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태모 고수부님 일대기 연재 제1회] 거룩한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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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 고난과 희생 속에서 온 인류의 원한과 죄업을 대속하신 우리들의 어머니
 
2006년 9월 8일, 전북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큰골마을 뒤편 오성산 숲길 초입이다.
큰골은 금강 남쪽 줄기에서 군산 - 익산간 27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 709번 지방도로와
이마를 맞대고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도로에서는 마을에 가려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바깥 세계와는 차단된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활처럼 휘어져 있는 도로에서 큰골마을을 향해 꺾어 들어가 몇 그루 늙은 소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는
오른편 동산을 옆에 끼고‘S’자로 살짝 비껴 돌아가면 그곳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갑자기 낯선 세계에 온 듯 주위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오성산-.
 
해발 226미터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내가 지금까지 찾았던 그 어떤 산보다도 높고 깊게 느껴졌다. 어떤 경외감이라고 할까.

 

나는 오성산자락에 묻힌 산그늘 속으로 휘돌아
오면서 벌써부터 숙연함을 느끼며 혼자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첫 번째 산행은 2000년 6월 3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기회만 되면 마치 이끌리는 듯 이곳을 찾아오곤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바로 이곳 오성산 초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마음을 다잡곤 했다.
햇빛 한 줄기 내리지 않는 울창한 숲,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들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차가 움직인다. 오솔길을 치고

올라가는 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내 마음은 벌써부터 불을 머금은 듯 요동쳤다.
다시 이곳을 찾았다는 설렘과 함께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슬픔, 기쁨, 사랑, 미움, 증오, 분노, 고독, 뿌듯함, 따스한 온정, 냉정과 열정, 우울과 환희,
그리고 그리움들이 한꺼번에 요동치는 것이었다.
내가 곧 도착하게 될 그곳에서, 70여 년 전에 이 길을 걸어갔을 고
수부님이 생애의 마지막을 보내시며 남겨준 풍경이 너무나 애절한 까닭이다.
 
고판례(高判禮: 1880∼1935)-.
 
이 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의 암울했던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봉건주의의 서슬 퍼런 칼바람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구한말,

한낱 이름 없는 여성으로 태어나

온갖 탄압과 배신, 질곡의 역사 위에서 여성해방의 푯대가 되신 온 인류의 어머니.
아무리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모성애를 갖고 있는‘큰 어머니’로서


인간은 물론 돌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나뭇잎 새에 흐르는 햇빛 한 줄기,
작은 새 한 마리까지 사랑하며, 사랑하며 한 생애를 살다가 간 인물이었다.
이 분을 우리는 여자 하나님,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님이라고 부른다.
 
 
태모 고수부님-.
이 분의 생애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증산(甑山)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란 이름으로 지상에 내려오신 상제님을 알아야 한다.
 
1901년 신축년 음력 7월 7일,

우르르 콰앙 쾅 난데없는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는 가운데 큰비가 쏟아졌다.


전라도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願寺) 칠성각(七星閣)에서
31세의 증산께서 무상의 대도(大道)를 깨치고 천지대신문을 여는 순간이다.
잠시 후 대원사 주지금곡이 올리는 미음 한 그릇을 비운 뒤 증산께서 이렇게 말한다.
 
“금곡아! 이 천지가 뉘 천지인고? 내 천지로다!
나는 옥황상제(玉皇上帝)니라.”『( 증산도 도전』2:11, 이 책은 1992년에 간행되었고

2003년에 개정판이 간행되었다. 이하 같은 책 인용은 2003년판‘편:장’만을 표기한다.)

 

증산은 또“내가 미륵이니라”(2:66, 10:33)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혀 주기도 했다.
증산 자신이 인간으로 온 상제요, 구원의 부처인 미륵불임을 온 천하에 선언한 것이다.
 
상제님은 1871년 신미년 음력 9월 19일(11월 1일)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優德面)
객망리(客望里: 현재는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때부터 총명하시고 호생(好生)의 덕이 많으셨다. 일곱살 때 풍물굿을 보고
혜각(慧覺)이 열리시고「천자문」을 배우실 때‘하늘 천(天) 땅 지(地)’자까지를 읽은 뒤 책을 탁 덮으셨다.
하늘 천 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 자에 땅의 이치를 알았으니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증산께서는 척박한 이 땅 민중의 한 사람으로 왔다.

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머슴살이와 산판일 등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셨다.
증산은 1894년 갑오년 1월 분노한 동학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그해 겨울에 이르러 패망할 것을 꿰뚫어 보셨다.


