 곳은 외외가(外外家)인 송씨(宋氏) 집안이었다.
고수부님 도장의 핵심간부였던 전선필 성도의 제자 이우인 씨의 증언(인터뷰, 2003. 6. 19. 대전시 선화동)

에 따르면 당시 고수부님의 외외가는 담양군과 순창군 접경지역인 달성산(達城山)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암자였다고 하지만, 더 이상의 확인은 불가능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고수부님의 외외가가 암자였다는 점이다.
미륵불 증산 상제님이 천상에서 인간으로 올 때 자신이 직접 모악산 산신이 되어

금산사 미륵불로 인도, 시종하였다고 밝힌 고수부님의 지상에서의 종교적 생애의 첫 출발 지점에

암자가 놓여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암자’에는

‘미륵불을 모신 전당’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는 것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고수부님이“여섯살에 부친상을 당하시고 이로부터 모친을 따라 외외가 송씨의 승문(僧門)에 귀의하여

수행하였다”(11:3)는 기록이 우리의 의미망 안에 오롯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결국 미륵불이신 증산 상제님을 만나 반려자가 되고 후일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맡게 될
고수부님은 이때부터 이미 미륵불인 증산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외외가란 외할머니의 친정이다. 고수부님의 제적부에 따르면 송세녀 할머니의 친정이라는 애기다.
박성녀 부인의 입장에서 굳이 외가로 간 것은 당신의 친정 부모님이 살아 계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살아 계셨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다.
 
확실치는 않지만 박씨 부인과 어린 딸은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살지 않았을까.
불목하니란 절집에서 밥짓고 물 긷는 일을 맡아 하는 소임이다.


박씨 부인은 주로 밥을 짓는 공양주 노릇을 하고 판례는 절집 안팎을 소제하고
물을 긷고 밥을 지을 때 불을 지피는 일을 하였을 것이다.

 

아직 어린 판례로서는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일어나
그런 일들을 감당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고통스러운 절집 수행이요,

미륵불 모시기였다.
 
고판례가 아홉 살이 되던 1888년, 모녀는 외외가 암자를 떠났다.

정확한 이유는 확인할 수 없다. 경제적인 문제는 아니었을까.
망국으로 치닫던 하수상한 시절, 침략적 제국주의가 물밀듯 밀려오는 가운데
부패한 봉건 탐관오리들은 국가 안위를 걱정하기는커녕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더구나 1888년 그해는 큰 흉년이 들어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하기만 하였다.
암자의 경제력도 궁핍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중앙 정부와 멀리 떨어진 농촌이라고 해서 나라 안팎에서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풍우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가면 꽁보리밥 한 숟가락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으며
밤이면 두 발 뻗고 잠 한 번제대로 잘 수 있단 말인가. 가냘프기만 한 어린 판례의 손목을 잡고 길을

떠나는 어머니 박씨 부인은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앞날이 암담했을 것이다.
 
 
제2장 시천주 조화정侍天主造化定
 
동학 주문에‘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그날 고수부님의 탄강지 성도리를 답사하고

마을을 벗어난 답사팀 일행은 다시 담양 13, 15번 도로에 섰다.
답사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나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방금 답사하고 나온 도동마을을 돌아보았다.
 
차는 다음 코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여 미터쯤 갔을까,
차는 중앙선을 가로질러 건너편 좁은 농로 쪽으로 치고 올라가 농수로 위편 조그만 공터에 멈추었다.
가이드를 중심으로 일행은 오른 편 골짜기로 10여 미터쯤 풀밭을 헤치고 갔다.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갔던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감나무 몇 그루가 띄엄띄엄 서 있는 너른 밭의 구석진 곳에 돌부처 한 기가 외로이 서 있다.

 

도로에서 직선으로는 7, 8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돌미륵은 도로 건너,
저쪽 강 건너고 들판 건너 성도리를 향하고 서 있었다. …

잠시 후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참배를 하고 돌아섰다.
 
차는 다시 달린다.

13, 15번 도로를 지나 차는 1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말이 1번 국도이지 한적한 시골도로일 뿐이다.
얼마나 갔을까. 차는 담양군을 지나 장성군 지역을 가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백양사라는 간판이 나타났다.