증산은 몸소 전장으로 달려가

무고한 창생만 죽이고 종국에는 패할 것이니 전쟁을 중지하라고 설득하셨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됐고 민중들의 피가 온 산과 들판을 적셨다. 모진 박해와 핍박이 민중의 삶에 드리웠다.
 
증산께서는 광구창생(匡救蒼生)의 큰 뜻을 품고 집을 나섰다.
1897년 가을 이후 3년 천하유력(天下遊歷)을 통해 고난의 역사 위에 모진 삶을
꺼이꺼이 꾸려가는 이 땅의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 몸소 체험하셨다.


이 땅의 백성들이 새로운 사회, 새로운 질서, 새로운 학문, 새로운 사상,
새로운 종교, 새로운 도덕,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한 것이다.
 
1901년‘이제 천하의 대세가 종전의 알며 행한 모든 법술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다’고
생각하신 증산께서는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조화권능(造化權能)만이
광구천하라는 큰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도에 들어갔다.

 

그해 6월 초 고향마을 뒷산 시루산[甑山]에서 14일 수도를 마친 증산은
이틀 뒤인 6월 16일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으로 자리를 옮겨 온몸과 마음을 불태운 끝에
마침내 무상의 대도를 열고 하늘땅과 인간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온 상제로서 삼계우주를 통치하는 조화권능을 온전히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온 천하가 가을 운수의 시작으로 들어서고 있느니라.
내가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 후천을 개벽하고 천하의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후천선경의 무량대운(無量大運)을 열려 하나니 너희들은 오직 정의(正義)와 일심(一心)에 힘써

만세의 큰복을 구하라.

 

이 때는 천지성공시대(天地成功時代)니라.
천지신명이 나의 명을 받들어 가을 운의 대의(大義)로써 불의를 숙청하고

의로운 사람을 은밀히 도와주나니 악한 자는 가을에 지는 낙엽같이 떨어져 멸망할 것이요,

참된 자는 온갖 과실이 가을에 결실함과 같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만물의 생명이 다 새로워지고 만복(萬福)이 다시 시작되느니라. (2:43)
 
대도통문을 여신 후 증산 상제님은 온 세상이 여름철이 끝나가는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으며,
이제 온 인류는 두 갈래 길, 가을낙엽같이 떨어져 소멸되느냐
아니면 가을열매와 같이 추수되어 씨종자가 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천·후천이 갈리는 가을개벽의 시기에‘하늘과 땅의 질서를 뜯어고쳐
후천을 개벽하는’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한다고 선언하셨다.
 
천지공사는 증산 상제님이 후천개벽을 맞이하여
이땅 위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물론 천상에 있는 뭇 신명까지도 구원하기 위해 짜신 새 역사의 이정표이다.
 
증산 상제님은 1901년 신축년 이후 9년 동안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1909년 6월 20일, 평소 상제님을 추종했던 많은 종도들을
둘러보던 증산 상제님은 천지공사가 그날로써 끝났음을 선포하셨다.
“내가 천지운로(天地運路)를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5:414)
 
그해 6월 24일(양력 8월 9일), 옥황상제 강증산은 원래 그가 머물렀던
천상의 나라 옥경(玉京)으로 어천(御天)하셨다.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지 39년 째 되는 해였다.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을 만난 것은 1907년 정미년 가을이었다. 그해 동짓달 초사흗날,
수부 책봉예식을 행하면서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에게“이로부터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11:5)고 하셨다.
종통대권을 고수부님에게 전한다는 말씀이다.

 

그때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과 서로 절을 하면서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三界)를 개조하느니라”(6:42)고 천명하셨다.
고수부님과 함께 온 세상을 뜯어고친다는 뜻이다.


증산 상제님은 또“나의 수부, 너희들의 어머니를 잘 받들라.

내 일은 수부가 없이는 안 되느니라”(6:96)고 말씀하셨다. 고수부님이야말로 바로

온 생명의 어머니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님은 억조창생의 생명의 어머니이시니라.
수부님께서는 후천 음도(陰道) 운을 맞아 만유 생명의 아버지이신 증산 상제님과 합덕(合德)하시어
음양동덕(陰陽同德)으로 정음정양의 새 천지인 후천 오만년 조화 선경을 여시니라. (…)
태모님께서 당신을 수부(首婦)로 내세우신 상제님으로부터 무극대도의 종통(宗統)을 이어받아
대도통을 하시고 세살림 도수를 맡아 포정소(布政所) 문을 여심으로써 이 땅에 도운의 첫 씨를 뿌리시니라.
태모님께서는 수부로서 10년 천지공사를 행하시어
온 인류의 원한과 죄업을 대속(代贖)하시고 억조창생을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니라. (11:1)
 
 
태모 고수부님-.
 