가이드는 깊고 가파른 골짜기 저쪽 너머에 백양사가 있다고 소개하였다.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해 보면 전라도 도로만큼 정이 가는 도로가 또 있을까.
포장도로이긴 해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십중팔구는 야트막한 언덕이다. 언덕은 넓기만 하였다.
그 너른 언덕은 검붉은 황토 빛 밭으로 변해 각종 채소를 키우고 있다.
좁은 도로는 그 드넓은 밭과 밭 사이를 뚫고 서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길은 멀기만 하였다.
 
고수부님을 생각한다. 1백여 년 전,
정확하게는 1백 11년 전 어린 고수부님이 당신의 어머니 박씨 부인과 걸어갔을 바로 그 길을 나는 가고 있다.
 
멀리 오른쪽 골짜기 너머로 전남 장성 북하면과 전북 정읍 입암면,
순창 복흥면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백암산(白巖山: 741m) 능선을 오른편으로 끼고 차는 달린다.
차는 경사 길을 오르고 있었다.


장성 북상면과 정읍시 입암면 사이에서 경계를 이루는
입암산(笠巖山: 655m)을 끼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갈재를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가지만, 1백여 년 전 그때 아홉 살 어린 판례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지
영문도 모른 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참고 또 참고 말없이 걷고 또 걸었을 길이다.
아마도 어린 판례는 난생 처음 그렇게 먼 곳을 걸어가지 않았을까.
 
장성 갈재를 넘은 차는 다시 내리막길로 쏟아질 듯 내달리고 있었다.
골짜기 저쪽으로 제법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오른 편은 내장산국립공원이다.
멀리 내장산 정상인 신선봉이라 그 너머 장군봉, 혹은 내장산 아래쪽 상왕봉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높지 않지만 칼날같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입암산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입암산과 그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분지형으로 제법 넓은 들판을 이루는 이곳은 정읍시 입암면-.
그날 오후, 장성갈재 정상에서 다시 내리뻗은 도로를 타고 내려와 내리막길로 치달을 듯이
달려온 우리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대흥마을이다.

 

답사를 오기 전에 고수부님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눈이 시도록 많이 보았던‘대흥리(大興里)’가 바로 이곳이다.


천원역(川原驛) 서쪽에 있는 대흥마을은 고수부님의 성장지일 뿐만 아니라
증산 상제님 어천 후 도문을 개창하는 장소로서 고수부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지금까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생애를 기록한 초기 기록은

대부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로 표기하고 있으나 행정구역 지명으로서 대흥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한 행정구역 명칭은 입암면 접지리 대흥마을이다.

 

대흥마을이‘대흥리’로 불려지게 된 것은

보천교(普天敎, 보천교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얘기하게 될 것이다)가
교세를 떨치면서 전국의 신도들이 이곳으로 모여든 이후
보천교인들에 의해 불려진 지명이다『( 정읍군지』). 여기서는 편의상 대흥리로 지칭한다.
 
대흥리는 입암산을 비롯하여 입암면 마석리(磨石里)와 소성면 중광리(中光里)
사이의 국사봉(國師峯), 접지리와 지선리(芝仙里), 마석리 사이에 아담하게 솟아있는 비룡산(飛龍山)
능선이 깎아지른 듯 빙 둘러서 있는 가운데 드넓은 분지를 이루는 들판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일행은 마을 초입에서 내렸다. 고수부님과 관련된 곳으로 그렇게 유명한 대흥리

거리를 두발로 직접 걸으면서 확인해볼 심사로.
 
걸어가면서 나는 예사롭지 않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동네 골목길이라고 하기에는 좀 넓고, 도로라고 하기에는 좁다고 느껴지는‘골목길’이다.
어쨌든 차 한대가 제법 여유를 부리며 다닐 수 있는 길이니까 도로라고 하는 편이 옳다. 도로뿐만이 아니었다.

인가도 마찬가지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그렇다고 여느 시골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도시 냄새가 물씬 풍겼다. 대도시의 변두리쯤이라고 할까.

2, 30미터 정도 되는 대흥리 거리를 뚝 떼어 놓고 걸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어느 대도시의 뒷골목을 걷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것이다.


우선 도로 양쪽으로 처마를 맞대고 빽빽하게 늘어선 민가들이
십중팔구는 담장을 두지 않고 곧바로 도로와 맞대고 있는 것이 그렇다. 또 있다.

 

큰 도로에서 10미터 정도 들어가면 도로는‘ㄱ’자로 꺾어지는데 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할 때
기계소리가 철커덕철커덕 들려왔다. 한두 집이 아니었다.
도로 양쪽으로 여기저기 민가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아무래도 시골에서는 좀 낯설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 베를 짜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 대부분은 보천교도들입니다. 그 후손이기도 하구요.
보천교가 한창 기세를 떨칠 때, 교주인 차경석의 명으로 전국에서 보천교도들이 모여들었거든요.
당시 이곳 대흥리는 대도시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그들이라고 놀면서 먹고 살 수는 없잖아요. 농사를 짓자니 땅은 한정되어 있고,
무엇이든 직업을 가져야 했고, 그러다 보니까 저런 가내수공업을 하게 된 것이지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일행이 도착한 곳은 도로 모퉁이에서 10여 미터를 더 걸어간 곳이다.
기왓장으로 용마름을 한 돌담장이 빙 둘러쳐져 있는 가운데 전체가 태극문양으로 채워져 있는

어느 고택의 대문 앞이다.


가이드로부터“보천교 본부 건물입니다”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앗’하고 탄성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가이드로부터 어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고 있는 고수부님이‘씨앗’을 뿌리고
그의 이종사촌 동생 되는 차경석 이‘모종’을 옮겨 심어 6백만 신도를 거느렸다는 바로 그곳이다.
망국의 인민들에게 한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아니나 다를까.

 

도로에 서서 돌담장 너머로 희끗희끗 드러나 보이는
거대한 용마루만 보아도 한때의 화려했던 기억을 이제는 쓸쓸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어디 보천교뿐이겠는가. 고수부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보천교 본부 건물 밖을 답사한 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통과하면 대여섯 평쯤 되어 보이는 마당이 나타난다.
본채와 아래채 건물 두 채가 처마 모서리를 맞대고‘ㄴ’자로 꺾어져 있는 마당이다.

 

보천교 당시도 그랬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본채 측면과 아래채 측면이 모서리를 맞대고 있는 곳에 마당이 있다는 것은 전통적인

우리 한옥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정문을 지나면 본채가 마주 보이는 것이 우리네 상식 아니던가.


본채와 아래채 사이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것은 좁고 기다란 앞마당이다.
마당 절반은 얼핏 보아도 토마토와 상추, 마늘 등 각종 채소가 자라고 있는 채마밭이다.
거대한 고택에 비하여 궁색한 형편을 말해 주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본채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집 안팎을 감상하듯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당에서 두어 뼘 높이인 토방은 보통어른 반 팔 정도의 폭으로 집의 가로 길이에 맞게 길게 놓여 있다.
본채 정면은 통째로 유리창이 가리고 있다. 보천교 본부시절 당시가 아니라 뒤에 설치한 것이리라.
유리벽 안에는 마루가 본채 가로 끝에서 끝까지 놓여있다.


본채는 다섯 칸으로 보였는데 일반 가정집으로 보면 열 칸은 되어 보일 정도로 큰 건물이다.
칸마다 네모진 기둥이 서 있고 중앙에 네 쪽으로 구성된 방문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두 쪽으로 된 방문 그러니까
총 다섯 개의 방문, 개수로는 열두 개의 방문들이 굳게 닫혀 있다.
 
우리 일행이 건물 안팎을 세세하게 둘러보며

인기척을 냈으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건물안팎에는 왠지 모를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내친 김에 나는 중앙의 유리창 문을 조금 열고 마루 끝에 걸터아 앉아 멀리 돌담장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 거대한 고택에는 현재 보천교주 차경석의 아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암자에서 떠난 어린 고판례가 어머니 박씨 부인과 함께 도착하여 살게 된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판례는 이곳에서 성장했고 이곳에서 혼인했으며 또 이곳에서 증산 상제님을 만나 수부가 되었고

후일도문을 개창하게 된다.


네 시기로 크게 구분한 고수부의 생애 가운데

세 번째 도정집행기를 활짝 열어젖힌 대흥리 첫째살림 도장의 중심지도 바로 여기이다.

이 마을에 보천교 본부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고수부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름으로 말하면

‘수부소(首婦所)’가 있으며 고수부님의 첫 번째 살림도장 본소(本所) 터이기도 하다.
 