“살려 내자. 살려 내자 ”,“ 세상 사람이 죄 없는 자가 없어
모두 제 죄에 제가 죽게 되었으니 내가 이제 천하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건지리라.”
온 인류의 어머니로서,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당신-.
 
고수부님의 생애는 편의상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1880년 출생에서
증산 상제님을 만나게 되는 1907년까지 한 여성으로서 역경(逆境)을 극복하며 살았던 시기,
2) 1907년 28세 때 증산 상제님을 만나 수부로 택정되시고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맡으신 이후부터
1911년 32세 때 대도통을 하실 때까지의 도통기(道統期), 3)

 

1911년 전북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大興里)에서 도장(道場)을 개창하셔서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龍華洞) 도장시절(1933)까지‘세 살림’도장을 주재하셨던 도정집행기(道政執行期),
특히 이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26년 병인년부터 10년 천지공사의 시작을 선포하시고

천지공사를 집행하신 일이다.

 

4) 그리고 1933년 전북 군산시 오성산에 은거하여 1935년 선화(仙化)하실 때까지의
은둔기(隱遁期, 1933. 11. 5.~1935. 10. 6.)가 그것이다.
 
고수부님의 생애 가운데 절정이 된 세 살림 도정 집행기는 다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 1911년 32세의 나이로 도장을 개창하신 이후 1918년 이종사촌 동생 차경석(車京石: 1880~1936) 성도로부터
통교권(統敎權)을 빼앗기시고 당신께서 개창한 도장을 쫓겨나다시피 떠나
김제시 공덕면 송산리 오두막으로 옮기셔야했던 대흥리 첫째 도장 살림기(1911. 10~1918. 10),

 

②김제시 백산면 조종리(祖宗里)에서 도장을 주재하시다가
그곳 강씨 신도들의 배신으로 정읍시 입암면 왕심리로 옮기신 조종리 둘째 도장 살림기(1918. 10~1929. 9. 21),

 

③ 조종리 강씨 신도들의 배반으로 정읍시 입암면 왕심리로 옮겨 오신 이후
다시 왕심리를 떠나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에서
도장 살림을 주재하셨던 용화동 셋째 도장 살림기(1929. 9. 21.~1933. 11. 5)가 그것이다.
 
 
내가 고수부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이후 8년 동안 고수부님은
바로 내 의식 한복판에 하나의 화두로 오롯이 자리를 잡았다.
고수부님의 생애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어 이곳을 찾는다.


그동안 고수부님의 성지를 답사할 때마다 느꼈던 당신의 흔적들, 그 진한 체취를 나는 잊지 못한다.
고수부님의 체취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 여기 오성산이다.
 
한 생애 오직 천하창생을 건지기 위해 고난의 삶을 살다가
다 부서진 육신을 의탁하셨던 오성산, 나는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
 
차는 계속 오솔길을 올라가고 있다.
수부님을 생각할수록 콧날은 계속 시큰거린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눈물을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았다.
 
그때였다. 정수리 위에서 청아한 목탁소리가 또로록 똑 똑 ,
따스한 봄날 처마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처럼 애처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제1장 돌미륵
 
“ 내가 법륜보살로 있을 때 상제님과 정한 인연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왔느니라.”
 
고수부님이 출생하신 곳은 전남 담양군 무정(武貞)면 성도(成道)리.
내가 그곳을 처음 찾았던 것은 2000년 6월 2일이었다. 그것은 이후 8년 동안 기회가 있을때마다
계속될 고수부님 성지 답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일행은 나와 가이드를 포함해 4명이었다.
 
 
드디어 고수부님을 만나러 간다. 불 먹은 듯 가슴은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1년 전,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나는 고수부님을 만났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로부터 10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에서《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을 주 1회씩 연재하였는데
그 중의 한 편이〈시대가 여성의 삶을 바꿔놓다〉(1990. 5. 4)라는 제목이었고 주인공이 고수부님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해체,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중심 담론으로 한창 밀려오고 있을 때이기도 했지만 그 기사는 꽤 흥미를 끌었다.
그 기사는 고수부님을 개화기시절 여성해방 혁명가,
민중의 꿈을 이루는 여성, 후천 여인상의 표상 등으로 묘사했던 것 같다. 거기까지였다.
그때 처음 만났던 고수부님을 나는 아슴한 기억 저편으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20세기 마지막 해에 와서 한 세기 전에 활동했던 당신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고수부님의 행적을 수록한 몇몇 기록들이 있지만 가장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철저한 현지증언을 거쳐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도전』이이 유일하다.