고수부님이 도장을 개창하셨지만 고난도 없지 않았던 이곳-.
고수부님은 당신이 씨를 뿌리고 키웠던 이곳 대흥리 도장에서 가장 가까운 피붙이인
이종사촌동생 차경석으로부터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배반을 당하고 쫓겨나다시피 떠나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고수부님이 감당해야 했을 첫 번째 배신이었다.
 
그날 답사 마지막 코스로 일행은 수부소에서 나와 도로 맞은 편 골목길로 들어갔다.
막다른 골목길 너머는 벼들이 자라고 있는 들판이다.


마을 뒤편 논둑에서 가슴 높이쯤에 제법 큼지막한 공터가 보였다. 옥수수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지만,
온전한 밭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공터 곳곳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흙더미로 덮여 있는 바위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자세히 보면 왠지 정으로 찍어낸 흔적이 역력한 바위들이다.

가이드는 이 바위들이 보천교가 가장 화려했던 시절,
진짜배기 보천교 본소를 이루었던 건물들의 주춧돌이라고 하였다.


본격적인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살펴보겠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보천교가 해체되어
보천교 본소 건물들이 뜯겨져 옮겨간 곳이 현재 서울 조계사 대웅전과 옛 전주역사 건물들이다.
 
보천교 본소 터를 나온 나는 다시 수부소 터로 향했다.

내 관심은 고수부님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수부소 안팎을 동영상으로 찍어 내 뇌리 속에 챙겨둘 요량이었다.


수부소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던

나는 다시 일행 속에 묻혀서 조금 전에 왔던 도로 맞은편 쪽으로 갔다.

10미터 정도 가면 하천이 흐르고 있다. 물이 말라버려 잡초가 우거진 천변 사이로 졸졸 흐르고 있지만,
옛날 고수부님이 대흥리 수부소에 머무르고 있을 때 증산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데리고 목욕을 하셨다는 바로 그 하천이다.
 
대흥리에서 하루는 차경석,

안내성, 박공우를 데리고 앞내에 나가 목욕하실 때 경석에게 명하시어
소금 한줌을 가져다 물 위에 뿌리게 하시고 물에 들어서시며 “고기잡이를 하리라.”하시더니
느닷없이 경석의 다리를 잡고“큰 이무기를 잡았다.”하시거늘
경석이 아뢰기를“제 다리입니다.”하니“그렇게 되었느냐?” 하시고 놓으시니라.

 

이후에 경석과 공우를 데리고 어디를 가실 때

경석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이무기가 용(龍)이 되려다가 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면 30리 안이 쏘가 되나니 이 말을 잘 기억하라.”하시니라. (6:54)
 
증산 상제님의 행동 하나하나는

곧‘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는’천지공사 아님이 없다고 했다.
물론 저기 하천에서 목욕하면서 보여 주신 그날의 모습도 천지공사다.

그때 증산 상제님은 차경석을 잡고 ‘큰 이무기를 잡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무기가 용이 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면 30리 안이 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앞으로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퇴락한 대흥리의 풍경은 곧 이 공사가 현실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큰 이무기’차경석은 용이 되려고 했으나 되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리를 건너 곧장 가면 막다른 지점에 작고 아담한 시골 역사(驛舍)가 나타난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장에 종종 등장하는 천원에 자리한 역이다.


역사 안팎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흔적조차 사라진 고수부님의 체취를 애써 찾던 나는
역 앞마당 오른쪽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게 앞 평상에 앉았다.
천원 역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역사 지붕 위로 붉은 해가 뉘엿이 저물고 있었다.
 
 
박씨 부인과 어린 고판례가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당시 행정구역으로
정읍현 남이면 접지리 대흥 마을이었다. 짧지 않은 거리다. 난생 처음 그렇게 먼 거리를 산 넘고

물 건너 들판을 지나 걸어서, 걸어서 온 어린 판례는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모녀가 찾아간 곳은 대흥리 차치구(車致九: 1851~1894)의 집이었다
(우리 고수부님 성지 답사팀 일행이 도착한 대흥리 보천교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차치구는 판례의 이모부이며, 판례의 어머니 박성녀와 차치구의 아내 박씨 부인(1857~1921)은 자매 사이다.
차치구의 아내인 박씨 부인은 박춘화와 송세녀 사이의 3녀니까 장녀인 박성녀의 아래 아래 동생이 된다.
 