전체 11편 가운데 마지막 편이「태모 고수부님」편이다.
이『도전』기록이 없었다면 고수부님의 전기적 생애를 복원하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고수부님이 보여준 전기적,
사상적 행적은 물론 당신이 현재까지 미치는 큰 영향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고수부님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그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되었고,
일천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작은 디딤돌을 놓고자 마음먹었다.

지난 1년여 동안 구해 볼 수 있는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자신도 생겼다.
이제 현장답사를 통해 당신의 체취를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자. 나는 고수부님의 전기적 생애를 복원하는 대장정에 올랐다.

출발지는 대전-.
 
 
호남고속도로를 남으로 두 시간 정도 달려
동광주를 지나 고서나들목에서 88고속국도로 갈아타고 동으로 20여 분을 가면 담양이다.
나들목을 빠져나와 13, 15번 도로로 갈아탔다.


차는 오른 편 들판 사이로 강이라고 하기에는 좀 크고 시내라고 하기에는
작은 오례천(五禮川)을 기웃거리며 한적한 시골 도로를 따라 달린다.
오랜만에 가슴을 탁 터놓고 보게 되는 시골풍경이다. 농촌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 듯하였다.

그러나 차는 곧 속도를 늦추었다.


곧장 가면 순천, 화순이고 60번 도로로 갈아타면 곡성이 나올 것이다.
11시 방향으로 담양의 주산인 고비산(高飛山: 462.3m, 비봉산으로 불리기도 한다)을
흘끔흘끔 바라보면서 차는 담양군 무정면 오룡리에서 천천히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아늑하게 펼쳐진 들판. 푸른 벼들이 식식거리며 자라고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마치 거미줄을 타고 가듯 구불구불 꺾어진 마을길을 1킬로미터 정도 갔다.
들판 맞은편 마을 뒤쪽으로 세 개의 산봉우리가 보인다. 왼쪽부터 금산(錦山), 매봉, 영천산(靈泉山)이다.
골짜기 하나씩을 끼고 자리 잡은 마을도 세 개가 보인다.

 

오른쪽부터 서정(西亭), 중리(中里), 도동(道洞) 마을이다. 세 마을과 동떨어져 있으나
조금 전에 지나쳐 온 들판 저쪽에 위치한 성덕(成德)마을까지 합쳐 하나의 행정구역인 성도리가 된다.
 
일행이 찾아가는 곳은 매봉 기슭에 2,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도동이다.
마을은 담양이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떠오르게 되는 저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행은 마을 초입의 오른 편에 서있는 정자 앞을 지나 마을로 향했다.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 도동-. 고수부님의 탄강지로 알려진 마을이다.
나로서는 고수부님의 탄강지부터 이 세상 일을 모두 마치시고 천상으로 떠나신 그곳까지
고수부님의 유적지를 단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답사하겠다는 결심으로 작정하고 출발한 길이다.

 

그러나 답사 시작부터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당신이 오신 탄강지부터 명확하지가 않은 까닭이다.
고수부님은 그렇게 신비로움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찾으면 찾아갈수록 고수부님이 있는 풍경은 더욱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이곳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가 고수부님의 탄강지로 알려진 것도
당신 도문의 수석성도였던 고민환의 기록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고민환은 고수부님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뒤에 나온 몇몇 문헌들도 같은 탄강지를 택하고 있다.

 

물론『도전』에서도 현지답사를 통해‘전라도 담양도호부 무이동면
도리(潭陽都護府無伊洞面道里) 고비산(高飛山) 아래에서 탄강했다’(11:2)고 확인하였다.
고수부님 탄강 당시의 행정구역명칭은 그랬다.

 

이후 몇 번에 걸친 변화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무이동면은 무이상면, 무이하면, 무이중면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무이상·중·하면을 합하여 무면(武面)이, 1918년 무면 8개 리(里)와 정면(貞面)

7개 리를 합하여 무정면이 된 것이다.
 
고수부님의 탄강지를 도리(道里)라고 하는 것은 이러하다.
원래 성도리 도동·서정은 영조 8년(1732)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당시는 도동 마을이라고 불렸다.


후에 도동 서쪽 마을은 정자가 있어 서정이라 불려졌고
도동 마을과 서정 마을 중간에 있는 마을은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리로 불렸다.

 

이 3개 마을이 1914년에는 무면에 편입되어 이웃마을 성덕(成德)과 함께 성도리로 개칭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담양군지』). 결국 지금으로서는

고수부님이 태어난 마을이 성도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리 중에서도 어느 마을인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고수부님의 생애를 추적해 가다 보면 나는 이따금씩 우연일까, 필연일까 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일찍이 공자는 정명(正名)을 강조하였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로 잡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름이든 땅이름이든 거기에 합당한 명분이 있다는 말이다.
 
고수부님의 탄강지에 붙어 있는 땅이름도 신비로운 느낌을 갖게 한다.
고수부님이 탄강한 마을이‘도동’이고,
그분이 활동했을 때 이웃 세 개 마을을 묶어‘성도리’로 바뀌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는 터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도동’은‘도의 마을’, ‘성도리’는 ‘도를 완성하는 마을’이 된다.
우주 주재자인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맡은
고수부님이 탄강한 마을 이름이‘도의 마을’이요,‘ 도를 완성하는 마을’인 것이다.
 
같은 의미망에서 증산 상제님의 탄강지와 비교할 수 있다.
증산 상제님이 탄강한 고부 객망리는 일명 손바래기라 하고 탄강하기 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였다.
‘하늘의 주(主)를 기다리는 마을’이란 뜻이다(1:14).

 

시루산 아래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 있다 하여
원래‘선바래기[仙望里]’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해서 손바래기[客望里]가 되었다.
‘ 손’에는 신(神), 선(仙)의 의미가 있다고. 한 마디로 증산 상제님이 그곳으로 오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는 얘기다.
 
도동 마을을 답사한 뒤 일행은 대나무 사이로 뚫린 좁은 길을 올라갔다.
‘담양’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대나무다.
바로 그 대나무 숲을 걸어가는 내 마음은 여전히 안타깝기만 하였다.


2000년 첫 답사때를 기준으로 1년 전부터

내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주인공 고수부님이 탄강지에서조차 미로 속에 있는 까닭이다.
대숲이 끝나는 지점은 산으로 오르는 능선이다. 우리는 능선을 가로 질러 마을 뒤편 골짜기로 향했다.
 
가이드는 어디로 가는지 앞뒤 설명도 없이 무성하게 자란 풀밭을 헤치며 계속 나아갔다. 길은 없다.
폐허가 되어 귀신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인가의 앞마당을 지나 약간 경사진 뽕나무밭을 헤치고

얼마쯤 갔을까. 골짜기 밑으로는 미나리꽝과 저수지가 보였다. 일행은 골짜기 위쪽으로 갔다.
가이드는 마치 숨겨놓은 보물이라도 찾으려는 듯 잡초와 가시덤불이 울창한 숲을 헤치기 시작하였다.
 
“바로 저깁니다! 저기에 미륵불이 있어요.”가이드가 외쳤다.
커다란 나무줄기 사이로 보이는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일행은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골짜기 사이를 건너 뛰어 손바닥만 한 미나리꽝을 지나 공터로 갔다.
가이드는 공터 한쪽에 허리쯤 닿는 작달막한 콘크리트구조물 앞으로 갔다.

인기척 하나 없는 주위에는 적막한 고요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구조물 앞으로 다가선 나는 앗, 터져 나오는 소리를 꾹 눌러 삼켰다. 구조물 안에는

형태조차 뚜렷하지 않은 돌부처가 서 있었다.

 

돌하르방 같은 자세로 상반신만 드러내고 있는 부처. 뭐랄까,
진한 사골국물을 그득히 담은 시골 뚝배기 같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돌부처였다.
우리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다. 아. 이 부처는 왜 세상 속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등지지도 못한 채 이 구석진 골짜기에 외로이 혼자 서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전라도만큼 미륵신앙이 널리 퍼진 지역이 또 있을까.
전라북도가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으로 대표되는 미륵신앙의 본산지라면 전라남도는
이곳 담양에서부터 저기 남으로 화순까지 미륵신앙의 전당 아닌 곳이 없다.
 
언젠가 나는 운주사를 답사하고 돌아오던 길에 화순 변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도로를 등진 채 들판 한복판에 서 있는 돌미륵을 만난 이후 한동안 충격의 늪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민불(民佛)이라고 했다. 민중의 부처란 얘긴가!
민불앞에 섰을 때 받았던 충격이란….
비슷한 시기에 만났던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팔공산 능선의 최동단 관봉 정상에 거대한 모습으로 정좌한 갓바위 부처님은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잘 생겼다.