결국 모녀가 두 번째로 몸을 의탁한 곳이 동생의 집이었다. 그 당시 모녀의 사정이,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어떠했을지 추측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더부살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씨 부인도 그렇지만 어린 판례로서도 암자시절이나 차치구의 집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치구를 주목한다. 본관은 연안(延安),
초휘(初諱)는 중필(重弼), 족보명은 행중(幸重), 자(字)가 치구이다.
1851년에 정읍 입암면 마석리에서

차운오(車雲五, 1806~1853)와 김해 김씨 사이에 3형제 중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가난한 집안에 신분도 평민이어서 서당에도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키가 7척 거구인 데다 기개가 남달라 장수감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한때 고창으로 이사를 갔었으나 스무 살 안팎에 마석리 이웃마을인 대흥리로 옮겨왔다.


판례와 그의 어머니 박씨 부인이 몸을 의탁할 무렵
차치구는 동학접주『( 도전』)로서 가혹한 고리대를 열성으로 정리해 주고 억울한 송사를 풀어 주거나
강제로 빼앗은 장지(葬地)를 되돌려 주는 등 평소 이웃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는 고강한 인품의 소유자.
 
차치구 일화 중의 하나-.
 
대흥리 이웃마을 지선동에 임 감역(감역은 벼슬이름)이라는 천석꾼 부호가 살고 있었다.
감역은 전라도 남쪽 지역에 많은 토지를 갖고 소작을 주었는데 양반 끄트머리인

소작인들은 위세를 빌려 도조를 내지 않았다.


감역은 청년 차치구에게“도조를 받아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차치구는 소작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중 힘센 두 사람을 잡아 꺾고는“양반인 주제에
도조를 안내는 도둑놈 짓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기가죽은 소작인들로부터

도조 수백 석을 거두어들인 뒤에 차치구는 소작인들을 불러 술과 고기로 잘 대접했다.
“갑자기 도조를 내느라 무리했을 터이니 3분의 2는 도로 가져가시오.
다음부터는 도조를 꼬박꼬박 내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동네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때 임 감역의 집에는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감역은 차치구더러 들어와 살면서 호랑이를 몰아내 달라고 청했다.
차치구는 가족을 데리고 그 집에서 살았다.


이와 같은 일화를 소개하는 이이화는“이런 이야기들은 그가 이 지방 민중의 가슴 속에
전설적인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썼다(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차치구와 부인 밀양 박씨 사이에는 4남 1녀를 두었다. 이들은 고판례의 이종사촌 동생들인 셈이다.
장남차윤홍(車輪洪, 족보명 경석)을 비롯하여 윤경(輪京:1882~1957, 족보명 노훈魯壎),
윤칠(輪七:1884~1920, 족보명 병국炳國), 윤덕(輪德: 1893~?, 족보명 하운夏壎)이 그들이다.

 

판례와 나이가 같지만 생일이 늦어 이종사촌 동생이 되는 차윤홍은 족보명 경석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호는 월곡(月谷). 고수부님의 전기적 생애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차경석은
훗날 장성해서 아버지 차치구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했고 배포가 컸으며 그 사람됨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차윤칠은 성품이 좀 과격한 편이었으며 윤덕은 수려한 용모에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한평생을 살다가 보면 언제 어느 곳에 있었느냐에 따라서 인생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이 그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고수부님은 어떠하였을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인 아홉 살 이후 열다섯 살 때까지 성장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치게 되는 인물들은 누구였을까.

어머니와 이모를 제외한다면 가장인 차치구, 그리고 경석을 비롯한 이종사촌 동생들일 것이다.
특히 차치구는 수부님의 젊은 시절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당시 38세인 차치구는 판례에게 있어서 가장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대신하게 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고판례의 행적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정읍지역 동
학 접주인 차치구를 좇아 동학을 믿으면서 시천주주(侍天主呪) 수련을 하셨다(11:3)는 것이었다.

 

그의 동학신앙은 불교 경험에 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종교체험으로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증산 상제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전자가 미륵불 신앙을 경험한 것이라면
후자는 상제신앙을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수부님은 (결국 만날 사람이지만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는) 증산 상제님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여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차치구가 동학에 입도한 적이 없다는 일부 기록이 그것이다(이이화, 앞의 책).
차치구는 갑오년(1894) 동학 혁명 때 정읍지역 책임자로서 당시 동학 대접주였던 손화중(孫華仲)의 족질
손여옥(孫如玉), 손화중의 처남 유용수(柳容洙)와 함께 5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다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의암손병희선생 전기』;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외).
당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동학접주였다. 당시 갑오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은“네가 기포할 때
거느린 것은 모두 동학도였던가(汝起包時所率皆是東耶)?”라는 물음에“접주는 다 동학도이다.