머리 위에는 평평한 돌 하나를 갓처럼 쓰고 둥근 얼굴에 굳게 다문 입,
당당하고 건장한 몸체에는 더할 나위없는 위엄이 깃들어져 있으니,
과연 위없는 가피력(加被力)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화순 변두리 들판에 장승처럼 외로이 서 있는 민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부처가, 돌미륵이 이런 형상일 수도 있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영락없이 각시탈 같은 모습이다. 아니, 갓 시집온 새색시 얼굴을 하고 있는 부처였다.
핍박당하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 주긴 주되, 그것을 주는 것조차 부끄러운 듯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나는 또 하나의 민불을 보고 있다.
화순 민불이 새색시라면 이곳 담양땅 고수부님의 탄강지 뒷산 골짜기에서 보고 있는 돌미륵은
오랜 농사일로 얼굴은 물론 양 어깨와 손이 마치 곰발바닥같이 투박한 농부의 모습이다.
형님 같은 부처님, 친구 같은 부처님, 미륵부처님….

미래의 부처님, 미륵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아닐는지.
 
가이드가 일부러 여기까지 우리 일행을 안내하고 돌미륵이라고 강조하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증산 상제님이 미륵이니까,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요 종통계승자가 되는
고수부님이 돌미륵이 자리한 이곳으로 오는 것이 필연임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터였다.
돌미륵이 이곳에 세워진 연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고수부님이 탄강할 당시에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면 고수부님의 아버지는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가고 오던 길에, 아니면 풀을 베러 와서 이 돌미륵 앞에 기도했을 것이다.

 

물론 고수부님의 어머니도. 이제 알게 되겠지만, 그들의 기도 내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들도 이 땅에서 자라난 민초인지라 크게는 미륵세상을 꿈꾸었고, 그 꿈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했을 터이지만,
당장에는 그들 부부의 가장 큰 과제를 풀어달라고 기도했을 터였다.


혼인한 이후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 지났으나 아이 하나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부부는 이곳 돌미륵 앞에 와서 제발 아이 하나 점지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기도하지 않았을까.
나는 키 작은 돌미륵 앞에서 근처 마을 어딘가에서 탄강한 고수부님을 생각하며 숙연한 마음으로 참배를 하였다.
 
 
때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밀물같이 밀려오고 안으로는
봉건집권세력이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던 19세기 말-.

나라의 운명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과 암흑의 계절이었다.


1866년 조선 정부는 먹장구름처럼 밀려오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로 몇 천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들과 외국인 선교사를 처형하였다.


병인박해가 그것이다. 같은 해 7월 제너럴 셔면(General Shoeman)호사건, 9월에 병인양요,
그리고 1871년 4월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사건, 그리고 1876년인 고종 13년 2월,
일본군의 무력시위 아래 한·일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1880년 음력 3월 26일이다(제적부 상에는 8월 13일로 등재되어 있다.
이하 고수부님 관련 과거 연대는 모두 음력이다).
전라도 담양도 호부 무이동면 도리, 한 오두막집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고덕삼(高德三)과 어머니 박성녀(朴姓女) 사이에 태어난 장녀였다.
고수부님의 제적부에 따르면 고덕삼의 출생일은 미상이고 박성녀는 1845년 8월 17일 박춘화(朴春化)와

송세녀(宋世女)의 장녀로 태어났다.


제적부상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고수부님과 함께 당신의 어머니인 박성녀다.
제적부상에 박성녀로 기록되어 있으나 남성중심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당시 이름조차 없는 여성이 제적부에 등재될 때 그런‘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박씨라는 성을 가진 여자라는 뜻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편의상 박씨 부인을 제적부 이름에 따라 박성녀로 표기한다).
 
이날 태어난 아이의 본관은 장택(長澤), 이름은 판(判) 자 례(禮) 자. 훗날 수부가 될 바로 그 분이다.
고덕삼과 박성녀가 혼인한 것은 1862년 3월 15일이었다.


박씨 부인으로 보면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왔으나 아이가 없다가 18년 만에 낳은 늦둥이였다.
고수부님의 제적부에는 어머니 박성녀 부인과 함께 고수부님도‘고성녀(高姓女)’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
결국 제적부상에 따르면 박씨부인은 물론 고수부님도 이름조차 없는, 한낱‘여자’로 온 것이었다.
용봉.jpg 
계속............