그 나머지 인솔 하에는 충의의 선비라고 일컫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所謂接主皆是東學其餘率下稱以忠義之士居多). (…)


접주는 영솔하는 것을 말한다(領率之稱)”고 대답했다「( 전봉준공초」).
차치구의 손자 차용남 씨의 구술을 받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이이화는 앞의 책에서
차치구가 전봉준의 권유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참여했던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당시 차치구와 함께 정읍지역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다름 아닌 백산기포의 주력군이었던 손화중포(孫華仲包)의 최고지도자 손화중 대접주의 인척들이었고,
당시 농민군을 영솔했던 것이 접주였으며, 접주가 모두 동학도였다는 전봉준의 공초를 신뢰한다면,
차치구가 동학도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동학은 조선 후기 1860년(철종 11) 4월 5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하여
창도된 민족종교-. 최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860년 천상문답사건이다.
 
경신년(庚申年: 1860-인용자주) 4월 (…)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최제우「, 포덕문」)
 
 
이때 상제님으로부터“주문을 받으라”는 말씀을 듣고
최수운이 지은 것이 이른바 본주문 열석 자와 강령 주문 여덟 자로 구성된‘시천주주(侍天主呪)’였다.
“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 그것이다.

최수운의 이상사회상은 우선 동학의 근본교리인‘시천주’사상 위에 서 있다.

‘인내천(人乃天)’주의는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시대의 교리 발전과정에서 나온
원시동학의 교리인 시천주의 풀이에 불과하다. ‘시천주’는
상제님을 모신다는 뜻이 된다(신일철,「 최수운의 역사의식」).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도를 받고 동학을 창도한 수운은『용담유사』
에서“나는도시 믿지말고/한울님만 믿었어라//(…)//내역시 바라기는/한울님만 전혀믿고” 「( 교훈가」)라며
상제신앙을 가르쳤고“만고없는 무극대도/이세상에 날것이니”「( 몽중노소문답가」)라고 노래하며
이 땅에 (상제님의) 무극대도가 펼쳐질 것을 예고하였다.
천상의 상제님이 인간으로 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내(증산 상제님-인용자 주)가 (…)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2:30)
동학 주문에‘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동학이니라. (3:184)
 
 
1860년‘천상문답’사건 때‘말씀’으로 나타나
최수운에게 인류구원의 사명과 함께‘시천주주’주문을 내려준 주인공이 다름 아닌

증산 상제님 자신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최수운이 참형에 처해진 뒤 증산 상제님 자신이 직접 지상에 강세하였다는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또한 자신의 가르침이 곧 무극대도라고 밝히셨다.
당시 동학도인들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증산 상제님의 이와 같은‘밝힘’에 기대면
동학에서 신앙하는 상제는 곧 증산 상제님이 되는 것이다.
 
고수부님 이야기로 돌아오자. 고수부님이 아홉 살때부터
동학을 믿으며‘시천주주’수련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훗날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가 될 고수부님은 이때 이미 증산 상제님을 만났고
또한‘시천주주’를 통해 그 분을 애타게 부르고 계셨던 것이다.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을 만나는 것은 곧 예정된 길이었다.
그러나 인생만사가 그렇듯이‘만날 사람 만나는’(11:20) 과정은 멀고 험난하기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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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상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였다.

1987년 5월 월간《문학정신》을 통해 소설가 되었다.
현재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문예창작부에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연구논저《동아시아 근대소설과 민족주의》ㆍ
 
《손창섭소설 연구》, 장편소설《임진강》ㆍ《아리랑》ㆍ《붉은 까마귀》《풀잎은 바람에 눕지 않는다》
《태양인 이제마》, 논문〈최인훈《광장》의 사상의학적 구조〉ㆍ

〈강증산,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생애와 사상-〉〈수부, 천지의 어머니 -생애와 사상-〉등이 있다.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www.jsd.re.kr
(301-050) 대전시 중구 선화동 356-8번지 TEL.(042) 222-0680~4
상생의 새 진리, 증산도의 세계화·대중화를 위해 연구·저술·번역사업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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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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